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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 (마 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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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님의 부활의 은총이 온 성도들께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집트인들은 조상들의 거대한 왕들의 무덤(피라밋)이나 황금관 속에 보관된 미이라를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세계인들도 불가사의한 그것들을 보면서 감탄합니다. 중국에는 진나라 시황의 무덤이 만리장성과 함께 관광명소 1위로 꼽히고 있습니다. 부처의 무덤도 그렇고 마호멧의 무덤도 대단하다고 합니다. 가로 세로 봉분의 길이만 400m 가까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점에 있어서는 전혀 자랑거리가 없습니다.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자랑은 거대하고 화려한 무덤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빈 무덤에 있습니다. 다른 종교가 기독교에 대해 많은 모방들을 하지만 절대로 모방할 수 없는 것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부활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부활하신 주님을 찾지 않고 죽은 예수를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역사의 어떤 한 시점에 살다가 죽은 자들 중 한 사람으로 위대한 예수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던 세 종류의 사람들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1.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복입니다.
새벽 미명에 주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이 주님이 부활 하셨다는 사실을 천사들로부터 듣고 제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달려가다가 노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그들과 동행해 주면서 부활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들은 마음에 뜨거움을 느꼈고, 그들의 삶의 방향이 달라지는 복을 받았습니다. 성경에는 도상에서 은혜 입은 자들의 사건이 많이 있습니다. 열두 해 혈루를 앓던 여인이 은혜를 입어 깨끗이 나음을 입은 사건이 주님이 지나가시는 도상에서였습니다. 열 문둥이들이 자신들의 몸이 깨끗하게 된 것을 깨달은 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제사장에게 자신의 몸을 보이러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이디오피아 내시가 은혜를 입은 것도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도중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우리 교회 앞을 지나다가 주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도 있고, 친척집에 들렀다가 마침 주일이어서 예배하러 왔다가 은혜 받아 인생이 달라진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온 성도님들 모두 이 같은 도상의 복과 은혜를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골방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복입니다(눅24:33-34, 요20:19,26).
제자들이 골방에 모였습니다. 그 골방은 근심과 걱정, 불안과 공포의 골방이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된 것은 그들을 실의에 빠지게 만들었지만 그러나 그 자리는 부활의 주님을 기다리는 자리였습니다. 몇 사람들로부터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은 그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자리에 직접 나타나셔서 자신의 부활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여러 가지로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기다리는 자들은 은혜를 입습니다. 기다림이 있는 사람들은 타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망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불안, 근심, 걱정, 두려움이 사라지고 새로운 감격과 큰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소란하고 분주한 것에서 좀 떠나서 골방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기다리는 것은 기독교에서 중요한 요소입니다.

3.갈릴리 호숫가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복입니다(요21:).
베드로를 비롯한 몇 제자들은 물고기 잡는 일로 돌아갔습니다. 실의에 빠져서 일까 아니면
기다림의 시간을 무모하게 보내기 싫어서였을까가 관심거리인데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리서 만나자고 말씀하셨고 그렇다면 제자들은 주님의 분부대로 갈릴리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겠는가도 중요한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첫 사랑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은 그들이 일하고 있을 때입니다. 베드로의 경우는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을 때(눅5:4-5)입니다. 오늘이 또한 고기 한 마리 잡히지 않은 그런 날(요21:5-6)입니다. 그렇다면 실의에 빠져서라기 보다는 기다리는 시간을 활용하여 창의적인 일을 했을 가능성이 큰 것입니다. 절망과 좌절의 자리에서도 실의에 빠져 일할 의욕마저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아니라 창의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창의적인 일에 시간을 활용할 줄 아는 자가 은혜를 입고 153마리 고기를 잡는 기쁨을 얻습니다. 베드로가 오늘 그런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도로서의 복직의 복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실패한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베드로를 사도직에 복직 시켜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실패했어도 주님은 실패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실패하시지 않는 한 우리의 실패는 실패가 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은혜는 우리들도 받는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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