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전의 자라남 (엡 02:20-22)

첨부 1


우리는 지난주에 교회 공동체가 성전이라고 하는 귀중한 진리를 성경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그 개념 때문에 이제 아주 이상스러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경이 사용하고 이는 말인데 성전이 자라간다고 하는 말입니다. 성전이라면 옛날 구약 시대로 돌려 생각하면 그의 돌로 만들어진 건물 아닙니까. 그런데 성전이 자라간다니 어떻게 이상한 말인가. 그것은 우리가 지난주에 이야기했던 것을 돌이켜보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이 건물이 자라 간다니, 이 건물이 갑자기 생물체가 되는가.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죠. 그러나 성전이라고 했을 때 이제는 돌로 만들어진 어떤 건물, 아름다운 건물을 만들어 놓고 이것을 성전입니다 라고 말할 수 없다고 우리가 이야기했었습니다.
이 세상 공동체에 성전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진정한 성전이 하나 있을 뿐인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그 공동체 그 교회 그죠. 여러분이 이제 교회 하면 머릿속의 개념을 우리들이다. 예수님이 만드신 그 말이 한국말로는 오해 될 수 있죠. 교회로 모인다고 하면 예배당을 교회라고 하고 여기로 모이는 것을 교회로 모이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더 정확하게 생각하면 교회로써 모인다. 그렇게 표현할 수 있겠죠. 우리가 이렇게 모이는 행위가 교회로써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건물이 교회이고 우리가 여기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모이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물론 흩어져 있을 때도 우리는 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이재 이 교회인 공동체가 어떻게 자라 가는가 하는 것을 우리한테 이야기해 줍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마음속에 품고 계신 하나의 생각입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우리 가운데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이제 실질적으로 우리 안에서 당신의 교회를 세워 나가시는 일을 하는데 이것은 예수께서 이제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지는 과정의 일입니다. 예수께서 세우시겠다고 하신 이 일로부터 예수께서 다시 오실 그 때까지의 상황을 우리가 말할 수 있다면 하나의 성전이 자라 가는 과정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시는 성전 건축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유일하게 하나뿐인 성전이며 다른 성전 건축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뿐인 성전 건축인데 그것은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교회 공동체가 교회 공동체 다운 모습으로 드러나는 일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건축의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지금 성전이란 말을 사용했기 때문에 건물이라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에 우리를 어떤 식으로 표현하고 있느냐 하면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그 위에 우리들을 세웠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 놓고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하고 이야기합니다. 이 모퉁이 돌은 대개 두 가지 중의 하나인데 하나는 가장 기본적으로 어떤 건물을 세울 때 그 모퉁이 돌을 빼내면 건물이 무너지게 되면 가장 중요한 돌이라고 해서 초석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이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실질적으로 없다면 이것은 전부다 와르르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삼손이 건물을 무너뜨렸듯이 다 무너지고 마는 거란 말이죠. 열심히 모이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빼 버리십시오. 그러면 사실상은 다 무너지고 마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중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 라는 것이죠. 이와 비슷하게 또 하나 중요한 개념은 우리에게 별로 그런 것이 없습니다 마는 이 성경이 맨 처음 상용되는 그곳에서는 맨 처음 건물을 세울 때 회랑 형식으로써 앞부분을 둥글게 아취형식으로 만들었을 때 그 형식이 아주 독특한데 거기에서 제일 가운데 있는 돌을 빼 버리면 그 마취가 전부다 무너진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런 분이 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아주 재미난 비유가 되어집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제 이 세상의 이 거대한 건물을 세우십니다. 사실은 건물을 세우는게 아니고 그의 공동체를 세우시죠. 이 세상 사람들과 아주 독특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그의 공동체로 세우시는데 만일 그 공동체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빠지면 아무것도 안 남는 그런 공동체를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해서 그가 그 공동체를 세우셨는가,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만드셔서 그의 공동체를 세우시는 것이죠. 이것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삶 전체를 드리셔야 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의 목숨을 내 놓으셔야 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이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그의 온 생애를 다 바쳐서 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작업을 하시고 실질적으로 그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일을 가르쳐서 예수님의 희생 제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 여러번 희생 제사들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장차 지금 우리들 입장에서는 이미 옛날에 일어난 일이지만 구약의 성도들 입장에서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들은 예수라는 말도 잘 몰라요. 그러나 언젠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서 죄를 속하실 것을 바라보면서 매번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까, 그 희생제사의 완성체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사를 드리셨죠. 그렇기 때문에 이제 더이상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는 성전이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사를 완결 지으셨으니까 우리는 더 이상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죠. 나중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하게 임하여 온다고 해도 더 이상 제사를 드릴 필요가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단번에 하나님 앞에 거룩한 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에 그 자신이 제사장이시고 그 자신이 제물로써 당신님 자신을 드리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제사가 필요 없게 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제단이 없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과 오신 이후의 차이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제사를 드리셨다 그랬으면 그 다음에는 제단이 있어서는 안돼요. 사람들이 어떤 장소를 정해 놓고 여기는 제단입니다. 하나님께 거룩한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 습관이 들어오는데가 있습니다. 이게 이제 우리가 기도할 때 가끔가다 그러는데 “주의 제단 앞에 모여서 우리가 이렇게 예배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그것은 은유적인 말로 사용한다면 있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사실은 여기 모인 이 곳이 제사 드리는 제단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곳에도 제단은 없습니다. 제단이 한 곳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바로 그 곳 한 곳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 전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에는 제단이 있었죠. 그래서 도 제단을 쌓아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그의 피를 흘려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실 것이다 라는 그것을 바라보는 행위였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우리가 말을 하는 행위에 있어서도 아주 주의 해야 합니다. 어디가 제단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같이 이렇게 예배드리는 행위도 제사 행위가 아닙니다. 영적인 의미에서는 제사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제사 행위가 제사장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는 그 누구도 제사장의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모든 사람이 다 제사장인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분명히 가르친 것이고 그것을 잊어버렸던 교회에 대해서 종교 개혁자들이 우리에게 아주 강력하게 말해 준 것입니다. 더 이상 어떤 사람이 제사장이 아니다. 목사님이 제사장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가 다 제사장으로써 역할을 해야 된다고 개혁자들이 가르쳐 주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제물이 아닙니다.예를 들어서 예배 순서 가운데 우리가 헌상을 한다고 하면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과 소를 제물로 드렸듯이 우리도 이렇게 헌금 하는게 제물이 아니겠는가, 그런 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성전도 없고 (건물이 성전) 제단도, 제사장도,제물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것이 우리한테 거꾸로 적용되어지면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모든 일들이 다 영적인 의미에서의 제사가 되어지고 우리가 어떤 특정한 장소에 가서 무슨 특정한 일을 하므로 써 이 예배 행위를 하므로 써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그 예기를 합니다. “너희의 몸으로 산 제사를 드려라. 이것이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이니라”너희의 몸으로 드리는 산 제사, 산제사는 산것을 잡아서 드린다는 이야기입니까 살아 있는 그 자체로 하나님께 여러분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교회 됨의 가장 기본적인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영 단번에 제사를 하셨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이제 그 일에 근거에 서 있는 우리들은 우리의 삶,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생활, 내가 매일 매일의 삶을 살고 식사하고 가서 일을 하고 하는 영적인 의미에서의 제사입니다. 그게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 받아질 수 있느냐, 우리 스스로의 사는 모습 그대로 받아 질 수가 없습니다. 아! 그건 내가 부족하니까 안 받아지죠. 어떤 사람이 열심히 노력하면 받아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에 아무리 성현이라고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이 받음직한 제사가 못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게 제사가 된다고 말합니까, 이상스러운 일은 언젠가도 이야기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번에 드린 제사의 공로로써 우리가 드리는 삶의 열매들을 예수께서 포장하신다고 했죠. 쉬운 이야기로 해서 예수께서 이것을 싸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완전함을 당신님의 완전하심으로 싸 주셔서 그것을 하나님께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주님께서 부족함을 보충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일입니다. 그 사실을 깨달으면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 그럼 됐습니다. 이제 나는 마음대로 살아도 됩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나의 부족한 것을 전부다 싸 가지고 드릴 것 아닙니까,그렇게 마음이 돌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실상 예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가에 대해서 깨달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나를 그렇게 온전하게 구원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면 와! 이건 굉장합니다. 과연 그러셨습니까 그러면 이 사람이 자연스럽게 주님을 위하여 사는 삶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으로 주의 교회됨, 또는 주의 성전됨의 기본적인 작업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오늘 강조하려고 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그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현실에서 살펴보면 ”나는 별로 거룩하지가 않은데요” 그렇게 우리가 이야기 할거고 그것은 누구라도 그렇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나는 거룩한데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말이죠. 그랬을 때 우리는 우리가 주의 거룩한 백성, 거룩한 성전이 되어진 것은 이러한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그렇게 되어진 측면이 있는 아직 아니 된 측면이 있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성전이 되어 간다” 그 이야기도 바울이 한다 이거죠. 그런데 이것은 사실상 우리 개별적으로 하는 말은 아닙니다. 이 본문을 잘 보십시오 “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서 성전이 되어 가고”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건물마다 서로 연결한다, 그런 이야기가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뭘 생각 하면서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아마 이런 것을 생각하실겁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je에서 교회가 시작되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의 교회, 공동체, 그것을 한 건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때 예루살렘교회는 건물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예배당이 없는데 였고 그 사람들은 가정집에 대개 모이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바울이 편지를 쓰면서 “글로의 집에 모이는, 또는 뵈뵈의 집에 모이는 교회에 문안할지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에 있는 교회들이 어디 모이고 있었느냐 하면 가정집에 모이고 있었다는 말이고, 그것을 교회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아주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개념을 가지고서 그렇게 예배당 건물이 있는데 만 교회라고 생각하고 그렇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그런 식으로 해서 한 공동체가 세워진 것을 바울은 뭐라고 비유했느냐 하면 그것이 한 건물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에베소라고 하는 지역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곳은 바울이 전도를 통해서 세워진 곳이죠. 그러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와 에베소에 있는 교회와 또 이러한 전도를 가능하게 했던 아주 중요한 교회, 안디옥에 잇는 교회, 나중에 이런 것을 우리가 생각할 것5입니다. 이런 교회들이 다 연결하여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면 한국에 있는 교회와 일본에 있는 교회와 미국에 있는 교회와 또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여기 바울이 사역하던 그 교회와 다 연결하여서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 간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성전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를 이야기합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이루신 그 모든 목적을 이루셨을 때부터 예수께서 재림해 오실 때까지 이루실 그 모든 교회, 그것을 성전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에 속한 한 군데 군데 예를 들어서 이것을 지역에 있는 교회, 예를 들어 여기는 답신리 지역에 있는 교회, 이것을 한 건물로 비유하는 거란 말이죠. 그래서 아주 재미있는 것은 한 공동체, 즉 호산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이것도 주님께서는 뭐라고 보시냐면 한 건물이고, 이것이 곧 성전이라고 보시고 호산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이런 모든 공동체가 합쳐져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을 생각하실 때에도 그것을 성전이라고 보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이 두 면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미 주 앞에서 성전이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부족한 모습들을 찾아내면서 어떻게 하면 과연 주의 공동체 다운 공동체가 될 것인가 우리가 주의 성정이라고 하는 그 이름에 걸맞은 것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 가운데서 그 일을 날마다 날마다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을 아주 포괄적으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 그러면 그것은 어떤 다른 사람들이 할 것인가 보다” 그럴까 봐 바울은 맨 마지막에 뭐라고 하셨나면 “너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주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것은 에베소교회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화산 교회 공동체를 행해서 바울이 이 이야기를 합니다. 저희도 하나님이 이 가운데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서 날마다 지어져 가느니라. 이 공동체가 성장해 나가는 것이죠. 이에 성전이라고 하는 것이 자라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비로소 성전의 자라남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성전의 자라남은 어떻게 해서 되어집니까 다른 일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것은 우리 각자 한 사람, 한사람이 주님께서 우리는 부르신 이 의식에 충실해 가지고서는 아 우리를 어떠한 이유로 부르셨는가 그 의식에 충실해서 사는 일 외에 이 일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아 그것은 교회 열심히 나온다고 하는 그분들이 하십시오”라고 한다고 하면 이 공동체는 세워질 수도 없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우리의 성전됨이 실현이 안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여기서 여러분들이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 그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나는 이 교회에 나온지 얼마 안되니까 나는 아니고 그런 것이 아니고 온 세상에 있는 교회를 향해서 하는 말이니까 내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나는 당연히 이 공동체 안에 포함된 것이고 이 공동체 안에서 이제 지체 의식을 가지고선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찾아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 가운데 우리가 지난주, 이번주에 걸쳐서 생각하는 우리를 거룩한 성전이라고 하셨다 라는 것을 아주 의식 있게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을 무너뜨려서는 안됩니다. 어떻게 하면 그 일을 할 것인가를 마음속에 아주 심각한 의식을 가지고 내가 이 공동체를 주의 성전답게 하기 위해서 나는 어떠한 일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생각에 마음을 많이 기울여야 합니다 이 생각을 하면서 지난 수요일날 예배 마친 다음에 여러분들에게 드렸던 말씀을 다시 한 번 드리고 싶습니다. 지지난 주에 어떤 대학생하고 상담을 하면서, 그 대학생이 어떤 교회에 나가고 있는데, 열심히 하면서 간혹 가다 이런 유혹이 든다는 거예요. 저녁 예배를 마치고 갈 때쯤이면 교회 문을 닫고 나가는 분이 목사님하고 사모님, 자기하고, 친구뿐이라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그때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별로 없고 그러니까 열심히 하는데 간혹 가다가 내가 꼭 이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다른 사람들은 주일날 아침에만 나오고 그러면서도 당당한데 나도 좀 그렇게 하면 안되겠는가, 그런 유혹이 든다는 거예요. 이게 여러분이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의 하나일겁니다. 우리가 이것을 잘 생각한다면 오늘의 본문 가운데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말씀은 우리가 이 공동체를 잘 세워 나가는 굉장히 중요한 책임을 가졌습니다. 이 공동체를 세워 나가는 일은 어떻게 함으로써 되느냐 하면, 첫번째는 이 공동체가 가르치려고 하는 성경의 원리를 우리가 잘 가르침 받는 일로써 이 일이 세워질 수 있습니다. 만일에 주님께서 이런 시간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전혀 이런 생각을 안 해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런 시간을 허락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이 뜻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에 따라서 내가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하게 되죠. 그래서 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같이 공부하고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적용하기 위해서 정해 놓은 시간들을 우리가 아주 존중을 하게 되어집니다. 그래서 그 학생이 그것을 고민할 것이 아니라 당연하게 생각을 해야 되죠. 그런데 머릿속으로는 당연하게 생각이 되는데 분위기들이 그리 가니까 “아! 나라도 꼭 그래야 되는가” 그런 유혹이 온다는 거예요. 그것은 그 학생의 유혹만이 아닙니다. 한국 교회에서 대개 교회 일이라고 하는 것은 열심히 하는 사람만 열심히 하거든요. 그게 비정상적이죠. 열심히 하는 사람들만 해요. 그러니까 그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하다가 지치면 나중에는 “내가 뭐하러 이렇게 하나” 그런 생각을 하게 돕니다. 맨 처음 이런 생각에서 출발해서 “아! 교회 공동체를 이렇게 세워 나가야지, 그래야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이룩하는 것이지”그렇게 했다 가도 자기만 하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으니까 나중에 내가 꼭 이렇게 열심히 해야 되나, 나도 남들처럼 적당히 하면 안되겠는가. 그리고 한국 사람들한테 이게 중요한 개념입니다. 남들처럼 한다고 하는 것, 그러니까 우리도 적당히 그렇게 하려고 하는 유혹을 갖게 되고 실질적으로 거기에 편승해 버립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각자가 한사람, 한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해 버린다면 이 이야기는 다 공염불입니다. 우리 현실하고는 관련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이상은 저기 있고 우리 현실은 그것을 전혀 반영할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저런 설교를 해야 하나 그게 늘 마음속에, 그러나 늘 회개하기를, 그래도 이야기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구약에 가면 그 설교자는 어떤 설교자냐 하면 짖지 못하는 개라는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때는 이것의 수준을 낮춰 가지고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그 범위 한도에서만 이야기하면 우리가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서로 편하거든요. 누이 좋고 매부도 좋고, 그런데 그러지 않고 성경이 말하는 굉장히 높은 표준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특히 새로 나오신 분들은 도대체 우리가 저것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인가, 없는 것을 우리한테 요구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을 가지기가 쉽단 말이죠. 그런 것 때문에 마음속에 유혹이 “주일날 아침이라도 열심히만 나오십시오” 그러고만 말고 싶은 유혹이 있는데 그러면 제가 뭐가 되냐면 짖지 못하는 개가된다는 말이죠. 파수꾼이 나팔을 불지 못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준비하겠느냐, 그러면서 만일 그렇게 해서 온 성이 멸망하고 나면 그 피값을 네게서 찾으리라, 구약의 선지자들도 그렇게 말씀하셨다는거죠.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나만이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공동체를 성경에서 요구하는 것처럼 이렇게 세워 놓는 이 일이 사실은 온 세상에서 이 공동체를 세우는 일입니다. 우리가 속한 이 공동체가 제대로 서야 우리가 주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를 이루는 일에 뭔가 일조를 하는 것이죠. 마음속에 이 생각을 하십시오. 이것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이게 나에게 부담이 될지 모릅니다. 그것이 내가 나 자신을 교회 공동체로써의 인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나 개인이 아니고 주님께서 거룩하게 이 땅위에 세우신 교회의 일원이라는 인식을 가지는 것이죠. 그것은 장로님이니 가지십시오, 집사님이나 가지십시오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인식을 가지고 이제 그것과 관련해서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보면 꼭 우리가 교회의 집회 참석하는 것만이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사실은 그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수단입니다. 거기서 원칙을 가르침을 받으면, 성경의 가르침을 받으면 이제 우리가 진실로 어려운 일은 그 원칙을 우리의 삶 가운데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죠. 그게 되어졌을 때 이 공동체가 주 앞에 영적인 의미의 제사를 드리는게 되죠. 그게 안되어지는 겁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열심히 잘 하는게 뭐냐 하면 그냥 회집 하는 것을 잘 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의 일이 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회에 부정이 벌어지고 이 사회의 사람들이 행하는 것과 똑같이 예수 믿는 사람들도 행한단 밀이죠.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구별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죄송하지만 광운대학교 교무차장님도 어느 교회 집사님이라면서요
그 복잡한 현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교회 회집 하는 일을 열심히 하느냐, 우리는 사살 그것도 열심히 안하니까 그것부터 문제죠. 그것을 했다고 해도 성경이 가르치신 그 원리를 우리의 구체적인 삶 가운데 드러내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전이 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명목과 실질이 다른 것이지요. 우리를 가르쳐서 교회라고 했습니다. 거룩한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름에 부합할 수 있게 우리의 삶을 드리십시다. 그래야 주의 성전이 자라나 갑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