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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커다란 슬픔 (롬 09:1-5)

첨부 1


오늘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첫주일입니다. 사순절은 “건강한 회복”, “투명한 따름”의 절기입니다. 그래서 이 절기에는 “새봄”의 형상이 담겨있습니다. 여기에는 상처 나고 일그러지고 굳어져 버린 것들, 절망의 푯말이 깊게 박혀버린 자리를 차고 일어나는 건강한 회복의 계절이 있습니다. 상처의 골이 깊을 수록 더욱 힘차게 일어서는 “생명의 말”이 담겨있습니다. 생명을 잉태하는 회복의 절기는 겸손하고 투명한 따름을 이끌어 냅니다. 그것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기꺼이 따르는 길”(루가9:23)을 뜻하는 것입니다.
굳은 마음과 관계가 회복되는 정화의 시절은 커다란 두 가닥의 고백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그것은 “나는 누구입니까!”,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입니다. 겸손한 따름과 생명적인 회복은 “나는 지금 어디에 어떠한 모습으로 있는지”를 보는 “눈뜸”을 통해서 입니다. 이것은 바로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마르코 10:51)라는 예리고 소경의 절박한 고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가 눈을 뜨고 싶습니다! 내가 보기를 원합니다!”라는 고백은 어느 명상가의 명상주제가 아니라 소경의 삶의 전부를 통해 쏟아놓은 애절한 고백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막연함이나 추상도 파고들 수 없습니다. 그대로 삶의 고백이고 자기 전체를 통해 이끌어낸 것입니다. 이 고백은 곧 ‘내가 지금 서 있는 자리’, ‘그 자리에 서있는 나’를 향한 눈뜸입니다. “곧 그 소경은 눈을 뜨고 예수를 따라 나섰다.”(마르코 10:52) 뒤따라오는 자연스러운 행위입니다. 그것은 참담한 시절을 정화하고 야훼의 날을 불러들일 새봄의 역사를 향해 일어설 “누구”를 부르는 소리에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이사야 6:8)라고 썩 나서는 “투명한 따름의 영성”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눈을 뜨고 싶습니다.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사순절의 고백입니다. 삶과 관계와 공동체와 역사를 바로잡는 정화의 시절, 이는 삶의 전부를 통해 일구어 가는 투명한 따름을 담는 그릇입니다.
이 정화의 시절에 우리는 겨레의 슬픔을 온 가슴과 삶으로 고백한 겨레의 역사를 생각합니다. 이 역사는 피흘리며 쓰러지고 또 쓰러지면서도 결코

감추어 둘 수 없었던 온 겨레의 함성은 “이 땅의 울음이었고, 조선의 통곡”이었습니다. 삼일운동은 울음과 통곡이 절망이나 삶과 역사의 수렁이 아니라 “새로운 용기와 해방의 움직임이 움트는 곳”임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참담한 파라오의 시절, 노예의 역사 속에서 “히브리 노예들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했던”(히브리 11:25) 모세의 고백적인 움직임과 통하는 길목입니다. 이는 “누구”를 부르는 소리에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이사야 6:8)라고 고백하는 투명한 따름의 고백입니다. 공동체와 역사의 새봄을 일구는 생명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또 하나의 고백을 만납니다.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끊임없이 번민하고 있습니다. 나는 혈육을 같이하는 내 동족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 떨어져 나갈지라도 조금도 한이 없겠습니다.”(로마서 9:2-3) 바울은 자신의 겨레를 보고 있습니다. 그의 뼈이고 삶이기도한 겨레를 몸전체로 느끼며 만나고 있습니다. 겨레를 향하여 민족을 향하여 고백합니다. 그의 번민은 겨레를 향한 “해방적 관계”에 놓여있습니다. 그것은 겨레가 예수와 함께 일구는 “하나님 나라의 대동세상”을 가슴 벅차도록 기쁘게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고백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습니다. 그의 형제이며 자매인 겨레와 민족을 향한 사랑과 복음의 열정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가 이 “겨레의 교회” “민족의 교회”임을 한결같은 목소리고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가 이러한 바울의 열정으로 그것이 표현되어야 합니다. 뒤틀리고 천박한 겨레의 몰골이 우리의 “큰 슬픔”이고 거듭 새롭게 일어서야 하는 겨레에 대한 “끊임없는 번민”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 새로운 시대에 새롭게 되는 것은 어떠한 변신술이 아니라 “우리의 건강함을 되찾는 것”이며 “겨레에 대한 열정과 진지한 번민과 슬픔이 우리 안에 살아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겨레 이 민족을 향한 우리의 걸음은 이러한 건강함을 불러들이고 이를 살아가는 전통을 새롭게 창출하는 보폭입니다. 겨레의 아픔이 큰 슬픔이고 그것이 번민이되어 우리의 고백속에 녹아들고, 그것이 결국 신명나는 “하나님 나라 살판”을 만들어 가는 것을 우리가 목격하는 것입니다. 사순절은 우리에게 이러한 청명하고 투명한 따름, 곧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라는 따름의 고백을 이끌어 냅니다.
오늘 우리는 사순절의 긴 길목의 입구에 서서 “투명한 정화의 삶”을 고백하고 “건강한 따름”을 묵상합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눈을 뜨고 싶습니다.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절실함이 살아나는 새봄의 살길은 이러한 고백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어떠한 것도 막아 세울 수 없는 생명의 몸짓이 이 고백 언저리에서 기쁘도록 힘차게 일어서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사순절입니다. 건강한 고백의 사순절입니다. 낙골

▣ 사순절 둘째주일▣ 199

5.

3. 12
허리끈을 동이고 길 떠나는 사람들
 본 문:마르코 14:32-42
“아직도 자고 있느냐 아직도 쉬고 있느냐 그만하면 넉넉하다.”
“자, 때가 왔다. 일어나 가자.”(마르코 14:42)

오늘은 사순절 두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은 “인내의 영성”을 일구는 밭입니다. 이는 마치 베틀로 베를 짜는 길고 긴 작업과 닮았습니다. 두 가닥의 버팀줄에 연결된 빈약한 씨줄과 끝에 매듭이 있는 날줄이 한올 한올 교차됩니다. 이것은 실로 우리 삶의 표상입니다. 베틀의 가는 실들이 정말 끝까지 버텨 낼 수 있을지, 짜임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 조마조마한 일들을 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짜임을 지켜보는 눈과 실을 다루는 손과 발의 인내와 열정이 한 가닥씩 엮여 이루어지는 튼튼한 천을 만들어 냅니다. 이렇듯 짜여진 천을 만져보고 가지런히 접는 손길에 커다란 기쁨이 배어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순절은 이러한 진지한 인내의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냅니다. 느슨하게 늘어진 부분들을 끌어당기고 끊어진 부분을 묶어 건강한 짜임이 되도록 하는 “긴장”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질끈 허리끈을 동이는 “긴장”입니다. 허리춤에 동이는 끈에는 어떠한 다짐이 담겨있습니다.(에페소6:14)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설레임이라고 할까요 길을 떠납니다. 이것 저것 옷가지며 먹을 것이며 길을 떠나는데 필요한 것들을 챙깁니다. 이제 길을 가노라면 여러가지 곤경을 만나게 될는지도 모르지만 허리 질끈 동이고 등짐에 막대하나 들고 떠납니다. 여기에 나침반을 하나 챙겨두면 더없이 든든합니다. 길은 길고 길게 이어져 있습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어 보이는 지루함도 있을 테지만 한 걸음 씩 걷습니다. 그러나 긴 여행길에 섣부른 단정은 위험합니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생각할 것도 없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적당히 어떻게 되겠지.” 알지못하는 고랑도 있을 수 있고 돌부리도 솟아 있을 수 있습니다. 웃자란 풀들이 길을 가려서 어찌하다가 방향을 잃거나 길을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사는 일에는 이러한 돌발적인 상황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정적인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가다가 힘이 들고 잃은 길을 찾기가 쉽지 않을 때는 조금 쉬어서 땀을 닦거나 빵조각을 나누면서 힘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예 벽돌을 쌓고 문을 해달아 닫고 들어가 앉아 여행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순절은 우리에게 이러한 “긴장”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허리끈을 동이고”(에페소6:14) 길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예수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루가13:33) 예수의 변함없는 고백입니다. 겨자씨앗 그 작은 알갱이에서 새들이 깃들이는 푸른 나무를 보았기 때문에 그는 지금껏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길을 떠나 걷고 또 걸어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겨자씨앗의 푸른 나무는 우리에게 기꺼이 씨앗을 뿌릴 용기를 내게 하고 길을 떠나게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는” 진지한 다짐은 다그쳐서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 “푸른 나무며 숲과 열매”를 내다보기 때문입니다. 이를 향해 썩 나서는 따름, 이 건강한 따름이 있을 때 우리의 여행은 더욱 풍성한 경험과 내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말합니다. 길을 떠나 오늘도 내일도 함께 하기로 다짐한 이들을 향해서 말합니다. “아직도 자고 있느냐 아직도 쉬고 있느냐 그만하면 넉넉하다. 자, 때가 왔다. 일어나 가자.”(마르크 14:42) 예수께서는 여행에 지쳐 그만 잠이든 제자들을 흔들어 깨우며 가던 길을 마저 가자고 재촉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변함없이 하나님 나라의 푸른 숲을 가꾸면서 나아가자고 합니다. 이제 결정적인 때가 왔으니 일어나서 힘차게 발을 내딛자고 합니다. 느슨해진 끈을 끌어당기고 널려진 짐들을 챙겨서 저 만치에 던져놓은 나침반을 찾아 챙겨들고 이제 일어서야 할 때가 왔다고 말합니다. “자, 때가 왔다. 일어나 가자.”
우리가 인내하면서 바램을 죽이지 않으면서 한겨울 씨앗을 먹어치우지 않는 진지한 마음을 가질 때 결정적인 시점을 놓치지 않습니다. 씨앗을 뿌려야 할 때, 이제 일어서서 나서야 하는 때를 알아차립니다. 사순절에 우리는 이러한 씨앗품기를 익혀야 합니다. 씨앗을 먹어치우지 않는 인내와 간절한 바램을 가져야 합니다. 베틀로 베를 한 가닥 씩 짜는 길고 긴 작업을 익혀야 합니다. 씨줄과 날줄을 한올 한올 짜내려가는 진지함을 품어야 합니다. 실을 다루는 손과 발의 인내와 열정을 우리 안에 담아야 합니다. 뿌린 씨앗 안에서 움트고 싹이 자라 올라 “새들이 깃들이는 푸른 나무”(루가13:18-19), “정의의 느티나무 숲”(이사야 61:3)을 이루는 세상을 바라봅니다. 이러한 “보는 눈”이 복되고 그 “바램”이 기쁨이 됩니다. 사순절은 이러한 바램을 일구고 인내하며 참된 기쁨을 경험하는 절기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순절 두 번째 주일에 “씨앗품기”와 “베짜기”의 아픔을 묵상합니다. 그것은 바램을 저버리지 않는 인내의 영성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영성을 삶에 담고 길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자, 때가 왔다. 일어나 가자”고 우리를 재촉하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푸른 숲을 바라보며, 함께 일구어 가는 공동체의 푸른 숲을 바라보며 오늘도 내일도 걷고 또 걷는 사람들입니다. 낙골

▣ 사순절 세째주일▣ 199

5.

3. 19
하나님의 일꾼답게
 본 문:고린도후서 6:1-13
“두 손에는 정의의 무기를 들고 언제든지 하나님의 일꾼답게 살아갑니다.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사순절 세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은 실로 우리를 “구체적인 현실”로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직면하게 합니다. 우리는 그 직면하고 있는 자리를 실제적으로 경험합니다. 슬픔을 당하기도 하고 아프기도 합니다. 마음이 갈래가 지는 속상함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견디기 어려운 궁핍과 상실감에 놓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진정 실제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그 실제적인 아픔의 경험이 “파괴적인 괴로움”이 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한결같이 건강함을 잃지 않으면서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사순절에 우리는 이러한 “건강한 직면”을 묵상합니다.
예측의 지점을 빗겨나가는 현실은 언제나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문제가 됩니다. 우리의 삶의 건강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앞으로도 수시로 우리 삶을 들락거리며 때로는 상처를 남기고 근심자락을 심어놓기도 할 것입니다. 이 가늠할 수 없는 현실을 어떻게 만날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은 생각을 낳고 상상력은 더욱 어처구니없는 생각의 물줄기를 틀어 건강하게 직면하지 못하게 하고, 넘어지거나 지레 포기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허약한 순응”이 한층 더 심각한 괴로움을 가져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상력을 동원한 “비약”이 아닙니다. “어떻게 모면할 것인가 어떻게 피해버릴 것인가 숨을 것인가”를 궁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건강하게 만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이야말로 알맞은 때이며, 오늘이야말로 구원의 날”(고후 6:2)이기 때문입니다. 모면하려 하지 않을 때, 파도치는 현실의 줄을 놓아버리지 않을 때, 우리는 “알맞은 때”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듯 건강하게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순절은 언제나 어떠한 처지에서도 “알맞은 때”를 경험하는 삶을 일러줍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떠한 처지에든지 감사하십시오”(Ⅱ데살로니카 5:16-18)라는 당부를 하고 있는 바울은 바로 이러한 “알맞은 때”를 지금 만나고 있는 현실, 지금의 나에게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지금 나에게서 알맞은 때, 시작하기에 충분하고 적절한 때, 도전 해볼만한 때를 보는 것, 그렇게 직면하는 것은 실로 소중합니다. 우리가 갈래가 지는 통증의 끝날에 몰두하거나 지레 물러서지만 않는다면, “알맞은 때에 손을

내미시고 우리네 삶을 잡아주시는 손길”(고후6:2)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너에게 손을 내밀어야 할 때에 네 말을 들어주시고 손을 내미시고, 너를 구원해야할 날에 너를 도와주시는 분, 바로 지금이 그날이고 그 알맞은 때”라는 인식, 이러한 신뢰의 고백과 확신이 이 사순절 기간에 우리가 달구어 가야 하는 내용입니다.
실로 이러한 확신이야말로 우리가 넉넉히 이겨나갈 수 있는 무기입니다.
“두 손에는 정의의 무기를 들고 언제든지 하나님의 일꾼답게 살아갑니다.”(고후6:8)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통증의 자리에서도,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 다다르더라도, 바울의 표현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굶주림과 궁핍과 모욕과 위협”에 놓일 때에도 우리는 해방자 성령의 결정적인 도우심을 생각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꾸밈없는 사랑과 복음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기억합니다. 우리 두 손에 들린 것은 바로 이러한 “의로움의 무기”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슨 일에나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일할 따름입니다”(고후6:3)라는 확신에 찬 당당한 고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려지지 않은 자 같으나 유명합니다. 죽은 자 같으나 우리는 살아있습니다. 우리는 진실합니다.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고후6:9-10) 지금을 가장 적절한 때로 알아차리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건강하게 직면하면서 바로 “지금” 내미는 손을 잡습니다. 우리는 가진 것 없고 허술합니다. 그리고 약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견디어 낼 수 없을 것 같은 어려움에 처해서 살 희망조차 잃어버릴 것 같은 처지에 놓였다”(고후1:9)고 말하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느낌”일는지도 모릅니다. 돌파구가 없다든지 막다른 길에 놓였다는 생각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지점에서 이러한 현실을 건강하게 직면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러한 현실을 알맞은 때라고 이제 우리의 알맞은 때를 만났다고 말하는 것은 엉뚱합니까 어처구니없는 만용일까요 그러나 분명하게 알아두어야 하는 것은 조건이 우리를 충족시키거나 일을 성사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우리를 지탱해주는 확신, 사는 일에 대한, 나와 공동체에 대한 뿌리에서부터 일어서는 고백적인 확신이 거침없이 일어서는 용기를 갖게 합니다. 바로 그렇게 내미시는 야훼의 손길을 만나게 됩니다.
이 고백의 사순절에 우리가 건강하게 자신의 삶과 자리를 직면하고 지금 우리의 알맞은 때를 함께 만나야 합니다. 이렇듯 진지하게 언제나 어떠한 처지에서도 “알맞은 때”를 경험하는 삶을 함께 살아갑시다. 우리의 여문 고백, “언제든지 하나님의 일꾼답게 살아갑니다.” 이 고백과 함께 이번 한 주간 고백과 확신의 사순절을 기쁘게 살아갑시다. 낙골

▣ 사순절 네째주일▣ 199

5.

사순절 성만찬의 예전
초대와 응답
▷인도자:건강한 회복과 따름의 사순절, 건강한 생명의 계절에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투명하게 예수를 따르는 삶을 묵상하며 오늘 이 주님의 밥상에 형제.자매를 초대합니다.
회 중:오늘 어떠한 것도 막아 세울 수 없는 생명 움직임을 이끌어내는 삶을 다짐하며 이 주님의 밥상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합니다.

처음 기원
▷인도자:주님, 오늘도 내일도 한결같이 주님을 따라 걷게 하는 용기를 기도합니다. 쉽사리 포기하지 않고 자만하지도 않으면서 걷게 하소서.
회 중:주님, 오늘 우리에게 씨앗 심고 가꾸는 변함없는 손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바램을 죽이지 않고 인내하면서 길을 걷게 하소서.
▷인도자:주님, 전체를 보는 눈을 주시어, 우리가 섣부르게 단정짓고 뒤돌아 버리는 일이 없게 하시어, 훗날 푸른 나무가 되어 우리 앞에 우뚝 서있는 성숙한 삶의 나무를 우리가 만나게 하소서.
회 중:주님, 오늘 당신의 삶이고 기도이며 바램인 주님의 밥상을 함께 나누면서 쉬 사라지지 않는 다짐을 확인하게 하소서. 아-멘.

성만찬 제정사
▷인도자:이 예식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려주신 것입니다. 곧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떡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떼시어 그의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에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은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의로운 죽음을 선포하고 이것을 주님께서 다시오 실 때까지 고백적으로 기념하십시오.
회 중:주 예수여,당신의 죽음에 동참하고 당신의 부활에도 참여하기를 원하나이다. 우리에게 당신의 힘과 생기로 함께 하옵소서. 아-멘.

주의 기도
▷인도자: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당신께서 언제나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주님 안에서 한 마음과 한 몸이된 우리가 주께서 일러주신 기도를 함께 드립니다.
회 중: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성만찬 선언
▷인도자:(떡을 높이 들며) 이것은 여러분을 위해 주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회 중:아멘.
▷인도자:(잔을 높이 들며)이것은 여러분을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회 중:아멘.

성만찬에의 참여
(성찬의 노래를 함께 부르며 빵과 잔을 나눔)

감사의 기도
▷다같이:주님, 오늘 여기 사순절 한복판에 우리가 함께 한 이 주님의 밥상은 오늘과 내일로 이어지는 일관된 확신과 성숙한 다짐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우리가 쉽사리 포기하거나 뒤돌아서 버리는 일이 없도록, 지금 가장 알맞은 때에 손을 내밀어 함께 하시고, 뿌리에서 일어나는 거침없는 확신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게 하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나이다. 아-멘.

▣ 사순절 다섯째주일▣ 199

5.

4. 2
용기를 이끌어 내는 진리
 본 문:요한복음 17:1-19
“아버지, 이 사람들을 지켜 주십시오.”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오늘은 사순절 다섯째 주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간절함이 담겨있는 예수의 기도를 묵상합니다. “벗을 위해 바치는 사랑”(요한15:13)을 말씀하신 예수의 기도에는 어떠한 비장함이 담겨있습니다. “때가 왔습니다!” 예수는 그의 적대자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새로움을 거부하는 사람들, 그들은 움트는 새날의 싹을 잘라내기 위해 거절의 칼을 갈고 있습니다. 새봄을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당혹스러운 이 “거절의 계절”에 예수와 그의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예수는 자신과 그의 사람들이 당할 고난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것이다.”(요한16:33) 그렇지만 이 고난이 결국 오게 될 새로움의 계절을 막지 못한다는 것을 또한 알고 있습니다. 끝내 그 거절의 세력들을 이겨내리란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한결같이 용기로울 것을 당부합니다.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예수는 말합니다. “이미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새로움을 불러들이는 확신의 가슴 속에서 승리의 현실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러한 확신을 그의 사람들에게 심어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비장한 기도는 그의 사람들을 향하여 일러주고 있는 마지막 말 같습니다. 예수는 진리를 위하여, 사랑하는 벗을 위하여 몸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에 말투에서 결전을 앞에 두고 있는 당당한 표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는 그가 떠나가려는 길이 새로움의 현실을 더욱 앞당길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제자들, 사랑하는 벗들이 이러한 삶을 나누어 줄 것을, 그래서 완고하고 새로움을 거부하는 성전체제를 대체할 약한 사람들의 공동체를 만들어 갈 것을 당부합니다. 아울러 그의 사람들이 당할 고난과 아픔을 바라보면서 두려워하지 말 것을, 새로움의 계절은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되고 있을 뿐 아니라 아무도 이를 막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협적인 상황 앞에서 당황하고 몸둘 바를 몰라서 지레 포기하기가 쉽습니다. 이렇듯 도전에 쉽게 노출되어 있을 뿐 아니라 견디어 내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의 사람들은 두려움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는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을 지켜 주십시오. 이 사람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는 기꺼이 아버지의 정의에 순종하며 하늘 뜻을 살아가는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삶을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결코 뒤로 물러서거나 쉽게 포기하여 각서 쓰며 움츠러드는 나약함을 반복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 한복판에 서 있으면서도 이 세상의 가치와 탐욕의 의지에 속해있지 않다”는 것을 일러두며, 이것이 결정적으로 당혹스러운 고난의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근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려고 하는 길에 “잔뜩 겁을 집어먹고 고통으로부터 도주”하려는 유혹의 돌부리가 놓여있습니다. 예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은 생활을 마취시키고 무감각하고 고통을 느끼며 나누는 능력을 앗아 버립니다. 이를 잃어버린다면 공동체적 관계를 저버리게 되고 고난 속에서 잉태되는 새로움을 불러들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통을 참고 이겨내는 능력을 잃어 갈수록 약한 사람들의 고통을 허용하고 조장하기가 더욱 손쉽게 됩니다. 예수가 가려는 길은 고통을 피해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그 한복판에 기쁘게 썩 나서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알맞은 때에 손을 내미시는 아버지 정의의 손길을 기억하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지켜 주십시오.”(요한17:11)
예수는 그의 사람들이 두려움없이 진리를 위해 살아가는, 기꺼이 벗을 위하여 살아가고 돌부리며 아픔의 고랑을 마다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할 수 있으리란 것을 믿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한17:17) 예수의 사람들이 능력이 많아서 용맹스러운 기질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렇게 움직일 수 있는 힘은 확신입니다. 새로움을 불러들이는 일에 대한 확신, 그 그침이 없는 확신의 샘물에서 용기의 물을 퍼 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기도합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한17:21) 이러한 확신 속에서 희망을 개별적인 영역에 가두거나 사유화하지도 않으면서 하나가 되어 나아갈 것을, 이렇게 마음을 모아갈 것을 당부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된 것처럼 그렇듯 절실하고 진지하게 하나가 된 공동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순절에 우리는 예수의 기도 속에서 우리가 달구어가야 하는 기도를 읽습니다. 기꺼이 진리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 벗을 위하여 살아가는 마음, 그 속에 희망을 두고 새로움의 계절을 부르는 사람, 그러한 공동체를 기도하게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확신 속에서 하나가 되는 것은 언제까지라도 끊임이 있을 수 없는 희망의 끈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용기, 이른바 관찰이 아니라 만나며 그렇게 확신하는 바를 살아가는 용기를 기도합니다. 이 확신의 사순절에 말입니다. 낙골

▣ 사순절 고난주간▣ 199

5.

4. 9
칼을 가지고 가라
 본 문:루가 22:1-2, 35-38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백성들이 무서워서
예수를 어떻게 죽여야 탈이 없을까 하고 궁리하고 있었다.(1-2)”
“칼이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가지고 가거라”(36)

오늘은 사순절의 마지막 주일이고,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예수는 “이제 어두움 지배하는 때가 되었다”(22:53)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를 어떻게 죽여야 탈이 없을까”(22:2)를 궁리하는 자들이 그들의 계산 빠르게 움직임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정과 평화를 깨는 “눈엣 가시”와 같은 존재이며, 여기 저기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예수를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것을 계기로 이 일을 서둘러야 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절호의 기회”가 필요했습니다. 예수의 주위에 그의 지지자들, 추종자들이 주변에 적을 때 예수를 없애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기회를 사용하되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의 기회를 만들려고 합니다. 유월절 명절은 모든 유대인이 저마다의 집에서 출애굽 해방을 기념하는 때이며, 예수 주변에 사람이 흩어지는 좋은 시점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또한 예수의 체포를 교묘한 방법으로 대신 해낼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때마침 예수의 추종자 중 한사람(가리옷 유다)이 자청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그들은 박수를 쳤을 테지만, 그 계략이 곧 그들 자신을 파멸시키는 계획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겉치레 빠스카 유월절 축제는 끝장나고 말 것입니다.
예수는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시면서 지나간 때를 기억하게 합니다. “그 동안 내가 너희에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했는데 부족한 것이라도 있었느냐”고 묻습니다.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던 때”(22:36)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제 사정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신랑을 빼앗기는 날”(마르코 2:20)입니다. 위기의 때, 칼의 시간, 결단의 시간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제자의 삶 가운데는 만사가 얽혀들기만 할 뿐 풀리지 않을 때, “칼이 필요한 때”인 것입니다. 싸워야 하는 때입니다. 칼은 지금이 삶을 위협하는 쓰라린 전환기임을 말해줍니다. 이때까지 눈에 보이던 성공의 경험들이 사라지고 제자의 주위에는 외로움이 찾아들며 소명의 멍에를 벗어버리고 싶다는 유혹이 찾아오는 때입니다. 여기에서 칼은 하나의 상징어입니다. 예수는 그들에게 짤막한 비유 같은 말을 한마디를 던진 것입니다. “칼이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야한다”(22:36). 잘 드는 칼하나 씩 지닌다 해서 로마의 칼을 당해낼 수 있을까! 여기에서 칼은 “단호한 대응력”을 뜻합니다.

계략대로 예수는 죽게 될 것이고 이로써 제자들을 비롯하여 예수를 따랐던 이들에게 파급되는 곤란한 지경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이 이미 지닌 휴대용 칼을 내보이게 하면서 “너희들이 지닌 칼과도 같은 단호한 처신이 필요하다”는 당부를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이 “온갖 시련을 겪게 될 것”(22:28)을 예견하시면서, 쉽사리 악마적인 세력에 굴복하고 적당하게 타협하는 태도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이를 견디어내기 위해 단단히 마음먹으라고 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길을 함께 가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에 대한 신뢰와 밀접한 관계가 “아무런 부족함이 없게” 했다는 것을 제자들이 이런 때에 기억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스스로 경험한 이 신뢰와 걱정 없는 마음에 힘입어 보냄을 받은 자로서의 길을 갈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사람들의 환대를 예상할 수 없으며 미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시기가 오면 그들은 그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제자로서 살아가는 삶 속에서 “주님께서 바로 옆에 계심을 느끼면서” 보냄 받은 사람의 길을 끊임없이 가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 속에서 그들의 발걸음은 가벼워 질 것입니다. 삶을 보장해 주는 것들은 그 때 그 중요성을 잃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나에게 질문하십니다. “내가 너를 보냈을 때, 나의 보냄을 기꺼이 받아들여 길을 나섰을 때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까”라고, “결정적인 곤경에 처한 적이 있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우리에게 식량이나 다른 어떤 것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도 오히려 삶의 의미가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더 이상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삶의 위기입니다. 가끔은 “무엇”인가 부족해서, 그 “무엇”이 아쉬워서 곤란을 겪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저런 물건들과 수단들은 결정적인 문제가 되지못합니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혼동은 이러한 것입니다. 무엇에 기대거나 우선순위를 둘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정신없이 달려오기는 했는데 우리가 결정적으로 빼놓은 부분은 없는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떠 어떠한 실적이나 눈에 띄는 성과보다도 중요한 것, 점검 받아야 하는 것을 생각해야합니다. 우리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 스스로 안정된 것을 위해서 이러저러한 많은 것을 등에 짊어지고 걸어온 것은 아닌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결코 만족을 모를 마음으로 아무리 많이 가져도 성에 안찰 많은 사람들의 안전에 대한 가치기준을 흉내내고 있지는 않은 가요 겉으로 보기에는 부족한 것이 없겠지만 속으로는 텅빈 모양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 따름 가치관을 잃었다면 말입니다. 낙골

▣ 부활주일▣ 199

5.

4. 16
절망의 돌덩이를 들어올리는 “예”라고 대답하기
 본 문:루가 24:1-12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거기에는 세마포만 놓여 있었다.”(루가 24:1-12) 이 말은 죽임을 넘어서는 부활의 생명력을 가장 강렬하게 증언해 주는 메시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는 갈릴레아로 갔습니다. 갈릴레아. 민중의 한이 있고, 설움이 있는, 온갖 고통과 시름이 있는 그 갈릴레아로 갔습니다. 진리가 거절당하고 정의의 노래를 빼앗겼던 땅. 그곳에 예수께서 부활의 생명력으로 썩 나섰습니다. 모두 아니라고, 죽음이라고 끝장이라고 부정하는 바로 그 자리에 “예”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고집스러운 긍정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진실이 결정적으로 무너지는 법은 없다는 하나님의 역설적인 일어섬입니다. 처진 어깨, 두려워 포기하고 숨어버린 가슴들을 불러내어, 결정적인 시작을 말하십니다.
예수의 사람들은 마술사들이나 다른 어떤 지도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을 예수의 삶 속에서 보았습니다. 예수는 예언자적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가면서 여기에 해방자 야훼정신을 담아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운동의 시작이며 그 전부였습니다. 그것은 결국 새역사의 씨앗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의 죽음은 그의 민중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었습니다. 예수의 수난과 찢김 속에서 그에 대해 일체감을 갖고 있던 그들은 자신의 찢김과 아픔을 보았던 것입니다. 결코 소멸되거나 끝나버릴 수 없는 정의로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갈망이, 불의한 권력에 의해 찢기고 피흘려 무덤에 묻혀버린 예수의 생각과 삶의 모든 것이 되살아 나야한다는 강한 염원이 그를 따르던 민중들에게서 생겨났던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바로 이러한 염원 속에 결정적인 희망의 내용으로 채워졌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처형시킨 그 시대의 역사와 그의 고집스러운 삶에 대한 그의 사람들의 감흥을 지나쳐서는 안됩니다. 부활의 생명력은 구체적인 갈망 속에서 경험되고 그것이 현실적인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감당하기 쉽지 않은 절망의 무게를 들어올려 바로 그 자리에 뿌린 생명의 씨앗이 움트고 뿌리를 내리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모두다 “아니다”라고 절망적 죽임의 천으로 진실을 감싸 무덤에 봉인해 버려도, 그것을 거스르는 생명, 고집스럽게 “예”라고 대답하는 그 용기가 그 절망의 돌덩이를 들어올리는 것입니다.

예수의 삶과 죽음은 그 때마다의 “역사를 향해 던져진 문제제기이며 질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과 역사 속에서 대답되어야 합니다. 그에게 일체감을 느끼는 이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자신의 대답해야 살아가야 합니다. 죽임의 현실 속에서 이러한 바램을 일구어 가게 됩니다. “이대로 세상이 불공평하게 끝장나 버릴 수는 없는 거야. 의로운 사람들이 요절해 버리는 현실이 우리들의 신앙의 끝일 수는 없어. 의로운 사람들이 반드시 다시 살아나게 될 거야!”라는 현실적인 요청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소식은 지배자들의 완전범죄 시나리오를 하나님이 “안된다”고 거절하신 것이며, “너희가 죽여도 안 죽었다. 아니 안 죽는다”라는 선언입니다. 정치적인 이유를 물어 역사의 무대에서 폐기하려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말은 지배자들을 향한 무시무시한 항거였으며, 그들을 당황케 하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두려움에 둘러싸여 움츠러들면 들수록 볼 수 없는 생명을 거듭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우리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무겁게 짓누르고 움츠러들면 들수록 우리가 분명하게 더듬어 생각해야 하는 대목은 이것입니다. “결코 죽지 않는다는 말, 죽을 수 없다는 말” 죽임의 고랑을 마저 다 일구어 결국 생명의 싹을 움트게 하리라는 고백을 우리는 새겨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쁨찬 “예”를 말하지 않는다면 절망의 무덤에 머물 테지만, 온힘을 다해 “예, 예수의 진실은 죽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라고 대답하면 그것은 그대로 힘이 되고 용기가 되는 생명으로 썩 다가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부활절에 절망의 바위를 들어올리는 ”예“를 말해야 합니다. 모두가 다 거절하고 등돌리고 지레 포기의 못을 박았다해도 우리가 ”예“ 할 때 그것은 바로 부활의 현실이 됩니다. 포기하기 쉽고 악수하고 지레 물러서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우리는 예수의 ”예“를 생각합니다. 하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온 몸으로 기쁨찬 ”예“. 그 ”예“가 결국 결정적인 생명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기쁨의 부활주일에 예수의 긍정, ”예“를 우리의 언어로 말해봅시다. 또박또박 분명하게 감추임없이 말해야 합니다. 결코 끝나지 않았다고, 이렇게 끝나는 법은 없다고 포기하게 하는 절망의 바위를 들어올리는 싹이 이렇듯 움트고 있는데 ”끝“은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기쁨찬 긍정“이 삶을 새롭게 하고 역사를 일으켜 세운다고 말해줍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부활의 아침, 이 예수의 ”예!“ 안에서 말입니다. 낙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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