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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의 능력안에 사는 성도 (롬 08: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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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부활을 기념하며 부활을 기억하며, 부활의 신앙을 회복하기위해 지키는 날
안식일(금 해질녁-토)이 개념이 부활을 통해 주일로 변함
부활은 주님께서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신 날

부활의 능력안에 산다는 의미
첫째로 부활의 능력안에 산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현재적 부활을 체험하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현재적 부활, 즉 부활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부활의 삼중적 의미을 생각해보면 (과거적 의미, 현재적 의미, 미래적 의미)
<과거>-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분명히 믿고 고백하는 신앙인
<미래>-예수님께서 부활후 첫 열매가 되셨듯이 우리도 주님을 따라 신령한 몸으로 부활할 것을 믿는 신앙
<현재>-봄에 새싹이 돋고, 꽃이 새롭게 피어나듯, 신앙적인 새싹과 새 꽃이 피어나는 신앙. 늘 변화하고 성장하며, 늘 새로운 은혜를 향해 열려진 신앙

예배가 , 기도가 , 말씀이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십자가의 죽으신 예수님만 알고 있을 때
1>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듯, 믿음의 자리-사명의 자리-소망의 자리를 떠나 의심과 불평과 절망과 낙망의 자리로 내려가고 있었으며,
2> 가까이 계신 예수님도 알아보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영적 소경의 지경에 있었습니다.

눅 24:15-16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부활의 주님을 온전히 영접하지 못한 우리의 모습일수도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보았지만 부활의 주님을 믿지도 못한 베드로와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옛 모습으로 돌아가서 세상일을 다시 했지만 헛수고-우리도 이런 헛된 일을 반복하기도 합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을 바로 옆에서 목격하였지만 부활의 주님을 믿지 않았던 막달라마리아는 어떻습니까 빈무덤에서 곁에 있었던 예수님의 소리를 듣고도 동산지기로 알았습니다.

드디어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온전히 만났습니다.
주님의 성만찬을 통해 눈이 밝아지고(눅24:31) 말씀을 통해 마음이 뜨거워져서(눅24:32)

눅 24:30-32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믿음의 자리, 사명의 자리, 소망의 자리를 회복했던 것 처럼 우리도 매 예배에서 매 기도에서 매 말씀에서 찬양에서 성만찬에서 부활의 주님을 체험하여야 합니다.

둘째로 부활의 능력안에 산다는 것은 사망의 권세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권세를 이기신 주님처럼 세상의 권세(그안에는 질병의 권세, 염려와 질곡의 권세, 죄악과 사탄의 권세를 모두 포함합니다.)를 우리는 이기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임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환란이나 질병이나 슬픔이나 고통이나., 아니 죽음까지도 그것은 우리의 신앙여정에 거쳐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다. 환란이나 슬픔이나 죽음까지도 그것은 결코 끝이 아니며 결론이 아닙니다. 그것을 결론이며 끝이라고 여기는 것은 우리를 절망케 하고, 낙심케하려고 사탄이 파놓은 함정에 빠진 증거일 뿐입니다. 영적 성장을 향한 진통이며 성장통(成長痛)인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환란을 만나도 담대하라 세상을 이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베드로는 고난을 잠간 고난, 잠간 근심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벧전 1:5-7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 4:12-14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벧전 5:10-11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권력이 세세 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사도바울은 환란중에도 즐거워하는데 그 환란이 이룰 소망을 바라보기 때문이며 그 소망은 하나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진 증거라는 것이다. (롬5:3-5)

롬 5:3-5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사도바울
그리스도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권세는 아무것도 없음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주님이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이루신 놀라운 승리의 권세인 부활의 능력안에 우리가 있기에 우리는 결코 결단코 주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가 없습니다.

롬 8:35-39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어떤 권세도 죽음의 권세도 부활의 능력을 이길 수 없음을 고백 선언)

부활의 능력안에 우리가 거하면, 부활의 확실하 믿음안에 우리가 거하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질병도 핍박도 환란도 마귀도, 아니 죽음마저도 부활의 능력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질병이나 핍박이나 환란이나 마귀나 아니 죽음까지도 우리 신앙의 여정에 과정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절대로 절대로 끝이 아닙니다. 결론이 아닙니다.

(예화) 플라스틱 달걀에 담긴 것
부활절을 앞두고 주일학교 선생님이 자기 반 아이들에게 플라스틱으로 만든 속이 빈 달걀을 하나씩 나눠줬다.그리고 부활주일 교회에 나올 때 빈 달걀 속에 무엇이든 생명있는 것을 한가지씩 넣어오도록 했다.

부활주일 아침 아이들은 저마다 그 속에 한가지씩을 넣어가지고 왔다.선생님은 차례대로 달걀을 열어보았다.그 속엔 꽃잎,나뭇잎,곤충 등 생명있는 것들이 들어있었다.그런데 지병으로 고생하는 한 아이의 달걀 속은 비어 있었다.그것을 본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웃었고 선생님은 괜찮다.몸이 많이 아팠던 모양이구나라며 위로해 주셨다.

그때 그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선생님, 저는 생명을 준비했어요.예수님 무덤은 비어 있잖아요.빈 무덤에 뭘 다시 넣겠어요 10개월 뒤 그 소년은 지병으로 죽었고 그의 장례식날 그의 관 위에는 꽃 대신 빈 플라스틱 달걀이 놓여 있었다.

예수의 빈 무덤은 웅변한다.아무 것도 생명은 가둘 수 없노라고.그리고 빈 무덤이야말로 죽음을 이긴 승리의 깃발이라고.빈 무덤에서 들려오는 환희의 개선가 때문에 우리 모두는 오늘도 행복하다.

이 소년은 빈 무덤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죽음앞에서 죽음에 얽매인 것이 아니라 죽음을 지나면 가게될 저너머 부활의 현장을, 예수님이 팔 벌리고 기다리고 계시는 그 곳을 바라보고 있엇습니다.

그러기에 히11장은 부활의 능력안엣 사는 성도들을 가리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성도라 증언합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히 11:33-37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예화) 부활절, 그 기적의 현장에서
그날은 부활주일이었습니다. 친구의 손에 끌리다시피 해서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억지로 따라왔지만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 알 수도 없었습니다. 나는 이미 내가 가진 신앙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으니까요.

하나님을 믿고 그분 안에서 만난 사랑하는 나의 남편은 바로 넉달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를 너무 많이 사랑했는데... 그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기약도 없는 이별만 남긴 채 그는 가버렸습니다.

우린 겨우 일 년을 함께 살았을 뿐인데. 절망했습니다. 세상에 절망하고 나에게 절망하고, 나락 끝까지 떨어진 듯, 삶이 끝나버린 듯 괴로웠습니다. 결국 나는 신앙을 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으니까요. 만일 계셨다면 그이를 먼저 보내진 않았을 겁니다. 친구와 내가 교회에 들어갔을 때, 자리는 벌써 꽉 차 있었습니다. 이처럼 꽉 들어찬 교회는 본 적이 없었습니다. 대체 무슨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온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너무 밝아보였습니다. 아무도 나처럼 고통의 침같은 건 지고 있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 넓은 교회 안에서 안절부절하는 건 오로지 나 뿐이었습니다. 음악이 울려 퍼지자 친구는 내 손을 꽉 잡았습니다. 음악이 울려퍼지자 마음은 조금 가라앉았습니다. 그 때 강단 위의 한 사람이 성경 구절을 읽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순간 이상한 기류 같은 것이 나를 감싸기 시작했습니다. 그 넓은 교회 안에 나 밖에 없는 듯 눈 앞이 캄캄해졌습니다. 두려움에 두 팔을 허공에 휘저었습니다. 그 때 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아니요, 아니요, 난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를 당신이 데려가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네가 믿느냐." '아니요, 그는 이미 죽어버렸고 내 삶은 절망입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아니요.'
"이것을 네가 믿느냐." '......'
"이것을 네가 믿느냐." 고개를 흔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가요. 내 눈에서 쉴새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겨우겨우 나는 한 마디를 내뱉었습니다. '왜...왜 저를 사랑하시나요. 왜 아무것도 아닌 저를 위해 죽으신거죠 왜요' 그 때 한 빛이 내게 다가와 나를 감싸안는게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네가 믿느냐." 눈 앞이 환해셨습니다. 그제야 안 것입니다. 진정한
부활의 의미를. 그 이후로 내 눈과 코에서 흘러내린 물들로 얼굴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내 가슴 속으로부터 솟아나는 큰 울림으로 인해 몸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친구가 가만히 속삭였습니다. "축하해. 너에게 성령이 임하셨구나."

그러자 갑자기 나는 이젠 큰 소리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나를 짓누르던 짐이 사라져버렸어. 짐이 사라져버렸다구. 이제 괜찮아. 난 이제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낮은울타리, 2000. 4월호>, 양복임/전북 전주시 완산구

셋째로 부활의 능력안에 사는 삶을 살며 그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우선순위의 삶을 살아야 하며 , 말씀을 먹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비록 입에는 달고 배에는 쓴 말씀이지만 그것을 가감변질 없이 먹고, 순종할 때 우리는 주님의 부활의 능력안에 거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시험에서 마귀의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셨던 그 말씀의 능력을 우리도 소유하게 됩니다.

예배보는자가 아니라. 예배드리는 자가 아니라, 예배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보는 자, 말씀을 듣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먹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먹게 되면 그 말씀이 "입에는 달고 배에는 쓰지만"-실천하고 순종하는 삶이 어렵고 힘들지만 그 것이 부활의 능력안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성도의 길입니다.

(결론)
오늘도 부활의 능력안에 사시길 원하시는 성도들은
오늘 지금 이 시간속에서 나를 만나주시고 사랑해주시고,
오늘 지금 여기에서 나를 치유하시고 회복하시며 소생시키시는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를, 마음이 청결한 자를 주님은 만나주시고
사랑해주시고, 치료해주시고, 회복시켜주시며, 복주신다 약속하셨습니다.

오늘도 부활의 능력안에 사시는 성도님들은
우리에게 닥치는 환란이나 염려나, 질병이나 죽음마저도
두려워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을 위하시는 데 어떤 누가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습니까
오직 우리는 환란과 염려와 질병, 아니 죽음 저너머에서
우리를 두 팔 벌리고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장애물 경기에서 장애물만을 바라보고 뛰는 것이 아니라 장애물 저 멀리에서

반석감리교회 김기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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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입

크리소스톰은 초대 교부들 가운데 최고의 명설교가였다.

사람들은 그를 '황금의 입'이라고 불렀다. 청중은 그의 설교를 듣다가 자주 박수를 치곤 했다. 그는 세상의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리오 죽음인가 여러분이 아시잖습니까 그리스도가 내 생명인 것을. 나는 죽으면 오히려 생명을 얻습니다. 유배가 두렵습니까 땅은 어디나 다 주님께 속해 있습니다.

재산을 잃는 것입니까 우리가 세상에 왔을 때 아무 것도 가져온 것이 없고 떠날 때에 아무 것도 갖고 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공포는 내 눈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좋은 것도 다 나에게는 우스운 것들입니다. 가난도 두렵지 않고 부귀도 바라지 않고 죽음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의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두려워했다. 우리는 어떠한가 나는 두려울 때 주님만 의지하나이다(시 56:3)는 성경 말씀은 매일 우리가 고백하는 노래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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