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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 (요 11: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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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활절이다.

부활절은 지난 주일에 살펴본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주"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요1:29), 갈보리 산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로 지난 금요일에 피 흘려 돌아가시고, 장사한지 삼일만에 오늘 주일 아침에 부활하신 주 님을 기념하는 날이다.

어느 교회 집사님이 우리 덕산교회 홈페이지를 둘러보셨다.

행사 일정표를 보시고 의아해서 전화를 주셨다. 부활절이 4월 중순경에 있는 것이 아 니냐고.... 자기는 그렇게 알고 있다고 했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달력을 보았다면 이 런 질문이 없었을 터이지만, 그보다도 "부활절" 날짜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하다.

매년 부활절마다 이 날짜에 대한 것을 말씀드렸지만, 다시 살펴보면....

부활절은 춘분(春分)이 지나고, 보름달 곧 만월(滿月)이 지난 다음 주일이다. A.D 325 년의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해졌는데,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으로 유월절 양 잡는 시간(출12:6) 곧 유월절 예비일 오후 3시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 다(마27:46).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달력은 태음력이다.

유월절 예비일은 니산월 곧 정월 14일이다. 낮이 지나고 이날 밤은 15일이다. 유대인 의 하루는 "밤+낮"이기 때문이다. 유대력의 니산월은 태양력의 3-4월에 해당한다. 니 산월 14일 오후 3시 유월절 양 잡는 시간에 주님은 운명하셨고, 양고기와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고 출애굽한 유월절과 무교절인 15일은 주님이 무덤 속에 계셨다. 이 날이 보름날이다. 그러므로 만월(滿月)이 지나야 하는 것이다. 춘분이 지나고 만월(滿月)이 주일이 되면, 그 다음 주일을 부활절로 지키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적에 관한 말씀이다.

죽은 자를 살리신 이적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일(눅7:14),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일(눅8:54), 그리고 본문의 나사로를 살리신 일로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 다. 이것을 살피는 것은 오늘 본문의 나사로를 살리신 일은 죽은 자를 살리신 이적이 이미 두 차례나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想起)하고져 함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 주님은 스스로를 가리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 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주님은 물으셨습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오라버니 나사로의 죽음으로 슬픔에 가득차 있는 마르다에게만 물으시는 게 아닙니다.

오늘 이 말씀을 대하는 우리 성도들 모두에게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이것을 네가 믿 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주여 그러하외다」 하고 마르다는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또 한 우리 모두의 대답이기도 할 것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당당히 말씀하실 수 있는 주님이시기에....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주여 그러하외다」 하고 대답하는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오늘 우리 모두 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 앞에.... 마르다의 모습을 살펴 보고져 합니다. 그 마르 다의 모습을 통하여 부활 신앙에 대한 나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점검해 보고져 합니 다. "예수 부활, 내 부활.... 아멘-할렐루야!".... 우리는 곧잘 대답하고 찬양하지 만, 과연 우리의 부활 신앙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1.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본문 3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네 오라비 나사로.... 그가 죽은 지 이미 나흘이나 되었다(본문17절). 그의 죽음을 슬 퍼하며 예루살렘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내려와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고 있었다. 죽 음의 슬픔이 하나 가득한 그 집에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이 오신 것이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죽음의 슬픔이 짓 누르고 있는 그 집안의 분위기를 모르시는 게 아닙니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고 제자들에게 밝히 일러주시던 예수님이십니다(요11:14).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알고 계 시는 주님....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그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십니 다.

본문 24절/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내가 "아나이다".... 여기의 "알다"는 [오이다(oi\da)]란 단어로 지식적으로, 배워서 "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마르다의 부활 신앙은 성경을 통해서 알고, 믿음의 선 진들을 통하여 알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적을 듣고 서 아는 부활 신앙이다. 이는 또한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디모데후서 3:14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배우라고 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는 것이요, 믿음의 선진들의 삶을 보 고 듣고 배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올바르게 배우느냐가 중요하다. 그래서 「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라고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힘주어 말하 고 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무엇보다도 배우는 신앙은 "확신"이 중요하다. 그래서,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 하라」고 했다. 이 "확신"이 없는 믿음은 쉬 무너지게 된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확신"이 없었기에 하와는 「죽을까 하노라」로 생각하고, 대답하는 것이다(창3: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 그 주님이 사망의 애통이 짓누르고 있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의 집에 오셨습니 다.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을 맞으러 나온 마르다에게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했습니다.

본문 21-22절/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대"....

이는 예수님 앞에 고백하는 마르다의 신앙고백입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 비의 병을 고치셨을 것이요,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오라비가 죽은 지금이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아나이 다는 마르다의 신앙고백입니다.

나는 이제라도 무엇이든지 주실 줄 아나이다....

이제라도, 무엇이든지.... 마르다의 이 신앙고백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는 주 님의 말씀 앞에서 무너져 내리고 맙니다. "이제라도, 무엇이든지" 속에 담긴 뜻이 무 엇일까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살아난 이적,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살아난 이적을 행하신 주님이십니다. 마르다가 그 주님께 말씀드리는 "이제라도, 무엇이든지" 속에 담긴 뜻이 무엇일까요 자기의 오라비를 살려달라는 것이지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마르다의 부활 신앙은 "이제라도"에서 "마지막 날"로 물러나 고 맙니다. "배우고 확신"하는 것은 그만큼 힘들고 어려움을 나타내 보여 줍니다. 「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나인성 과부였더라면, 회당장 야 이로였더라면, "마지막 날"로 뒤로 물러났을까요 그들은 이미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 적을 체험한 자들입니다. 우리 모두 한번 깊이 생각해 보며 또한 "나였더라면" 어떻게 하였을까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2.돌을 옮겨 놓으라

본문 3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 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이 또한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돌을 옮겨 놓으라.... 유대인의 무덤은 우리와 달라 굴속에 관을 넣고 그 입구를 큰 돌로 막아놓는다(마27:60). 그 "돌"을 옮겨 놓으라는 말씀은 우리식으로 말하면 무덤 을 파 해치라는 것이다. 그것도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시체가 썩어 냄새가 나는 무덤이다. 그러므로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결코 아니다. 그냥 시신을 보자는 것이 아니다. 「네 오 라비가 다시 살리라」는 주님의 말씀과 연결되어져 있다. 그러므로 부활이요, 생명이 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돌을 옮겨 놓으면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려야 하는 것이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 이다」고 하던 마르다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제라도, 무엇이든지" 하던 마르다의 신앙은 다 어디로 갔을까....

본문 4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이 말씀을 이미 마르다에게 하셨고, 돌을 옮 겨 놓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고 하며 가로막는 마르다에게 되묻고 있는 말씀이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주님이 들려주신 이 말씀을 믿지 못한다는 꾸중이기도 하다. "이제라도"에서 "마지막 날"로 뒤로 물러서버린 마르다를 향해 「네 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말씀을 주신 것이다.

그러나, 마르다에게는 부활 신앙은 멀리 가버린 것이다.

"마지막 날 부활"로 멀리 멀리 가버린 것이다. "이제라도"의 오늘 이 자리에서의 "부 활"은 마르다의 가슴속에서는 사라져버린 것이다. 마르다는 초자연적인 "부활신앙"을 떠나 자연적인 "현실"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러니,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 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는 대답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 죽음의 슬픔이 가득찬 나사로의 집에 찾아오신 주님이 그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시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는 기쁜 소식을 주었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부 활이요 생명이신 주』.... 그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 이다」고 하던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는 기쁜 소식을 주었습니 다. 「돌을 옮겨 놓으라」는 기쁜 소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의 초자연적 "부 활신앙"은 뒤로 뒤로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는 자연적 "현실" 앞에 서 있었습니다. 이것이 비단 마르다만 의 모습일까요 내 자신은 어떠한가를 살펴봅시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는 주님의 책망이요, 주님의 일깨우심이요, 주님의 사랑입니다. 뒤로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지 아니하도록(히10:9) 주님의 붙들어 주심입니다. 사탄의 유혹 앞에서 뒤 로 물러가던 하와는 끝내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나의 믿음 약할 때 주 날 붙드네, 마귀 나를 꾀일 때 주 날 붙드네 나를 붙드네 나를 붙드네, 사랑하는 나의 주 나를 붙드네

이런 주님이 나의 연약을 붙들어 주시도록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주님의 붙드심이 넘 어지는 마르다를 다시 굳게 세웠습니다. 초자연적 "부활신앙"을 다시금 일깨웠습니다.

드디어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고 하던 마르다가 무덤에서 돌을 옮겨 놓았습니다. 주님의 붙들어 주심의 결과입니다. 마침내 「네 오라 비가 다시 살리라」는 말씀을 생생히 체험했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오라비 나사 로를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감격을 누렸습니다.

 3.나사로야 나오라

본문 43절/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나사로....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이다. 무덤에 장사되어져 있는 나사로이다. 벌 써 썩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이다. 그 죽은 나사로에게.... "나사로야!" 하고 부르신 다. "나오라" 하고 명하신다.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부활이요, 생명이 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나사로야 나오라"....

이는 상식을 뛰어넘는 말씀이다. 그렇다. 신앙은 상식 이상의 특별 계시에 대한 순응 이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 그분 자체가 상식을 뛰어넘는 초자연적 존재이다.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신 분이요(마1:23), 하나님의 아들이요(막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다(요1:14).

다시 말해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던 그 말씀이 성육신(成肉身)하신 분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던, 바로 그 말씀이다. 지금 그 말씀이 인간 의 몸을 입고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를 부르시는 것이 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 말씀 앞에 죽은 나사로가 살아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살아 있는 말씀"이다.

본문 44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죽은 자가 수족을 동인 채로 나오는데"....

죽은 자가.... 비록 그가 죽은 지 나흘이 되었다 할지라도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 살아 있는 말씀"이....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동인 채로 나 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초자연적인 능력이다. 자연을 창조하신 능력이기에 자 연에 속하지 않은, 자연을 초월해 존재하는 초자연적 능력이다.

"나사로야 나오라"....

이는 초자연적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은 초자연적인 것이다.

자연적인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초자연적 "부활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게 된다. 신앙한다는 사람들 중 에도 인간적 이성에 얽매여 신체적 부활이 아니라, 예수의 정신을 제자들이 계승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 「나사로야 나오라」....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의 무덤을 열어놓고 명하셨습니 다. 이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분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부활"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분은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당당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42절/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 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둘러선 무리.... 나사로의 죽음으로 슬픔에 가득차 있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의 슬픔으 로 나사로의 집을 가득 채웠던 사람들입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살아난 이적을 보 고서도,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살아난 이적을 듣고서도 "부활신앙"이 무너져 내려버린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고 하던 마르다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또한 "죽기까지 따르오리" 맹세하고서도, 주 께서 잡히시던 밤에 주를 버리고 도망갈 제자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요11:15).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나사로야 나오라」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 리는 것은 나사로를 위함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했습 니다(요11:4). 이 "둘러선 무리"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20:27절/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 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의심 많은 도마에게 믿음 주시는 말씀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 으로 주님과 함께 하며, 숱한 이적과 기사를 현장에서 친히 목도한 사람입니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린 때에도,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때에도 함께 했습니다.

특히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일사각오(一死覺悟)를 부르짖으며 나사로 의 부활 현장에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 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고 하는 도마이었습니다(요20:25). 그만큼 초자연적 "부활신앙"은 믿기가 힘들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 주님은 스스로를 가리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 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주님은 물으셨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마르다는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 마 르다의 신앙고백이 나의 신앙고백과 무엇이 다른가요 마르다의 신앙고백이 잘못되어 그 "부활신앙"이 무너져 내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 각자는 오늘 부활절을 맞으 며.... 마르다의 모습을 통하여 나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 죽음의 슬픔이 짓누르고 있는 나사로의 집을 찾아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돌을 옮겨 놓으라」, 「나사로야 나오라」....

오직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만이 할 수 있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마르다가 받았건만....

마르다의 믿음은 오히려 무너져 내렸습니다.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 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 결국 초자연적 "부활신앙"에서 자연적인 인간 이성의 "상식"으로 무너져 내린 모습 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 바로 내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신앙고백 하는 주님이십니다. 마르다가 아니라 오늘 내가 그 주님 앞에 서면 어떻게 될까요 마 르다보다 더 큰 믿음으로, 도마보다 더 큰 확신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 까요.... 우리 모두 이 시간 깊이 스스로를 한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 나를 사랑하시는 나의 주, 나의 연약함을 아시고 피묻은 그 손으로 붙들어 주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아버지여 이 말씀하옵 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무너져 내리는 나의 연약한 믿음을 붙들어 주시고, 「믿음 없는 자 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온유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새 힘을 주십니다.

이 주님의 음성에 새 힘을 얻어....

마르다는 무덤에서 돌을 옮겨 놓았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생생히 체험했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오 라비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오라비 나사로를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감격을 맛보았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 오늘 부활절을 맞아 마르다의 모습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우리에게도 주님은 피묻은 두 손으로 붙들어 주십니다. 부드럽고 온유한 음성으로 속삭여 주십니다. 「네가 믿으 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아버지여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 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온유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새 힘을 주십니다.

이 주님의 음성에 새 힘을 얻어....

오늘 부활절을 맞아 마르다의 모습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시는 여러분 모두 모두....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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