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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의 의미 (마 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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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발장을 지은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오늘 의 목적은 싸우는 것이요, 내일의 목적은 이기는 것이요, 일생의 목적은 잘 죽는 것이다" 옛 사람들이 "잘 죽는 것"을 그만큼 중요한 일로 생각했다는 것을 잘 엿볼 수 있는 말인데 그만큼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 두려운 죽음 앞에서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나폴레옹은 죽는 순간에 자 신이 가장 사랑했던 세 가지를 중얼거렸다고 하죠. "내 조국 프랑스....충성스러운 구인....사 랑하는 아내 죠세핀..." 그의 고백에는 일생을 마감하는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베토 벤이 죽음을 맞이하며 읊조린 말속에는 진한 허무와 체념이 묻어납니다. "친구여! 이제 희극 은 모두 끝났네" 그런가하면 톨스토이는 죽음의 불안과 공포에 몸을 떨었다고 합니다. "이 제 나는 어찌 할 것인가!" 스탈린은 임종할 때 두 눈을 부릅뜨고 왼손을 내저으며 저항했다 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주금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죽음이 있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힌 한 유대청년. 머 리에는 가시관, 손과 발에는 못이 박혀 죽어가면서 그는 평안한 모습으로 말했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 죽음은 여느 죽음과는 달랐습니다. 죽음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살아나고, 살리 기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생명을 주는 죽음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의 문제를 생 각케 했고 또 생명에 대해 생각케 하는 특별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3일만에 부활하셨고, 우리 곁에 오셨으며, 오늘 우리 모두에게 다시 한번 생명을 주고 계십니다. 그분은 죽음이라 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결이 없는 사람은 누구든 어 리석은 사람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바른 해답을 가지지 못한 채 하는 모든 일들은 다 쓸데 없는 일들입니다. 허무하고 무상하기 그지없는 일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어리 석은 부자가 왜 어리석다는 겁니까 공부를 많이 해야만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 다. 돈을 많이 벌어야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잘사느냐 못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의 문제는 생명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문 제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궁극적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잘살고 못살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명예니 권력이니 합니다마는 결국은 생명의 문제 안에 놓여있는 것들입 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우리들이 세상에서 그토록 목말라하며 가지려고 하고 이루려고 하 는 모든 것들이 정말 대수롭지 않은 하찮은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욕망에 는 버려야할 욕망이 있고 가져야할 욕망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모두를 생각해보아도 역시 생명에의 욕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는 듯합니다. 가끔 우리는 이런 말을 잘합니다. "내가 죽어야지!" 혹은 연세 드신 할머니들은 "늙으면 죽어야 해"합니다. 그런데요 누가 한번 옆에 서 "그러면 죽으세요" 해보세요. 큰 일 나지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할머니가 하도 "내 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 하니까 손자가 밥풀에다가 밀가루를 묻혀 가지고 "할머니 이 거 죽는 약이랍니다." 하고 드렸더니 그 날부터 할머니가 한달 동안 말 안 하더랍니다. 그렇 게 입버릇처럼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는데 "그러면 죽으세요" 한 것이 잘못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죽고 싶다"는 말은 "살고 싶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욕망 이예요. 더 나아가서 차라리 그럴 바에야 죽겠다는 말은 그나마 양반입니다. 문제는 자기 욕 망을 이루기 위해서 남을 죽인다는 게 문제입니다. 죽여서 자기 욕망을 채우겠다는 것입니 다. 여러분! 정말 생명문제보다 더 큰 욕망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게 어리석은 겁니다.

성경에도 보면 이런 사람이 나와요. 가야바라고 하는 사람이 있지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원흉입니다. 우리가 신앙고백 할 때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하면서 빌라도만 못된 사람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만 사실 이 가야바 가 더 나쁜 사람입니다. 이 가야바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 하는 도다"(요 11:50)-한 사람을 죽여서 모두가 편안할 수 있다면 죽이는 것이 옳지 않느냐. 하나 죽이는 게 무슨 문제냐. 편안한 게 문제지. 내 욕망을 위해서라면 몇 사람을 죽인다 한들 무슨 대단 한 문제가 되겠느냐는 식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럴 수 있는 것입니까 다른 문제도 아닌 생명의 문제입니다. 목숨이 걸린 문제라고요. 이 생명의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문제인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요즈음 생명복제니 인간복제니 하는 문제로 온 세계가 떠들썩합니다. 생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대신 하겠다는 위험한 발상이 나돌더니 며칠 전에는 네덜란드에서 안락사를 인정하는 법을 통과 시켰다고 합니다. 물론 그동안도 공공연하게 이 안락사는 자행되어 왔다고는 합니다마는 법으로 통과 시켰다는 것은 죄를 합 법화하자는 이기적이고 모순적인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라고 여겨집니다. 이미 지난해만해도 2,123명의 환자가 은밀히 안락사 했다고 합니다. 네덜란드에서만 그랬다고 하니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인간의 손에 의해 의도적으로 죄의 희생양이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생명이란 이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생명이 모든 것 위에 있습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생명의 문제는 모든 것보다 우선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교도소를 만드는 일이 교계 내에서 활발히 진행 중에 있고 사형제도 폐지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부활의 문제는 곧 죽음의 문제요, 생명의 문제입니다. 죽음으로써 생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죽음의 위력이란 대단합니다. 가진 것, 누리는 것, 무엇이든지 죽음과 함께 다 없어집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많은 소유나 피나는 노력도 죽음 앞에 무력합니다. 그렇다면 이 죽음 앞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유명한 실존주 의 철학자<하이덱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지 않겠다는 혹은 죽지 않으리라는 생각 때 문에 인생은 불행하다." 안 죽겠다, 못 죽겠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불행하게 살아간다는 것 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으로는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죽음을 피해서 해결 하자는 것이 아니요 죽지 않고 영원히 살면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혹 은 나 대신 다른 사람을 죽여가면서라도 내가 살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을 이긴다는 것은 죽음 너머의 부활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바 죽음에 대한 해답은 죽음 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한 변화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부활로써 죽 음에 대한 해답을 줍니다. 요11:25-26에서 엄청난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 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니 아니하리라." 이 말씀에서 주님은 장수의 문제를 말씀하시고자 함이 아닙니다. 부귀영화의 문제도 아닙니 다. 누구를 죽이고 죽고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부활의 문제입니다. 곧 영원한 생명 의 문제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아십니까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이루시고 부활하심으 로 선물로 주시는 이"영원한 생명"을 아시느냐 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눈으로 목격한 증인들도 있습니다. 이 증인들 앞에서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답과 영 원한 생명에 대한 선물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부활은 잊고 살았던 우리들의 신앙에 대한 회복을 상기시켜 줍니다. 부활은 회 복입니다. 죽었던 것들이 새 생명을 입는 것과 동시에 침체되었던 것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무덤의 종교가 아닙니다. 생명이 없는 듯 무덤 속에 파묻혀 그렇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과 소망과 생기로 꿈틀거리는 종교입니다. 무덤 속에 묻힌 모든 것을 파 내어야 합니다. 죽어버린 신앙, 묻혀 버린 열심, 깨져 버린 관계들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 이 부활이 가져다 주는 의미입니다. 부활이 있기 전에는 주님과 제자들 사이에 형성되어 있 던 신뢰와 사랑의 관계는 깨어져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 하며 부인했고 가룟유다는 돈 몇 푼 때문에 예수님을 팔기까지 했고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 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뿔뿔히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인간관계는 한 번 깨어지고 나면 다시 회복하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좋은 신뢰관계를 형성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깨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데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됩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부 활은 이러한 관계를 일순간에 회복시켰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천사가 전해 줍니다마는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직 전 성만찬 후에 제자들이 배반 할 것을 예고하시면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마26:32에 보면 나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관계회복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배신 하고, 팔아먹고, 도망하여 나와의 관계를 깨트려 놓더라도 내가 그 관계를 회복하마"하는 깊 은 사랑의 의미가 이 부활사건을 통해서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0:19 절에 보면 갈릴리 바다에서 실제적으로 제자들 앞에 나타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 다. 주님께서 먼저 깨어진 인간관계를 회복시키시는 놀라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또한 얼마나 많이 그리고 자주 주님과의 관계에 금이 가는 행동을 하며 삽니까 사랑의 관 계를 저버리고 삽니다. 마치 베드로처럼 전적으로 내게 불리할 땐 예수 믿지 않는 사람처럼 얼른 가면을 바꾸어 쓸 줄도 압니다. 돈 때문에, 물질 때문에 신앙의 중심을 팔아먹고 때로 는 주님을 내 거래의 수단처럼 여기는 가룟유다의 삶을 살았습니다. 때로는 귀찮고 내 삶에 작은 어려움이 닥칠 때 베 홑이불을 버리고 도망치는 제자들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이 모든 깨어진 관계를 오늘 부활하심으로 일순간에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우리 쪽에서 깨트린 관계, 우리가 허물어 버리고 어찌할 수 없어서 무덤 속에 꼭꼭 숨겨두고 살 았던 죄와 게으름과 악함과 부끄러움을 끄집어내어 회복 시켜 주셨습니다. 이 부활의 진정 한 의미를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도 부활해야 합니다. 이 모든 불 신앙적인 생각과 행위가 죽어 없어지고 새로이 부활해야 합니다. 회복되어야 합니 다. 죄로 찌들어 죽었던 우리의 영혼이 이 부활주일에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 수님은 살아나셨지만 우리 속에 부활하신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심령은 죽은 것입 니다. 주님의 부활이 주는 의미는 우리에게 회복되지 못할 일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덤 속에서 썩어가던 나사로의 생명이 회복되었습니다. 문둥병으로 몸이 썩어 죽어가던 아 람나라 나아만 장군도 회복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이보다 더한 질병으로 썩어가던 우리의 인생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더더욱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 에서 마라의 쓴 물이 단물로 바뀌는 회복의 역사, 부활의 역사가 오늘 부활주일에 여러분의 삶에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생명회복은 물론이요 다른 모든 회복이 불가능했을 것입 니다. 부활이 주는 메시지는 "회복"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주 신 사명, 그리고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회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삶의 주 위에 깨어진 모든 것이 회복되는 감격의 부활주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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