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마음에 참여하는 길 (요 14:15-24)

첨부 1


사순절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에 참여하는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저 지켜만 보는 구경꾼에 머물기를 거절하고 하나님께 참여하는 것, 예수께서 기꺼이 몸소 자신의 전부를 바쳐 그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 참여하도록 우리를 부릅니다. 예수는 “너희가 내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14:20)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참여의 관계”를 만들어 가게 합니다. 예수는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15:13)시며 우리를 벗이라 부르시고 우리에게 참여하셨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바쳐서 우리 삶에 참여하시고 새로운 가능성을 일으키셨습니다. 우리가 “관습의 눈”을 넘어설 때 우리에게 새롭게 볼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모든 “관계”에 있어서 서로에게 참여하지 않는 경우 관계의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참여”한다는 것은 “참견”한다든지 “간섭”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서로에게 참여한다는 것은 서로를 받아들이고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신분이나 직업적으로 틀에 박힌 역할로서 연결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이러한 틀에 박힌 관계를 넘어서는 보다 특별한 경우입니다. 틀에 박힌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사람들은 “당연해, 그럴 줄 알았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예상했던 대로야!”라고 지레 못박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일구는 관계”를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쩌면 어떠한 결과에 대해 예측하거나 규정하기는 쉬운 일입니다. 그 예측이 맞든 그렇지 않든 말입니다. 우리의 관습과 경향에 따르기만 하면 되니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저 “그럴 줄 알았어”라고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새로운 가능성에 참여하는 전혀 새로운 방식의 문제제기”입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을 통해 인상깊은 짧은 만화 한 자락을 보았습니다. 어느 마을이 차츰 황폐해져 가는 모습으로 보면서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나버렸습니다. 그러고는 이 마을에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무들이 사라지고 물이 말라버려, 그저 끝장났다고 이제 더이상 이곳은 사람이 살만한 곳이 못된다고 고개를 내저으며 떠나갔습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도 이유를 묻기도 전에 말입니다. 그 이유를 스스로에게 묻던 어느 말없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일 삼십여개의 나무 씨앗을 심었습니다. 그 일을 언제 시작되었는지 언제 그치게 될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매일 한결같은 일을 했습니다. 아무도 그의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세월이 또 흘렀습니다. 그 노인에 대한 소식은 알 수 없었지만 그 황폐한 마을은 과연 있었는가를 의심해야 할 정도로 맑은 물이 흐르고 푸른 숲이 우거져 있는 살만한 곳으로 변해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과를 상투적으로 예측하거나 못박아 규정하지 않는 눈은 황폐한 곳에서조차 푸른 숲을 봅니다. 그저 뒷짐지고 구경만 하면서 판단하고 관습에 따라 예측만 하는 것은 문제의 해결점이 아닙니다. 참여하는 것, 문제의 지점에 참여하고 사람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여”의 근거는 바로 사랑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요한14:1)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요한 14:21,23) 사랑하는 것은 참여의 그저 동기유발이 아니라 그 전부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는 것은 황폐한 들판이지만 실로 사랑할 때 우리는 그곳에 “씨앗”을 심을 용기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는 이러한 지점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사랑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랑할 용기가 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여 지레 사랑의 마음에 이끌리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사랑할 때, 그것을 자양분으로 하여 일어설 때 우리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사랑할 때 우리는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그의 뜻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참여하는 것은 바로 그것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랑은 “너희가 내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합니다. 이러한 “참여의 관계”는 우리의 여린 어깨에 용기를 심어줍니다. 사랑할 수 없을 때, 그러한 용기를 내지 못할 때 주께서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있다”(요한14:18)는 것을 확인시켜 주시고 새로이 일어나 사랑하게 합니다.
오늘 사순절 둘째 주일이 우리에게 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에 참여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것, 그저 뒷짐지고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 상투적인 관습으로 예측을 넘어서는 참여, 바로 이 참여하는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우리가 이번 한주간 이러한 참여의 삶을 묵상하고 느끼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기꺼이 하나님께 참여하고 사람에 참여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참여가 우리 스스로를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낙골

▣ 사순절 셋째주일 ▣ 1996.

3. 10
겸손의 영성
 본 문:필립비 2:1-5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사랑을 나누며 마음을 합쳐서 하나가 되십시오. 여러분은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사람들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길들여진 모든 소유관계들을 유지하고 싶어합니다.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방식과 온갖 관습들조차도 말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한결같이 인정되고 칭찬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떠한 일이든지 자신의 것이 알려져야 하고 갈채와 찬사를 받아야 하고 두드러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을 견딜 수 없어하고, 그들의 인정과 칭찬을 학수고대하고, 이러한 칭찬으로 마음을 높이 날아오르게 하고, 비판과 반대로 깊은 나락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이를 위하여 거듭 “자기주장”을 되풀이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조급한 마음이 달아오릅니다. 때로는 치밀하게 이해득실을 따져 물어 어느 대목에서는 움츠러들거나 이쯤에서 적극적이 됩니다. 또는 자기를 향한 칭찬과 찬사를 줍기 위해 경쟁적 의식의 옷을 여러 겹으로 껴입습니다. 이렇게 하여 자기자신을 지킬 수 있고, 삶을 보람되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보람은 과연 무엇입니까 무엇이 진정 나를 지탱해주고 지켜주는 것입니까 우리는 무엇에 영향을 받고 무엇에 조정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 마음이 경쟁적이 되고, 자기주장에 급급하게 되고, 다른 사람의 비판과 칭찬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는지를 솔직한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필령 ‘나 아닌 것’이 있습니다. ‘길들여지고 중독된 어떤 것’이 떡 하니 버티고 있습니다. 노예적으로 의존하고 있고 집착하는 마음이 거기에 있습니다. “이기적 야심이나 허영”(필립비2:3)이 잉태되는 자리입니다. “저마다 제 실속만 차리는”(필립비2:4) 이기적인 집착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여기에 어떠한 만족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단지 자신을 속이는 것, 속이 비어있고 부풀려진 환상이 있을 뿐입니다. “교만”하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에 대한 집착입니다. 언제 꺼져버릴지도 모르는 것에 노예가 되어있는 경쟁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마음밭입니다. 교만은 속속들이 파고들어와 앉아 있는 삶의 관습입니다.
사순절은 우리에게 이러한 ‘삶의 관습’을 떨치는 “겸손한 삶”을 깨닫게 해줍니다. “겸손함”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마치 물이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굴곡이 심한 하나의 감정상태가 아니라 일관된 물흐름입니다. 그것은 참된 신뢰와 믿음 속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모두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길을 걷는 사람은 길에서 여장을 풀기도 하고 잠을 청하기도 하지만 날이 밝으면 다시 지체없이 다시 떠납니다. 길을 걷는 사람이 길에 담을 쌓고 방을 만들어 그곳에 들어가 숨거나 안주하지는 않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을 떠나보내시면서 “길을 떠날 때 너희는 아무 것도 지니지 말라. 지팡이나 식량자루나 빵이나 돈은 물론, 여벌의 내의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루가9:3)고 이르셨던 말에 주목해 봅니다. 이는 우리가 과연 “무엇을 의지하고, 무엇에 근거를 두고 있는가” 하는 가치판단의 기준에 해당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길을 떠나 걷는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편리하다’는 이유로 이고 지고 주렁주렁 매달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것, 소유하고 집착하는 것들이 많으면 많을 수록, 결정적으로 길을 떠나 걷는 것 차체를 더 이상 계속할 수 없게 합니다. 길을 스스로 막아버리고 길가에 벽돌을 쌓아 집을 짓고 들어가 안주하고 주저앉아 버리게 합니다. 예수께서 “아무것도 지지지 말라”고 하셨을 때, 오직 “하나님 나라의 능력”에 대한 믿음 지키기를 당부하신 것입니다. “함께 하심”에 대한 믿음, 함께 길을 걷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 이러한 신뢰에서 겸손한 섬김과 따름의 삶이 비롯됩니다. 사순절은 우리에게 이러한 겸손의 영성을 배우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힘을 얻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안을 받습니까”(필립비2:1)라고 묻습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어떤 것, 자기주장을 함으로써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시는 예수”에 대한 믿음에 의해 내가 움직이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다는 고백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함께 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새로운 힘이 되는 것입니다.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사랑을 나누며 마음을 합쳐서 하나가 되십시오.”(필립비2:2) 이로써 우리는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경쟁적인 심성의 집착이 아니라 예수께서 몸소 보이셨던 삶의 방식, 겸손함 마음으로 서로를 일으켜 세우는 것, 이것이 모두를 살리는 바탕이 됩니다. “여러분은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필립비2:5)
오늘 낙골동동체는 무엇에 의해 스스로를 지탱해 왔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울러 여기에 앉아 있는 개개인은 또한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찬사와 비판에 너무 민감한 나머지 그것이 결정적으로 자신을 움직이게 하지는 않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쯤에서 우리를 살아가게 하고 우리를 “살리는 힘”에 대해 묵상해야 합니다. 그것은 겸손한 따름과 신뢰의 섬김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허상, 계산하고 따져물어 만들어 왔던 우리의 허상을 깨는 지점에서 자라오르고 맛보게 되는 그런 삶입니다. 낙골

▣ 사순절 넷째주일 ▣ 1996.

3. 17
아스피린 삼가하기
 본 문:마르코 3:6,11:18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나가서 즉시 헤로데 당원들과 만나 예수를 없애 버릴 방도를 모의하였다.”(3:6)

우리는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고통을 겪습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통은 언제나 견디기 어려운 걸림돌입니다. 역사 이래로 사람들은 이 고통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왜 고통이 오는가에 대해서, 고통으로부터 숨거나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를 질문해왔습니다.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의미를 찾아 그것이 어떠한 계기가 되도록 하고, 비로소 고통을 넘어서는 성숙한 마음을 쌓아왔던 것입니다.
복음서 안에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 두드러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이상하거나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당연한 관심이고 아주 중요한 문제 였습니다. 복음서 기록 당시의 초대교회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적대자들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복음을 지키고 그것을 확신으로 삼는 대가는 칼의 위협이고 죽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를 질문했습니다. 복음서의 관심은 예수의 고난에 대한 역사적 사실 보도가 아니라 이 일들의 의미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고난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것의 목적은 무엇인가 예수 안에 시종일관 담겨있던 그 무엇을 발견함으로써, 지금 복음서 기록 당시 초대교회 공동체 자신이 처해있는 고난의 의미를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고난”이란 단어는 성서에서 “견디어내야 하는 고통”에 대하서 말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강렬한 정서적인 감정이나 열정적인 참여나 투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는 사형을 받았습니다. 십자가는 그에게 주어졌고 그러한 뜻에서 예수는 ‘고통과 죽음의 희생자’입니다. 그러나 고난의 다른 의미도 역시 있습니다. 십자가형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에 대한 적개심은 예수 자신의 활동 결과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단호한 투신, 그의 열정으로 인해 그 사회의 어떠한 강력한 힘과 충돌하게끔 되었던 것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나가서 즉시 헤로데 당원들과 만나 예수를 없애 버릴 방도를 모의하였다.”(마르코3:6) 다시말해 그는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복음서의 표현대로 그는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를 없애 버리 자고 모의하였다. 그들은 모든 군중이 예수의 가르침에 감탄하는 것을 복 예수를 두려워 하였던 것이다.”(11:18) 예수의 죽음은 그의 활동의 성격에서 비롯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는 공개적으로 그릇된 성전체제와 굴절된 인간형을 폭로하고 도전합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생활에서 축출되고 경멸을 받던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고, 소위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함으로써 예수의 활동의 진수가 인간 사이의 벽을 허무는 연대성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사랑이 예배에 의미를 주는 것이지 의식자체가 사랑을 창조하지 않는다는 것을, 신앙를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공동체가 진정한 예배를 창출하는 것이지 성전 돌덩이가 그런 것이 아니란 것을 성전에서의 정화사건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는 그의 적대자들의 배타적이고 겉치례한 태도에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확신은 적대자들의 분노을 자아냈습니다. 그들은 즉각 예수를 죽일 계획을 모의합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그러한 의미에서 적극적인 투신과 섬김의 결과입니다. 복음서는 우리에게 “십자가는 우리가 견디어 내야 하는 것인 동시에 적극적으로 그리고 자의적으로 짊어져야 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자들이 고난을 견디어 내고 있고, 하나님의 뜻을 세우기 위해 고난을 무릅쓰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서에서 ‘고통’이라는 인간에게 주어진 수수께끼에 대한 확정적인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여러가지 소용돌이치는 고난의 현실 속에서 다양하게 반응했던 등장인물들 중 어디에 위치시킬 것인지, 자신의 자리를 정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자리에 있는지, 누구를 어떤 상황과 닮아있는지를 묻고있습니다. 이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임시방편이나 알약 처방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그것을 성숙한 걸음을 걷는 “뒷힘”으로 삼으라는 말로 알아듣습니다.
“아스피린 영성”이란 말이 있습니다. 진통제의 대명사처럼 되어있는 ‘아스피린’은 고통을 잠시 완화시킬 수 있지만 고통의 의미를 깨닫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스피린을 임시방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스피린을 찾는데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고통을 무조건 피하려고만 하고 그것으로부터 숨으려고만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가슴으로는 못견뎌 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는 것과는 사뭇 다른 “성숙한 인내”라는 말을 묵상해 봅니다. “나는 성인이 아니다”, “나는 예수가 아니다”라는 ‘명답’()이 있어서 나에게는 그것을 별개의 문제로 밀어놓을 수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되도록 ‘아스피린’은 일단 삼가하고, 가장 어렵고 고통스럽고 어두웠던 순간에 격려의 말을 건네주었던 따스한 벗에 대한 기억, 그 순간 바쳐올린 기도가 새로운 힘이 되었던 기억을 생각해 봅니다. 복음서에서는 인간의 역사 중에서 가장 어두운 그 순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을 가정 명확하게 드러내는 순간이었음을, 그리고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식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는 것을 기억할 일입니다. 예수의 수난은 어느 시점에 있었던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앙인들의 고통과 의망 속에 살아있는 현재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사순절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지금 겪고있는 고통은 어떠한 것입니까 아스피린이 만능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에 손이 먼저가지는 않습니까 물론 고통을 아무도 추상화 할 수는 없고 바늘 끝 고통이라해도 그것은 분명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또한 아무도 막아낼 수는 없습니다. 그통은 언제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 고통을 단순한 자각증세로만 보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헤아려 그것이 결정적으로 우리안에 새로운 힘으로 전환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낙골

▣ 사순절 다섯째주일 ▣ 1996.

3. 24
조바심을 넘어서는 신뢰의 마음 가꾸기
 본 문:요한 10:22-30
“당신은 얼마나 오래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할 작정입니까”(10:24)

종종 아이와 엄마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집니다. “엄마,이거 먹어도 돼요” 아이가 묻습니다. 엄마는 그 질문에 담긴 속뜻을 알고 있습니다. “안돼요!”라고 대답을 하고 아이의 반응을 기다립니다. 아이는 다시 묻습니다. “이거 정말 먹으면 안돼요” 엄마의 대답은 같습니다. 이쯤 되면 아이의 마음에 조바심이 생깁니다. 엄마와 일전에 약속을 하기는 했지만 지금 그 약속이 지켜질 것 같지 않습니다. 어떠한 타협점이 나와줄 법도 한데, 답답하게도 엄마는 약속을 상기시켜주면서 “안된다고 했지요”라고 말합니다. 이쯤 되면 아이는 울면서 억지를 부립니다. 이러한 긴 실랑이 속에서 아이는 마음과 생각을 키우면서 커갑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때로는 인내해야 한다는 것, 억지를 부리는 방식으로 자기 생각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구약의 어느 예언자의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발람’이라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 속에 계산도 끝났습니다. 생각을 바꿀 마음이 없으면서 하나님께 보채듯이 요구합니다. 마음 속에 조바심이 들끓어 못 견뎌 합니다. “잘 대우해 드리리다. 부디 이스라엘을 저주해 주시오”(민수기22:17)라는 이스라엘 접경에 있는 ‘모압’왕의 제안이 못내 아쉽습니다. “갈 수 없다는 것”, 모압을 가는 일에 명분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야훼께 거듭 거듭 질문하고 또 질문합니다. “모압 땅에 가야 됩니까 말아야 합니까” 모압왕이 보낸 더 많은 고관들이 찾아오고 더 좋은 제안이 거듭 반복됩니다. 조바심이 나서 못 견뎌 하는 발람, 결국 그는 모압의 고관들을 따라나섭니다. 억지를 부리게 되는 끊임없는 조바심, 이는 내 생각과 방법이 소용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조바심입니다. 어떠한 일의 결과에 대해 내 생각과 계산에 닿지 않으면 신뢰의 마음을 두지 못하는 끊이지 않는 조바심, 이 조바심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일상적인 관계 속에서도 이러한 경우를 종종 만나게 됩니다. 자신이 이미 그려놓은 그림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상황을 여기에 맞추려는 노력 말입니다. 이미 생각해 놓은 답을 품고 질문합니다. 어떠한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가고 자기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미리 마련해 둔 자기 생각을 확인 받고 지지받고 관철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의 방식과 생각을 관철하는 것에 지나친 관심을 둔 나머지 “다른 가능성의 문”을 열지 못합니다. 이러한 자신의 요구나 생각이 발휘되지 않을 때 발끈 분노의 감정을 일으키고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예수를 둘러싸고 유대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는 과연 어떠한 존재인가 그 정체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내심 예수를 경계하면서 근본적으로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그리고 있는 메시아의 상”에 부합되는지를 판가름하고 싶어합니다. “당신은 얼마나 오래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할 작정입니까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라면 그렇다고 분명히 말해 주시오.”(10:24) 그들은 마음을 졸입니다. 자신의 “그림”이 깨어질 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입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자신이 그린 그림대로여야 나타나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우려를 가지고 잔뜩 조바심하며 “당신은 과연 누구요. 당신이 메시야요 그렇다면 그것을 어디 증명해 보이시오”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예수께 신뢰의 손을 내밀거나 마음을 열어두지 않는 조바심, 자신이 미리 그려둔 그림에 걸맞지 않는다는 판단이 서면 언제라도 내칠 태세입니다. “내가 이미 말했는데도 내 말을 믿지 않는구나..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내가 하는 일만은 믿어야 할 것 아니냐” 유대인들은 예수의 말을 듣고 돌을 집어듭니다.“이 때에 유대인들은 다시 돌을 집어 예수께 던지려고 하였다”(31절)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조바심은 예수에 대한 분노로 돌변하고 잡아 내치려고 합니다. 진실을 외면하게 되는 것은 자기 옹벽이 강하게 버티고 서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이러한 사람들이 스스로 쌓아놓은 “옹벽”을 염두에 두시고, “너희가 내 말을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3)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에게 솔직하게 될 때, 자기 생각 자기 관습에 매이지 않을 때, 자기 계산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마음을 열 때, 우리는 자신이 그려놓은 색깔 그림에 짜마추어 생각하지 않고 실체를 들여다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신의 몸을 다 바쳐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예수의 삶”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 복된 사순절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보다 솔직하게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기 그림으로 덧칠된 안경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혹 내 것을, 내 그림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를 조바심하며 신뢰를 가꾸지 못하는 심성을 키워온 것은 아닌지를 아울러 살펴봅시다. 우리가 싸안고 있는 두려움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우리는 걱정하고 있는 겁니까 우리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 우리 생각이 관철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걱정인가요 우리가 설령 모든 것이 다 이루지지 않고 계획대로 안되어도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서 진실했다는 것만으로 기뻐할 수 있을 까요” 낙골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