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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의 증인들 (행 0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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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4대 절기가 있습니다. 부활절과 맥추절 그리고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입니다. 기독교 선진국가에서는 이 부활절이 사회적인 명절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성탄절은 사회적인 명절이 되어 있지만 아직도 부활절은 그렇지 못합니다. 사실 맥추절이나 추수감사절, 성탄절 보다 부활절은 기독교가 이 땅위에 존재하는 가장 강렬한 메시지를 주고 있는 절기입니다. 부활절은 기독교의 가장 강렬한 메시지인 부활의 진리가 강조됨으로써 기독교다움이 부활절을 통하여 확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활절은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도전을 받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처음부터 그것을 부인하는 사람들과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들로 대립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부활을 전하는 사람들과 부인하는 사람들이 핍박 자와 핍박받는 자의 역할로 서로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증거들도 많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결코 부인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더 명백히 드러났고 부활의 증인들이 늘 승리를 했습니다. 이론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는 그 증거가 네 가지로 강조됩니다.

가설을 넘어서서

첫째는 기절설입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매를 맞고 기절을 하였다가 깨어나서 도망을 하였지 실제로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도적설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홈쳐다가 감추어 놓고 보라 빈 무덤이다 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환상설입니다. 제자들과 여인들이 예수님을 사모하다가 부활하신 주님의 환상을 본 것이다 라고 주장을 합니다. 네번째는 첨가설입니다. 이 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내용을 첨가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부활하지 않았는데 부활하신 것처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다는 말을 첨가해서 부활하신 것처럼 꾸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네 가지는 강력한 주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부활을 부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만큼 이것은 인간들이 조작하여 부활을 방해하고 예수의 부활을 부인코자 하는 책략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명백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이 부활을 역사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우선 성경의 증거라 하면 구약을 말하는데 구약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시편 16편10절에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섞지 않게 하실 것이라"
시편 2편7절에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주님의 부활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메시야가 죽지 않고 살아난다는 부활의 예언은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은 사건적 예언을 하시는데 가장 명백한 사건은 요나의 표적입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졌다가 삼일만에 물고기 뱃속에서 다시 토함을 받고 살아났습니다. 그 요나의 죽음과 삶을 주께서 부활의 표적으로 인용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 앞에 표적을 보여달라는 요청을 받고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그것은 벌써 구약의 요나가 사건으로 예언을 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요나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바로 내가 십자가를 지고 죽었다가 부활하는 계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3-4절에서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였습니다. '성경대로' 란 말은 구약의 예언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렇게도 명백한 성경적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40일간의 사역

그런가 하면 부활의 증거는 사도들의 증거에서 강력한 뒷받침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목숨을 걸고 우리가 부활의 증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만져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부활경험은 목숨을 걸고 증거할 수 있었던 근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땅에 계셨습니다. 이것은 큰 의미를 가집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날 밤에 아무도 모르게 홀로 하늘나라에 올라가셨다면 앞서 말했던 네 가지 주장이 합리화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무도 예수를 본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흔적이 역사 속에 없다고 한다면 이런 기절설이나 도적설, 환상설, 첨가설이 진리화 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와 같은 인간들의 사악함을 미리 아시고 절대로 이런 이론들이 진리화 되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40일 동안 부활하신 사실을 확정해 주신 것입니다. 40일 동안 땅에 계신 것은 어느 정도의 합당한 기간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11번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후에 시울에게 한번 나타나셨습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이 음성과 표적으로 나타난 것은 12번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제일 먼저 본 여인입니다. 아마도 예수의 부활 직후에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닌가 라고 봅니다.
그 다음에 마리아, 살로메 등 여러 여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 다음 제자 베드로에게 나타났습니다. 저는 이 순서를 가만히 보니까 하늘나라에서는 베드로보다 여인들이 더 높은 것 같습니다. 남자들은 땅에서 큰 소리를 쳐도 영적인 서열을 보면 별 것 아닙니다. 베드로 같은 사람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데 서열이 세번째입니다. 그렇게 당당하고 위대하다면 먼저 만나야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열정이 베드로보다 여인들이 앞섰습니다. 제자들보다 여인들이 더 담대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러 가는 그날 새벽에는 남자들은 나서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에 여인들은 향유를 들고 주님의 시신에 그 향유를 부어 드리려고 열정을 가지고 무덤을 찾았던 것입니다. 여인들이 이 열정을 가지고 있는 한 남자들은 하늘나라에서 앞서지 못할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알고 보면 여인들의 역할이 특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네번째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주님을 찾아오는 제자가 아니라 도망가는 제자들입니다. 이 도망가는 제자들을 부활하신 주님이 만나 주셨습니다.
그 다음에 도마가 빠진 열 제자들에 나타셨습니다. 그 후에 열 한 제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고기를 잡고 있는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오백여 성도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 다음 야고보에게 나타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무리들이 모인 그 자리에 마지막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제자들과 무리들 앞에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주께서 승천하신 후에 나타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11번 나타나시면서 부활을 확정하는 그 기간이 40일이었습니다. 40일이라고 하면 주일이 5-6번 가능합니다. 부활하신 그 날이 주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부활하신 그날에 제자들을 공식적으로 여러 번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을 보고 듣고 만지고 체험하게 했던 것입니다. 왜 주님이 제자들에게 부활을 경험하게 해주실 필요를 느꼈을까요 부활을 부인하고 부활을 도전하는 적 그리스도의 악함을 아시기 때문에 부활을 확정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절의 진정한 의미는 12번이나 나타나셨다는 그 횟수가 아닙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나타나시면서 중요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다섯 가지 주제로 나타납니다. 이 말씀이 부활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메시지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축복하심

첫째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축복하셨습니다. 그 축복하신 말씀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24장 25절 등 주님의 축복의 말씀은 매우 심오합니다.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는 축복기도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마치고 '주 안에서 샬롬' 이렇게 인사합니다. 주 안에서 샬롬, 주 안에서 평강이 있을 지어다. 이 인사가 유대의 전통적인 인사입니다. 우리 나라의 '안녕하십니까' 라는 말과 샬롬의 의미는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나라 인사도 상당히 영적인 인사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영적이라 하여 엉뚱하게 적용을 하면 안됩니다. 우리 나라 이단 사이비들은 얼마나 머리가 기발한지 단군을 성경에 있는 단 자손에 끌어 붙여서 우리 민족은 무언가 단군이 어떤 영적인 지파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이렇게 적용합니다. 안녕하십니까 라는 인사가 '샬롬'이라는 뜻이 있다고 해서 잘못 적용을 하면 안됩니다. 성경에 히브리말과 우리말이 비슷한 말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아주 유사한 말은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아버지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아브'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비슷합니까 그러나 그 말과 우리 말과는 아무런 영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주께서 샬롬 하는 것은 아주 영적인 인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제일 먼저 하신 축복의 말씀이 '샬롬'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많은 사람에게 축복의 기도를 해야 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찬미하는 우리는 이 부활의 기쁨을 어떻게 전하시겠습니까 축복하는 것으로 전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성도를 위해 축복하십시오. 가족을 위해 축복하시고 이웃을 위해 축복을 하는 것은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일과 같은 의미가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축복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책망하심

두번째는 책망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6장14절에서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꾸짖으셨다고 하셨습니다. 부활절에 이 점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부활절 예배를 드리면서 믿음이 있는 자처럼 혹시 가식을 하지는 않는가 부활하신 주님 앞에 책망을 받는 그런 모습이 아닌가 상상해 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그 자리는 얼마나 큰 감동의 자리이겠습니까 얼마나 큰 환희의 자리이겠습니까 그런 주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 중에 제자들이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완악한 것을 책망했다는 것은 아직도 제자들끼리 화합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셨는데 제자들은 아직도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제자들끼리 화합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마음을 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께서 책망하신 것입니다. 부활절은 들뜨는 절기가 아니라 주님의 음성도 함께 듣는 절기입니다.

교훈하심

세번째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20절에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해주셨다"고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알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등지고 있는 제자들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교훈을 주셨습니다. 40일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약속하심

네번째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20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약속이 소망의 근거입니다. 용기의 근거입니다. 이 약속을 붙잡고 성도들은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절은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하는 절기입니다.
지난 4월5일 잠실야구장에서 시구를 한 아이가 '애덤 킹'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4살 때에 미국으로 입양이 되었습니다. 다리가 썩어 들어가는 선천성 희귀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손가락이 붙어 잡지도 못합니다. 그런 버려진 아이를 찰스 킹이라는 아버지가 입양을 하였습니다. 그 아이를 살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활시킨 것과 같습니다. 철재 의족을 끼고 조국 땅 잠실야구장에서 공을 던지는 그 애를 보는 우리들은 애덤 킹의 자랑스러움에 박수를 보냄과 동시에 한국의 버린 아이를 찰스 킹은 부활시켜서 다시 한국 땅에 보내온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찰스 킹이 말씀한 한 마디가 위대한 신앙고백이라고 봅니다. 기자들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물어봅니다. 대답은 한 마디였습니다. '소망과 용기를 가진 자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찰스 킹의 소망과 용기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시신과 같은 이 아이를 부둥켜 안고 몸부림치는 그 속에도 하나님께서 너는 할 수 있다는 소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과 용기 안에서 살 수 있었다고 임마누엘 하나님을 증언하고 돌아갔습니다.
소망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붙잡을 때 능력이 되고 용기가 솟아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기를 잃었다는 말은 부활하신 주님의 약속을 붙잡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소망을 갖지 못하고 좌절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귀에 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탁하심

다섯번째는 부탁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8장19절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마지막 부탁으로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8절에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을 것이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고 가서 제자를 삼아 내 증인이 되라는 것이 주님의 부탁이었습니다.

맺는 말

부활절은 이 다섯 가지를 새기는 절기입니다. 이 다섯 가지를 놓치고 있다면 그것은 부활절이 안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11번 나타나셔서 다섯 가지의 주제로 제자들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40일 동안에 나타나셨던 그 모습으로 오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은 영으로 우리 예배 가운데 함께 임하시고 계십니다. 그 영은 주님의 입으로 말씀하신 이 다섯 가지를 오늘도 우리에게 베풀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성도로 살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책망 앞에서 우리 의 믿음을 한번 감수하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의 완악함을 다듬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고 하지 못한 것을 하게 되는 부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활절 예배가 해 마다 거듭될수록 작년에 못한 것을 하는 성도로 성장해 가야 합니다. 지난날에 몰랐던 것을 깨닫는 부활절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하시겠다"는 이 약속을 붙잡고 소망을 가지고 용기를 발휘하는 성도로 살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당부를 다시 한번 새겨야 합니다.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이 말씀 앞에 우리 교회가 복종하고 실천하여 풍성한 맺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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