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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의 책임 (요 2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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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부르신 찬송을 통해서 제가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5년 전까지는 제가 한국말로 설교했지만, 그 이후에는 한국말로 설교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오늘 아침 1부 예배 시간에 참 힘이 들었었습니다. 옛날에 어떤 선교사가 한국말을 공부하고 시골에 갔다가 목사님이 안 계셔서 한국말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는 잘 했는데 광고 시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분도 나처럼 한국말을 알기는 거의 알았는데 문제는 발음이 잘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저녁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광고하려고 했는데 발음이 잘 안되어서 "바지없이 참석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광고를 했습니다. 다행히 교인들이 뜻한 대로 들어서 저녁 예배에 많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제가 뜻한 대로 들으시면 고맙겠습니다. 기도합시다.

거룩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오늘 아침에 하나님의 약한 종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로 하여금 저의 약한 한국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에 대해서만 생각하도록 도와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귀한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아침 제가 읽은 말씀은 요한복음 20장의 마지막 두 구절이지만, 사실은 20장 전체를 보려고 합니다. 마지막 두 구절만 읽은 것은 제가 한국어 성경을 너무 천천히 읽기 때문에 본문을 다 읽게 되면 설교할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오늘 제 설교의 제목은 '부활의 책임'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아마 다 믿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첫 주일날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렇게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20장을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어서 연극이나 드라마라고 생각하면 4막까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각각의 장면을 보면서 그 핵심을 나누려고 합니다.

1. 빈 무덤의 사실 (1-10)

요한복음 20장 1절을 보면, 첫날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갔습니다. 이 본문에는 막달라 마리아만 등장하고 있지만, 누가복음이나 마태복음, 마가복음을 보면 아마 여자 세 명이 거기에 가서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빈 무덤을 발견한 그들에게는 기쁜 마음이 없었습니다. 두려운 마음만 있었습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부활을 몰랐기 때문에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서운 나머지 빨리 남자 제자들에게 가서 얘기했습니다. 남자 제자들도 무덤에 가서 빈 무덤을 보긴 했지만 부활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8절을 보면, 요한은 무덤에 먼저 도착했지만 기다리고 있다가 무덤에 먼저 들어간 베드로를 따라 들어갔습니다. 거기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사도 요한이 믿었다고 하는 말이 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9절을 보니까,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그러니 부활을 몰랐던 그가 무엇을 믿었다는 것입니까 제가 이 본문을 자세히 보니까 부활을 몰랐던 그가 믿은 것은 아마 그 여자의 말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에는 예수님의 시체가 거기 없다는 사실만 믿었습니다.

이 첫째 장면을 생각하면, 그들은 그 사실, 빈 무덤의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믿지 않고 두려운 마음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빈 무덤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 빈 무덤은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거기에 있었다면 부활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을 아는 것이 믿음을 주는 것은 아니에요. 여러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시고 돌아가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알고 있을 수 있어요. 그렇지만 그 사실만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렇게 중요한지, 제 2 막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2. 예수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 (11-18)

제 2 막에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울다가 보니까 천사 둘이 있었어요. 그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의 말을 들어도 믿음이 생기지 않았어요. 그때에도 누군가가 시체를 훔쳐 갔다고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여자여"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돌아서서 예수님을 보았지만 그때에도 그가 예수님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그 이름을 부르실 때에 믿음이 왔습니다. 예수님을 깨닫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어요. 예수님을 보고 그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을 듣고 믿음이 왔습니다. 그때 마리아는 즐거웠을 것입니다. 너무 기뻤을 것입니다.

3. 다락방을 찾아오신 예수님 (19-23)

제 3 막에 들어가면 배경이 바뀝니다. 제자들은 너무 무서워서 2층에 있는 방에 올라가서 문을 안으로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한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20절을 보니까 그를 본 제자들이 너무 기뻐했다고 했어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이것은 좋은 일이에요. 우리가 예수님을 만났는데도 마음이 기쁘지 않으면 큰 일이에요. 그러나 우리가 그저 기쁜 마음을 가지고 있도록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까 그것은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온 백성을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우리의 책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순종하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서 살 때에 고난을 받고 어려움 안에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 같이 우리도 가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대로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우리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누구에게 오셨습니까 요한복음 전체를 보면 그 대답을 알 수 있어요. 요한복음 3장을 보면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분은 유대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으로서 아주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높은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렇지만 4장을 보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를 여행하시면서 어떤 여자를 만났습니다. 그 여자는 니고데모와는 반대의 사람이었습니다. 높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왜냐 하면, 그 여자는 12시에 물을 길러 나온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일은 보통 아침 일찍 또는 저녁에 하는 것이었는데, 이 여자는 아무도 만나지 않으려고 낮 12시에 나왔습니다. 이 여자는 남편도 없이 어려움에 처해 있던 사람이었어요.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사회에서 소외된 낮은 사람에게 가셔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랬더니 복음을 들은 그 여자가 동네에 가서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이분이 메시아가 아니냐 나를 따라 가서 그분을 만나자"고 전파했어요.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지위에 관계없이, 빈부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든지 가셔서 하나님의 귀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죽 보면, 5장에는 38년 된 병자에게, 6장에는 갈릴리의 큰 무리에게, 7장과 8장에는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에게, 9장에는 볼 수 없는 사람에게 가셔서 복음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가셔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순종한다면 누구든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지난주에 우리 학생들이 선교훈련을 받을 때에 훈련시키시던 선교사님이 한국의 복음지도, 즉 현재 한국의 어느 지역에 복음이 들어가서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현재 이 나라 인구의 약 20-25 %가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합니다. 아주 고무적인 일입니다. 세계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의 비율이 이 정도 되는 나라를 기독교 국가라고 할 수 있어요. 한국은 그러한 나라예요. 또한 서울에 가서 갤럽 코리아라는 회사를 통해서 대학생들을 인터뷰하면서 믿는 학생들의 비율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서울에 있는 대학교의 학생들은 약 50 %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훌륭해요. 그러나 한국의 남쪽이나 동쪽 지역의 대학생들을 인터뷰해 보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아무도 찾을 수 없다고 했어요. 결국 한국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많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아주 많습니다. 우리가 그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서 예수님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comfort zone 안에서만 살수도 있어요. comfort zone이란 우리가 어려움 없이 편하게 살 수 있는 지역이에요. 우리와 같은 사람들끼리 교제도 잘 나눌 수 있어요. 그러나 그러한 한계를 넘어가서 우리와 다른 사람, 우리를 모르는 사람에게 가서,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에게 가서 복음을 전파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comfort zone의 한계를 넘어가서 하나님의 귀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 나라에서 예수님을 믿지 못했던 사람을 찾아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설명해야 합니다. 이 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우리가 갈 책임이 있어요.

아시다시피 내일 아침에 우리 학생들과 같이 한국을 떠나서 중국에 가려고 합니다. 제가 한국에 들어올 때에는 고향으로 돌아온 것 같아서 아주 기뻤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제가 가 본 일이 없어요. 중국말도 몰라서 아마 고생할 것 같아요.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실 때에 고생과 어려움 속에 처해 있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중국말을 모르니까 어떻게 전도할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습니다. 중국에서도 영어를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중국에 1억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수는 아마 미국보다 더 많아요. 그러나 전체 인구가 워낙 많기 때문에 비율로는 7-8 %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곳에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믿지 않는 이들을 전도해서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들을 훈련시킬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영어를 배우려고 하는 사람을 찾아 그들의 질문에 답변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통해서 전도하려고 합니다. 중국인에게 직접적으로 전도할 수는 없어요. 성경 말씀을 나눌 수 없어요. 그렇지만 제가 알기로 누가 제게 질문을 하면 우리가 정확하게 대답할 수는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전도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을 우리의 힘 안에서 하는 것이 아니지요.

2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comfort zone을 벗어나서 고생할 때에도 성령님의 힘과 그 능력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어요. 제자들은 2층에 있는 방으로 돌아가 숨어있었습니다. 3일 전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유대인들이 그 제자들을 잡는 중이었어요. 잡히면 살지 죽을지 몰라요. 그렇지만 성령님을 받은 후 사도 베드로는 수많은 사람 앞에서 설교했습니다. 그의 능력 안에서 승리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도 성령님의 충만함을 통해서 땅 끝까지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전파할 수 있어요.

땅 끝까지라고 하니까 어렵습니까 한국에 '땅 끝'이라는 마을이 있지요 어떤 선교사가 거기에 가서 설교하고 나서 "나는 땅 끝에서 설교했으니 이 말씀에 순종했다"고 했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의미로 말씀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제 생각으로는 그것은 맞지 않는 것 같아요. 땅 끝은 건너편이에요. 옆에 있는 사람이에요.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은 다 거기에 있어요. 우리가 무엇을 전파해야 합니까 우리가 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제가 처음에 이 구절을 읽을 때에는 잘못 이해했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말씀은 용서함을 주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했어요. 누가 우리에게 오면 그의 죄를 용서하라는 의미가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런데 헬라어 원본을 보니까 이 동사는 현재완료형이에요. 그래서 제가 생각해 보니까 이것은 용서를 주라는 뜻이 아니라 용서함을 전파하라는 뜻이에요.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고 구원을 얻으면 이미 용서함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전파하라는 말씀이에요. 누가복음 24장에도 똑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누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땅 끝까지 용서함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용서를 주는 일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용서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에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것을 우리가 전파해야 합니다.

4. 부활에 대한 우리의 책임 (24-29)

제가 아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우리가 세 부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마 제가 이 요한복음을 썼다면 아마 이것으로 끝을 맺고 30절과 31절을 기록하고 그만 두었을 것 같아요. 그렇지만 사도 요한은 이 네 번째 장면을 포함했습니다. 이 네 번째는 도마에 대한 얘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다락방의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오신 날, 그 자리에 도마는 없었습니다. 제자들과 같이 있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그 도마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전파할 때에도 도마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모일 때, 도마도 같이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또 오셨습니다. 그때에 도마에게 "믿지 않는 사람이 되지 말고 믿는 사람이 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왜 이것을 포함했는가 생각해 보니까 사도 요한은 이 복음을 아마 80년이나 90년도에 기록한 것 같아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약 60년 후의 일입니다. 따라서 이 복음을 받는 교인들은 아무도 그 이층 방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직접 들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성령을 받아라"는 말씀을 들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도 그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과 동일한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아마 이 얘기를 포함한 것 같아요. 도마도 이층 방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도마도 듣지 못했습니다. "성령을 받아라"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책임은 있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복음을 기록할 당시의 제자들에게 '당신은 그때 그 자리에 없었지만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자들과 똑같은 책임, 똑같은 의무가 있다'고 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계시는 여러분 중에도 그때 그 자리에 계셨던 분은 아마 없는 것 같아요. 그렇지요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똑같은 책임이 있습니다. 8일이나 60년이나 2000년이나 상관이 없습니다. 책임은 똑같아요. 의미도 똑같아요. 내용이 똑같아요. 우리는 땅 끝까지, 옆에 있는 사람에게, 건너편에 있는 사람에게, 이 나라의 남쪽에 있는 사람에게, 다른 나라에 있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 모두에게 그러한 책임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책임을 가지고 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하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

기 도

거룩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오늘 아침에 우리가 모여서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힘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우리가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이 책임을 잘 순종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귀한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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