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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눅 1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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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많은 비유 가운데서 지금 봉독한 이 비유 말씀은 가장 당혹감을 주는 비유라 말합니다. 가장 이해하기 힘든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비유를 "불의한 청지기에 대한 비유다" 했고, 어떤 사람은 영리한 청지기라 표현했으며 또 어떤 책에서는 선견지명이 있는 청지기의 비유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 말을 합하여 생각해 볼 때에 세상에서 불의하게 하는 것이 영리한 것이며, 좀 약게 사는 것이 선견지명이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비유하고 봅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르침과 그 내용을 먼저 이해해야 이 말씀을 이해하기가 쉽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공관복음에서 많은 부분을 바리새인에 대한 경고 내지는 책망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리새 사람들의 위선과 탐욕, 거짓과 하나님께 대한 그릇된 사랑과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그들의 자세, 물질에 대한 그릇된 자세와 태도를 예수님께서 단호하게 비유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성경말씀에 바리새인에 대해 여러 가지 많은 직접적인 말씀이 있지만 누가복은 16장 14절 말씀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바리새 사람들의 여러 가지 특징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돈을 좋아하는 그러한 사람들이다,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 비유 말씀에 상당한 해답을 줄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명기 28장 2-6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복종하는 자들에게 대한 복이 구체적으로 열거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내 몸의 소생이 복을 받게 되고 내 토지의 소산이 복을 받게 되고 내 짐승의 새끼가 복을 받게 되고 그리고 내 떡반죽 그릇까지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 이런 말씀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구체적이며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그러한 복을 받는다라고 하는 것이 바리새 사람들의 머리 속에 있는 축복권이었습니다. 그래서 재물이 곧 하나님을 잘 섬긴 결과이며 증거라고 생각해서 처음에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려고 애를 많이 썼고 또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 결과 많은 물질적인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가면서 원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뜻, 하나님을 잘 경외한다는 것은 사라져 버리고 물질적으로 많이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이 인정해주는 것이야말로 복이라고 착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바리새 사람들은 물질에 대한 탐욕을 가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재물관에 대해 예수님은 바른 재물에 대한 생각을 일러주고 계십니다.

이 말씀의 내용은 우리가 읽은 대로 잘 압니다. 어떤 주인에게 청지기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주인이 듣기로는 청지기가 옳지 못해서 자기의 재물을, 자기의 소유를 자꾸 소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청지기를 해고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청지기가 미리 주인의 마음을 읽고는 어떻게 하면 주인에게서 해고당했을 때에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생각 끝에 빚진 자를 다 불러서 자기 마음대로 주인 재물을 탕감해 주는 일을 합니다. 밀을 빚진 자들에게는 밀을 탕감해 주고, 기름을 빚진 자에게 기름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을 보니 그 후에 주인이 그 사실을 아고 이 청지기에게 지혜 있다고 칭찬했다고 합니다. 이 말이 우리들이 이해하기 힘든 내용입니다. 과연 주께서 불의한 청지기, 자기 주인 재물을 자기 멋대로 허비하고 또 다른 사람이 빚진 것까지도 자기 마음대로 탕감해 준 이러한 불의한 사람을 옹호하신 것이냐라는 질문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읽을 때에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비유로 말씀하고 있는가를 우리가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비유의 뜻이 살아납니다. 제가 지난번에 선한 사마리인에 대한 비유로 말씀드릴 때도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만 이 말씀을 원래 예수님께서 일러주신 뜻에 비추어 보지 않고 우리 마음대로 잘못 해석하다 보면 전혀 엉뚱한 뜻이 나오게 되고, 이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러한 내용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불의한 청지기에 관한 비유도 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에 나가서 다른 사람의 재물을 속이고 자기 마음대로 다른 사람의 재물을 마음대로 탕감도 해주고 마음대로 하라, 이렇게 옹호하신 말씀이 아닌 줄을 압니다.
주인은 이 사람의 지혜를 칭찬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청지기의 지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먼저 자신의 해고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그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무력과 부끄러움을 극복하고 내일을 위해서 준비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인이 볼 때에 지혜 있다라고 말할 만큼 참으로 현명한 일이었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뜻이냐 하면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기기를 바로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일 일을 위해서 지혜롭게 청지기를 닮아 가라, 이렇게 일러주신 말씀인 줄 압니다. 이 청지기는 자신의 지위와 의무를 이용하여 장래를 든든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자신만 이 주인의 사업과 재산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먼저 이 말씀을 통해서 청지기와 주인과의 관계 그리고 청지기의 주인에 대한 태도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청지기라는 말은 `오이코 네모'라는 말인데 `오이코'는 `집'이라는 말입니다. `네모'라는 말은 `분배했다, 관리하고 있다, 담당하고 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 당시에 많은 부자집에서 청지기를 거느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청지기는 노예일수도 있고 자유인일 수도 있는데 재산만 맡고 있는 사람,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사람, 가정살림을 돌보는 사람, 이렇게 여러 청지기를 거느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비유 말씀에 나오는 청지기는 아마 그 집의 재산을 맡고 있는 청지기이며 성경말씀의 내용으로 보아서 노예가 아닌 자유인인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청지기가 되기까지 주인에게 상당한 신임을 얻고 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 주인은 그 청지기에 대해 모든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모든 재산을 그에게 관리 시키고 더군다나 빚을 주고받는 것까지도 맡겨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의 청지기에 대한 신임이 빗나갔습니다.

첫번째, 이 사람이 잘못한 것은 주인의 재산을 바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주인의 재산을 바로 관리하고 또 재산을 증식시켜 줄 책임이 이 청지기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을 보니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라는 말 그 주인에게 드린지라"했습니다. 얼마나 소문이 많이 퍼졌으면 그 주인이 그 말을 듣고 있겠습니까. 먼저 이사람은 자기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두번째, 이 사람의 잘못은 자기 마음대로 빚을 주었다가 탕감해줬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자기가 첫번째 허비한다라는 말을 듣고 해고당했다면 두번째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청지기의 살아가는 모습을 가만히 보면서 지금 우리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대개 다른 사람의 돈을 허비하는 사람들이 두번째 또 다른 죄를 범합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 속담에 있듯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주인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말씀으로 보아 이 주인의 많은 농토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농토에 감람나무를 심어서 많은 기름을 짜내고 밀을 재배했다는 것을 보아서 굉장히 넓은 농토를 가지고 있는 주인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다가 이 주인은 무엇을 했습니까 요즘 말로 하면 고리 대금업을 했다는 말이예요. 다른 사람드레게 돈을 빌려주고 굉장히 많은 이자를 받는 고리 대금업자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동족에게는 이자를 받지 말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자를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해서도 이자를 얻지 말라, 그렇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말씀하시기를 "네가 만일 나와 함께한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같이 하지 말며 별리를 받지 말 것이며" 말씀합니다. 내가 돈을 빌려주더라도 빌려준 데 대해 내색하지 말고 이자도 받지 말라, 익것이 성경말씀에서 가르치고 있는 바입니다. 그런데 이사람은 굉장히 많은 이자를 받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말씀은 이 고리 대금업자를 가리켜 강도라고 비유하고 있을 만큼 그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은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청지기는 자기가 쫓겨나게 되자 주인 생각이 났습니다. 그전에는 주인에 대한 의식을 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주인을 생각하는 것도 내 입장에서이지 주인을 위해서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청지기와 주인의 그릇된 관계라는 것입니다. 항상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고 주인의 즐거움을 생각하고 주인의 이익을 생각하는 것이 바른 청지기의 자세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이것은 잘못된 관계입니다. 이기적인 계산 속에서 주인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통해서 볼 때에 주인이 있지만 주인이 없는 것같이 살아가는 그 자체가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모릅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현대에 와서 가장 많이 우리 인간사회에 영향을 끼친 것이 `휴머니즘'(인간주의,인본주의)이라고 합니다. 인본주의라는 말은 좀 나쁜 뜻이지만 인간주의, 인륜주의, 이런 것이 참 좋은 말인 것 같아요. 모든 것을 사람 중심으로 생각하고 사람들을 위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살 것이냐라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속적인 휴머니즘은 가장 큰 적이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세속적인 휴머니즘은 내 인생의 주인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갈 수가 있다고 하는 자세, 그것이 바로 세속적인 휴머니즘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어떤 면에서 볼 때에 하나도 없어요. 사실은 주인 마음대로이며 나는 청지기인데 마치 청지기가 주인을 대신해 마음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갔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람의 잘못된 생각 이었습니다. 주인의 것이면 주인의 뜻대로 해야합니다. 사실은 내가 조그마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요. 내가 관리하는 권리가 있고 재량을 따라서 빚을 줄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권리를 자기 일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많은 권리들이 있습니다.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테두리 내에서 얼마든지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벗어나서 내 마음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잘못된, 죄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분명 우리들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청지기인데 그렇게 살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실 어떤 면에서 볼 때에 이 청지기는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자 같지만 주인께서 허락하신 대로 하는 심부름꾼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주인의 일을 대신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사회를 가만히 보십시요. 사실은 높은 사람보다도 밑에 있는 비서들이 더 힘들고 더 만나기 힘듭니다. 얼마나 대단한지 모릅니다. 지금 이 청지기의 자세가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주인의 것을 자기가 관리하는데 자기 자신이 더 많은 생색을 내고 행세를 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것이 바로 우리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한 단면적인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때때로 우리들은 무신론자처럼 살아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실천적인 무신론자다, 그렇게 말합니다. 머리 속에는 하나님이 있다, 그렇게 말하지만 세상 살아가는 모습은 하나님이 없는 것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예요. 우리들 자신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간절히 믿으며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과 내가 세상에 나가 살아갈 때에 정말 청지기로서 그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냐 말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볼 때는 참 은혜를 받고 늘 기도할 때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지만 세상에 나가 살 때에는 하나님은 뒷전에 모셔 놓고 나혼자 살아갑니다. 이것이 편하단 말이지요. 그래서 디도서 1장 16절이 말하기를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분명히 입으로는 시인 하지만 생활속에서 부인하며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런 불의한 청지기와 같은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얼마든지 이런 불의한 청지기, 이런 청지기와 같은 자세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청지기는 마치 휴머니스트, 무신론자처럼 주인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왔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빌려주고 또 빌려준것을 자기 마음대로 고쳐줍니다. 그러나 반드시 주인이 와서 결산할 날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같은 자세로 우리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주인이 맡긴 청지기와 같은 삶인줄 알고 주인의 뜻을 따라 청지기다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한 줄로 압니다.

둘째 청지기의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를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이사람은 자기 자신의 신분보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권리를 더 생각하는 그런 신봉자였습니다. 아무리 자기 권리를 가졌다고 해도 청지기의 신분을 절대로 우리가 무시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돈을 빌려주기도 하고 빌려준 돈을 감해주기도 하는 이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 권리는 주인의 청지기로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번 생각해 봅니다. 내가 만일에 주인 손에서 해고된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사람은 적어도 세 가지 생각은 해보았다고 봅니다. 첫째는 머슴살이 아닙니까 머슴살이를 한다고 생각해 보니까 참 한심합니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구나," 그렇게 한탄한다는 말입니다. 두번째 이 사람 생각은 빌어먹는 것이었 습니다. 이사람 하는 말이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옛날 자신의 특권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혜와 명예와 모든 것을 생각하니까 얼굴 들고는 이 일을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더구나 유대 사람들 지혜서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내 아들아, 거지의 삶을 살지 말라. 구걸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나으니라." 그렇기 때문에 이사람은 빌어먹는 것을 죽어도 못하겠다는 말이지요. 세번째 이 사람이 생각한 것이 마지막까지 청지기 권리를 이용해서 친구를 사귀어 놓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가장 유일하고 가장 안전한 길이라 생각해서 그는 사람들을 불러왔습니다. 자기가 빚준 자들이었습니다. "얼마나 주인에게 졌느냐" 물어보니 "기름 백 말이라."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오십이라 쓰라," 또 밀 백을 졌다는 사람에게는 "팔십이라 쓰라" 자기 마음대로 감해주었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 사람은 주인의 재물에 관심 없이 자신의 안전만을 생각합니다. 당시 고리 대금업자의 수법을 적어 놓은 책을 보니,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돈 많은 사람에게 돈을 빌리러 왔습니다. 요즘 말로, "내가 2월말까지 돈을 갚을 테니까 백만원만 빌려주시오"하면 "당신은 이 증서에다 백오십이라 적어쓰시오" 그렇게 말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돈을 빌려줄 때에 이자를 붙여서 백오십을 빌려 주는 것으로 하고 이월말에 백오십을 갚겠다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요세프스라는 예수님 당시의 역사가가 있는데 그가 쓴 기록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여러 헤롯 중 헤롯 아게파 1세가 있습니다. 헤롯 아게파 1세가 재정적인 파산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그의 수하에 있는 신하 마이야스를 보내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오게 했다고 합니다. 그가 아주 유명한 은행가에 2만 드라크마를 빌려오는데 2만 드라크마라는차용용지를 써주고 실제로는 1만7천5백 드라크마를 가지고 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2천 5백은 무엇이냐 하면 이자인데 아예 차용증서에 이자까지 포함시켜서 쓰는 것이 그 당시의 일반적이 통례였다 합니다.
옛날 기록들을 보면 참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밀을 빌려올때는 이자를 20%
주었고, 감람류를 빌릴 때는 이자 80%에 보험료까지 100%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고리대금 통례였다고 어떤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당시의 법을 이용해서 청지기는 자기 마음대로 권리를 행사합니다. 기름을 빌린 사람이 100을 졌다 말하니 얼마를 쓰라고 합니까 50을 쓰라! 사실은 기름을 빌려간 사람이 50을 빚을 지고 있다는 말이지요. 나머지 50이 이자라는 말입니다. 그 다음 밀을 빌린 사람은 100을 졌다 말하니까 80을 쓰라 했죠. 그러면 20은 그의 이자라는 말입니다. 청지기는 자기 주인이 고리 대금업을 하는 그 이자를 감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감해주는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주인의 허락이 있는 범위 내에서 내가 권리를 가지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주객이 바뀌었습니다. 주인이 할 일을 하지 못하고 청지기가 주인의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해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현대인의 사고를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사고방식이 이 자아 실현의 망상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자기 권리가 아닌 것을 자기 권리로 생가각하는 망상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이라 생각하고,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난 번에 말씀을 함게 공부한 어리석은 부자에 대해서 비유로 말씀해 주십니다. 누가복음 12장을 보면 어떤 부자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고에 많은 곡식을 채워놓고 이제부터는 내가 배불리 먹고 잘 살겠다, 아주 기분 좋아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내가 오늘 밤에 네 생명을 취하여 가겠다"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만일 내가 네 생명을 취하여 가면 이 모든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바로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바꾸어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 이 부자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물이 자기 것입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그 생명만 취하여 가신다면 생명뿐만 아니라 재물까지도 전부 그사람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돌이켜 보세요. 내가 내 것입니까 내 생명과 시간과 재물, 모든 것들이 다 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살아가면서 잠시 내가 빌려쓰고 있다가 다 돌려주고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큰 집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집을 누가 가집니까 "내가 소유하고 있다," 사실은 소유가 아니라 내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그냥 쓰는 것이지요. 세상 떠날 때에는 세상에 고스란히 두고 가지 않습니까 어떤 면에서 볼 때에 전세 사는 것, 집을 사서 사는 것, 세상에 살 동안 사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제 친구 중에 연대 철학과에서 같이 공부하고 합동측 총회신학대학에 가서 공부하고 미국 가서도 같이 공부하던 아주 깨끗하고 좋은 목사님이 한 분 계시는데 저와 나이가 같습니다. 그런에 오늘 아침에 갑자기 좀 괴로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분이 위암을 너무 늦게 발견을 하고 병원에 가서 수술을 했는데 임파선 24개중 12개에 벌써 암세포가 옮겨졌다 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볼 때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아요. 이렇게 짧게 하나님께로부터 그 생명을 빌려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상당히 오랫동안 빌려쓰는 사람이 있어요. 이것이 우리가 알 바 아니지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전부가 내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내가 내 소유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자체가 잘못인지 모릅니다. 세상에서 가장 편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하고 하나님께 맡겨놓고 살아가는 사람이 제일 현명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내 것을 가지겠다라고 하는 데서 자꾸 탐욕이 생기고 그릇된 사고 방식과 그릇된 행동과 방법이 자꾸 나올 수 밖에 없다는 말이지요.

이 청지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결론이 무엇입니까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 그렇게 말씀합니다. 장래의 보상을 위해서 자신의 현재 위치를 잘 선용했다라는 뜻입니다. 미련한 자는 현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사용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의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투자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청지기는 안락을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일고 있습니다.

쉬어 말틴이 쓴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만일에 그리스도인들이 골프에서 그들이 불리한 조건을 바꾸기 위해서 또는 장미를 기르기 위해서 노력하는 만큼 그리스도교를 위해서 애쓴다면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 상황과 그렇게 딱 들어맞는 얘기는 아닌 줄로 압니다. 미국적인 상황에서 볼 때에 골프치는 것에 얼마나 정성을 들입니까. 미국에 있을 때에 저도 친구를 따라서 골프를 치러 가보았는데 한 번 가고 안 갔습니다. 저는 두 가지로 골프가 안 맞는다고 보는데 돈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듭니다. 어찌되었든 골프칠 때 보세요. 조그마한 공을 구멍에 넣으려고 얼마나 정성을 들이는지 몰라요. 또 미국사람들이 장미를 기르는데 얼마나 애를 씁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사람은 꽃을 기르는데 집안에 들여놓았다가 밖에 내놓았다가, 물을 주었다가 온도를 재었다가, 얼마나 정성스럽게 하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정성을 기우릴 때에 우리가 좀더 나아지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지혜롭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을 위해서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삶의 지혜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들은 탕감받는 자들, 성경말씀을 보니 불의한 재물로 사귄 친구들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친구들은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기름 빌린 자는 100을 빌렸지만 50을 쓰라 말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고리 대금업자의 이자가 100%이기 때문에 50만 주면 된다는 얘깁니다. 밀을 빌린 자는 100을 80이라 쓰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주인 편에서 보았을 때는 이자가 없어졌지만 채무자에게 주인의 자비가 나타나게 되었다,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청지기로 인해서 주인의 자비가 빚진 자들에게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참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주인은 지혜롭다고 칭찬했다는 것입니다. 동족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는데 어거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도록 해준 청지기였다는 말이예요. 그런 면에서 볼 때에 지혜롭다고 말씀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주인의 부이지만 그 부에 집착하지 않고 관용을 베풀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청지기가 사귄 친구들을 보면 불의의 재물로 사귄 친구들이었습니다. 당시의 경제구조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부자가 될 수 없는, 불의해야 돈을 벌 수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어라" 말씀한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말씀했겠습니까 이것은 요즘 말슴이 아닙니다.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에 그 당시 부자는 불의하게 돈을 모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 당시 재물은 불의한 것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재물이라고 해서 등을 지고 살아라,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재물에 대한 생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때때로 어떤 사람은 돈에 대해서 너무 원수시합니다. 돈은 더러운 것이다, 멀리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말하는 많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중세시대 때에 수도사들 또 사막에서 사는 은둔자가 있었습니다. 사막에 살면서 일반과 접촉하지 않는 사람들 중에는 세상의 재물들은 전부 더러운 것이다. 돈으로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돈을 멀리하고 아예 돈을 원수시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초기의 사례를 보면 아예 법적으로 재물을 소유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돈을 더럽게 원수시하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에 있는 예수님의 재물에 대한 태도를 잘 알아야 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그 당시의 재물은 불의한 것이었지만 예수님께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불의한 재물을 무시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구전들, 기록들을 보면 참 재미있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들이 많지 예수님이 어릴 때에 피난가셨다, 그
때까지 나오고 그 다음부터는 아버지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경 뒤에 보면 마리아에 대한 얘기 그리고 어머니 부탁하는 얘기, 어머니에 대한 얘기만 나오지 아버지 얘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얘기로 보아서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은 예수님이 어릴 때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는 추측들이 많습니다. 또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전에 보면 그런 얘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장남 아닙니까. 예수님의 동생들이 있었지요. 장남으로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공생애 전까지 굉장히 일을 많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목수였고 대를 물려 목수를 하셨는데 특별히 목수로써 장기가 하나 있었답니다. 소의 멍에를 만드는 일이었다고 그럽니다. 그 당시 구전에 보면 예수님께서 만드신 일이었다고 그럽니다. 그당시 구전에 보면 예수님의 가게에는 이름을 붙이고 간파을 걸어놓고 그랬나 봐요. 예수님의 가게에는 "내 멍에는 편안하다" 이런 간판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11장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말씀과 상당히 비슷한 말씀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내 멍에는 편안하다"라는 말이었는데 `편안하다'는 잘 맞는다, 적합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런 면을 보아서 예수님은 절대로 재물을 무시하거나 더럽다고 말씀하지 않고 오히려 불의한 재물을 가지고 친구를 사귀라고 적극적으로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재물에 대한 그릇된 생각이 지나치게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돈 없이는 못 사는 줄 알고,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다 하는 줄 아는 지나치게 돈을 의지하는 사고방식, 또한 잘못되었다는 말입니다. 성경말씀은 돈을 그런 면에서 많이 경계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디모데전서 6장 10절 말씀에 보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합니다. 돈이 필요해서 쓰는 것이지만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 경고하고 있습니다.

세번째, 재물에 대한 우리 태도는 도능 중립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돈 그 자체는 악한 것도 아니고 사랑할 만큼 좋은 것도 아닙니다. 돈은 필요한 것이지만 돈에만 의존할 수 없습니다. 돈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필요한 대로 쓰고 남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고 또 돈을 친구로 생각하는 중립적인 생각이 중요하리라고 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이 땅에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청지기로서 얼마나 충성스럽게 주인의 재물을 관리하고 있습니까 좀전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정말 우리들은 선한 청지기처럼 잘 관리해야 합니다. 시간이 그러합니다. 재물이 그러합니다. 재산이 그러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그러합니다. 불의한 사람들은 이것이 마치 자기의 것인양 착각하고 마음대로 쓰고 있습니다. "만일에 돈을 주인으로 섬기면 돈은 악마가 되어서 당신을 지배할 것이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일 내가 지식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면 지식이 악마가 되어서 마지막에는 신으로 군림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내가 내 자신을 지나치게 의존하고 살아간다면 내 자신이 악마가 되어서 허망한 상황으로 파멸시키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선한 청지기 관념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으로 의롭게 그리고 주인의 마음에 합당한 삶을 살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귀한 이 말씀을 통해서 주인에 대한 청지기의 자세를 다시 한번 가다듬어 보고,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인의 재산을 한 번 선하게 잘 관리할 수 있는 청지기의 자세를 가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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