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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전인 교회 공동체 (엡 0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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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요즘에 교회에 관해서 같이 생각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교회에 여러 가지 그리고 있는 그림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했었습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다고 하는 것을 생각한 적이 있었죠. 따라서 그리스도도 교회의 머리라고 했었죠. 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다라고 하는 그림으로부터 나오는 또 하나의 그림, 표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교회가 성전이다 그러는 표상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할 때 우리가 아주 오해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저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개념을 가지고 서로 맞추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교회라고 하면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이 예배당 건물을 대개 생각한다는 밀이죠. 거기다가 성경이 말해 주고 있는 중요한 개념, “교회는 성전이다” 그러니까 우리 머리 속에 있는 엉터리 개념과 성경의 가르침하고 이제 합하여져서 “아! 십자가에 있는 그 건물이 성전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지 않다,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오늘 분명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결코 그 어느 곳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다음에는 어떤 건물을 가리켜서 성전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성전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 본문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가장 잘 말해 주는 어떤 전환기 적인 본문이 어디냐 하면 오늘 읽는 본문입니다. 그것에는 요한복음 2장에는 분명히 성전이 있었습니다. 이 땅위에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이름을 두시겠다고 한 성전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성전을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맨 처음에는 성전이 었었던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일하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텐트에 살았거든요. 장막에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장막에 사니까 본인도 하나님 자신도 나도 내 이름을 장막에 두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해서 광야 길을 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막들을 거둬 가지고 다닌단 말이지요. 거기에 맞게끔 하나님께서 당신님을 그 장막 속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거룩한 장막이다 그래서 성막이라고 하기도 하죠. 또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이 만나는 곳이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이 만나는 곳이다 라고 해서 회막이라고도 합니다. 그 장막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우리가 구체적으로 공부를 하겠지만 그것을 다윗 때에 와서 다윗의 마음 가운데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이제 집도 짓고 살고 있는데 하나님은 계속해서 장막에 계시다고 생각을 한다는 말이요. 그래서 하나님! 제가 당신님을 위해서 집을 짓겠습니다.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교훈을 주셨지만 결국은 짓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성막하고 똑같은 개념을 가진 것이 이스라엘 가운데 예루살렘 성전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름을 두시겠다고 하신 곳입니다. 그런데 이 때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자칫 잘못 하면 하나님을 그 성전에다 가두워두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계신다고 하니까 아! 그런 가요.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곳에는 안 계시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는 말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잘못을 많이 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잘 한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어디서 하는거냐 하면 그 성전에 와서 행하는거란 말이죠. 하나님은 거기만 계십시요. 거기 가서 제가 잘 해 드릴께요. 그러나 다른 것은 간섭하지 말아주십시요.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유폐시켜 놓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성전 안에 계시겠다고 하시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성막으로 부터 생각해 보십시오. 성막에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친히 텐트를 치시고 내가 그들 가운데 있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말씀하신 거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거기만 계신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러나 나는 너희들 가운데서 너희들과 함께 진영해 나갈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해서 갈 때 내가 너희들 가운데 있겠다.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가나안 땅에 정착해 있을 때 내가 너희들 가운데 있겠다는 것은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 가운데 성막을 주시고 성전을 건축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그 의미를 상실해 버리면 실질상 그 성전은 성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겠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그런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에 대한 각성과 인식이 없이 그저 성막에 모여서 일년에 세차례 유월절 제사를 드리고 또 다른 제사를 드린다면 그것은 무의미해지는 거란 말이죠. 그와 비슷한 상황이 지금 오늘의 본문 가운데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성전으로 몰려옵니다. 그들 마음 가운데 그 성전의 참된 의미에 대한 생각들이 사라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여기서는 어떤 일이 많이 벌어지느냐 하면 여러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게 하는 즉 제사를 드리게 하는데 좀 편리하게 해 주는 여러 가지 제도들이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계 각 국에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이제 유월절에 오게 되면 성전에서 특별히 쓰는 그 돈으로 헌상을 한다든지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 자기들이 쓰는 것, 요즘 말로 하면 외환은행, 환전하는 데가 필요하게 되었다는 말이죠. 외환은행에 가서 여러분이 미국으로 가면 달러로 바꿔야지 가서 쓰실 수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성전 안에서 헌상을 하려면 아무 돈이나 안되니까 내가 로마에서 왔다. 그러면 성전 이방인의 뜰이라고 하는 곳에 그것을 바꿔주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 멀리서 오면서 소나 양 가지고 와서 제사를 못 드리잖아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소나 양을 가져다 놓고 이것을 사세요 한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대로 하나님 앞에 제대로 예배를 드리도록 도우려고 하는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장소에 임하셨을 때 여러 가지 의도에서 이지만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셨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집을,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든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성경 가운데 예수께서 화내신 유일한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막 화를 내셨어요. 얼마나 화를 내셨는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다 뒤엎으십니다. 환전상, 비둘기는 날아가고 소는 저쪽으로 나가는 그런 복잡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예수께서는 여기서 무엇인가 중요한 교훈을 해 주시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런 소란을 일으키시니까 이런 소란에 대해서 사람들은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과거의 사람들이나 현대의 사람들이나 아주 오해를 많이 합니다.
지금 제가 과거 사람들이 한 오해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보다 먼저 20C초에 어떤 한사람이 이 세상에서 제일 똑똑했다고 하는 사람, 버트란트 러셀이라고 하는 철학자 한사람이 있었는데 이 본문을 보더니 “아! 예수님이 일종의 히스테리 환자가 아니었느냐”, 예수님이 뭐 이렇게 화를 내느냐, 예수님이 뭐 그렇게 굉장히 거룩한 뜻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히스테리칼 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가, 그의 유일한 작품 “왜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자기가 예수님을 안 믿는다고 하면 내가 왜 그리스도인 일 수 없는가, 그런 책을 쓰면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일종의 오해인 것이죠. 예수께서 왜 이렇게 회를 내시는지, 왜 이렇게 분을 내시는지 오해를 합니다. 또 하나의 오해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화를 내시는데 의로운 화를 내신 것이다고 했더니 젊은이들이 “아! 예수님이 의로운 화를 내시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필요하다면 우리도 폭력을 좀 사용해야 되지 않느냐, 의로운 일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도 그랬는데 그것도 일조의 오해인 것입니다.
고대 사람들의 오해는 어떤 것입니까 고대 사람의 오해는 "예수님! 당신이 이 거룩한 성전에 와서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당신이 이런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권위를 나타내는 어떤 표적을 보여주십시오. 그래야지 당신이 왜 이렇게 소란을 일으킵니까"하고 나옵니다. 그 때 예수께서는 아주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한마디 던집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 동안에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 그 수수께끼 같은말, 그 당시에 그 말을 듣는 사람들 중에 이 말을 이해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나중에 이 일을 이해한 사람들하고 오해한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사실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죄목 중의 하나가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와서 고소하는데 이 사람이 와서 말씀하기를, 말이 조금 변형되는 것을 주의해 보십시오. "자기가 이 성전을 헐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삼일 동안에 다시 짓겠다고 했습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이야기와 사람들의 고소 이야기와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셨죠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그랬죠 나중에 사람들이 와서 고소한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이 성전을 헐겠다고 합니다. 그럼 그 죄목이 뭡니까 성전 모독죄죠. 이스라엘 백성이 아주 거룩하게 여기는 성전을 모독한 겁니다. 자기가 헐겠다고 이야기한 거란 거죠. 그래서 예수님을 기소해서 나중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게끔 하는 죄목 중의 하나로 처치합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이 말씀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오늘 본문에 22절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그랬습니다.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후에야 이 말씀을 기억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어라” 라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인가 그때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인데요. 이 성전이 무엇입니까. 그 앞에 그 깨달음을 이것을 쓴 요한은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21절에 보면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니라.” 너희가 이 성전을 헐어라 했을 때 예수는 그 헤롯대왕이 세운 그 건물을 이야기한게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야기한 그 말의 뜻은 자기가 곧 성전이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가지는 옳게 봤습니다. 일종의 개념의 변화를 예수께서 시도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까지 사람들은 전부다 그 건물이 성전인줄 알았습니다. 그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성전이 성전이 아니고 내가 성전이다 하는 이야기를 하신다는 말이지요. 그것을 알 리가 없죠. 사람들이 이해하기 참으로 어려운 말입니다.
사람들은 늘 요한복음의 특징이 예수께서 무슨 영적인 의미를 던져 주시는 것을 육적인 의미로 이해합니다. 아니 도대체 이 건물이 46년 동안 짓고 있습니다. 성전이 다윗이 준비를 하고 솔로몬이 짓지를 않았습니까, 그런 다음에 그 성전이 많이 파괴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한테 막 점령당하고 그랬을 때 다시 스룹바벨이라고 하는 사람이 다시 와서 스룹바벨 성전을 지었어요. 그런데 그것도 거의 다 파괴가 많이 되었습니다.그래서 그 당시 헤롯대왕이 다시 재건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당시 46년동안 짓고 있었는데 아직 짓지도 못한 상황이란 말이죠. 어느 정도 외곽은 갖추었지만 아직 못 짓고 있는 상황, 다 이루어지지는 않은 상황인데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이 성전을 헐어 버려라 그러면 내가 3일 동안에 다시 지으리라 그렇게 말씀하신단 말이 예요. 우리들은 46년동안 지어도 아직 못 짓고 있는데 당신이 무슨 재주로 그러겠습니까, 그렇게 이해하는거죠. 예수님은 뭘 말씀하신다고요 자기의 몸을 가리켜 말씀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예수님 자신, 또는 예수님의 몸과 성전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맨 처음 우리가 이야기했을 때 성전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했던 바를 다시 돌아가 보셔야 합니다. 성전은 그 건물이 성전은 그 건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말씀해 주신 표현 이랬죠.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그곳에 두신다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한다. 내가 너희 중에 행동하고, 가르치고, 너희를 인도할 것이다. 그것을 가장 잘 구현해 주신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아니시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이신데 우리들 가운데 오셔서 우리들 가운데서 함께 계심을 나타내 보이셨죠, 자 이것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쓰던 말 한가지를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말을 이스라엘은 뭐라고 했습니까 “임마누엘” 그랬죠. “임마”-같이한다. “누엘”-하나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게 누구세요 예수 그리스도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하심을 보여주는 가장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에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후에는 더 이상 그것을 어떤 다른 건물로 보여줄 필요가 없게 되었단 말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삶,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의 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성전이 의미하고 말하던 바를 다 구현하고 있는 거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게 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 그것은 사실상은 사람들이 성전을 헐어 뜨리는 거예요. 헤롯성전을 헐어 트리는게 성전을 헐어뜨리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하는 것, 그것이 성전을 헐어뜨리는 거란 말이죠. 사람들은 그것을 헐어뜨리죠. 그러면 하나님은 그것을 세우십니다. 예수님은 3일만에 부활하셔서 그 것을 회복하십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성전이 있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지난주 ,지지난 주에 말씀했던 것을 연결해 보십시오, 지난주에 우리는 이야기하기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는 이제 승천하신 다음에 하늘이라는 곳에 가계시지만 그곳이 어딘지 우리는 정확히 모릅니다. 어딘지는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이 말씀하신 하늘에 가계십니다. 그러나 그가 이 땅위에 당신님의 몸을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들입니다.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표현을 받게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땅위에 예수께서 계실 때 그의 몸이 성전이었다면 여러분 자신들 즉 교회가 (이 예배당 건물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들 자신들, 그리스도의 공동체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제 성전인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늘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는 이 세상에는 어“떤 건물이 성전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가도 성전은 없습니다. 예루살렘을 성지라고 해서도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예루살렘 방문, 그래야지 성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또 이 세상에 어떤 아름다운 건물을 세워 놓아도 그것은 성전이 아닙니다. 성전은 오직 여러분 자신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백성들 자신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이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스스로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를 잘 생각하게 할 뿐더러 야! 이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성전이라니 그 생각을 아주 깊이 있게 해야 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성전이라고 부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주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인 우리가 마음대로 우리들 스스로 성전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살아도 되겠는가! 오히려 우리를 성전이라고 하였으면 정말 성전 다운 모습이 우리 가운데서 드러날 수 있도록 하나님을 위해서 뚜렷이 구별되어진 그래서 하나님이 이 가운데 계시겠다고 한 그 의미가 분명히 드러날 수 있게 우리의 삶을 살아야 될 것이 아닌가, 그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를 향하여서 주님께서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함께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배드릴 때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함께 게시다 그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에 모여 있을 때나 각자 집네 흩어져 있을 때나 모두 교회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집에 가소 다 활동하고 있을 때도 호산교회 존재합니다 호산교회는 이 예배당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임 가운데, 우리의 흩어져서 활동하는 가운데 호산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전은 그 어떤 곳에서도 우리들 각자를 가리켜서 그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전체가 그 모습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인들로서 서로 관계를 가지고 살아갈 때 그게 호산교회인데 거기에서 하나님이 그곳에 계신 것이 드러냐야 합니다. 성전의 참의미는 하나님이 거기에 계신 것을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본문 가운데서 왜 화를 내셨습니까 그 의미가 도무지 드러나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 성정이 예배 의식은 행하고 제사는 드리러 오는데 그 의미는 도무지 드러나지 않을 때 주님은 화를 내십니다. 우리를 향하여서 성전이라고 말씀하시는 주님께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우리들의 관계를 통하여 우리들의 모임을 통해서 우리들 각자의 삶을 통해서 주님께서 여기에 우리들 가운데 계심을 드러내자 않는다면 주님께서는 역시 그 의로운 분을 내실 거란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그 사실을 정말 아주 심각하게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의로운 분에 분노의 대상이 되지 아니하도록 힘써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우리들의 관계 가운데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 하나님이 당신들 가운데 계시군요, 정말 그렇군요” 그것에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 공동체로써의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할 분만 아니라 더 구체적인 적용을 하나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고린도전서 6장에 있는 말씀을 보십시오. 고전 6장 19절말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서 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의 몸을 뭐라고 말하냐면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이라고 그래요. 그게 성전이죠. 그러니까 성전은 우리 각 자의 몸입니다. 각자의 삶입니다. 그게 성전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관계가 성전입니다. 이것이 성전이고 다른데 성전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것을 드러내야 합니다. 내 몸을 향하여서 내 영혼과 육체를 다 합해서 하는 말인데 그것을 성전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성전 답게 내가 드러내고 살고 있는가. “아! 그렇게 복잡한 이야기하지 마십시요” 그러지 마시고 우리가 정말 그런 뜻을 우리 가운데 드러내야 됩니다. 그럼 우리가 우리의 몸을 어떻게 사용해야 될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될 것 아닙니까 성전답게 주님 앞에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성전이라고 하는데 아 이거는 뭐 성전인지 어쩐지 잘 모르겠는 상황이면 주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구체적으로 사는 그 현장 가운데 있는 여러분들의 몸을 가르쳐서 하는 말이 그것이 성령의 전, 성전이라고 말씀이십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생활을 통하여 과연 그런 일이 드러나고 있는가, 그래서 본문 가운데서는 그러므로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씀해 주지 않습니까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내 몸을 사용해서 내가 구체적으로 성전됨을 드러내고 있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가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 각자 각자가 우리의 몸을 사용했을 때 이 공동체가 성전의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각자는 안그러는데 공동체는 성전이다, 그런 것은 성경에 하나도 없습니다. 각자 각자가 다 그런 성전일 때 우리 모두가 합해져서 성전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오늘 이 본문을 기억하십시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공동체를 향하여서 성전이라고 하십니다. 이제 이 지상에서는 어떤 건물도 성정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당을 지을 수도 있겠지요. 그것을 성전 건축이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예배당 건축, 교회당 건축 그래야 되겠죠. 우리는 그 개념을 성경이 말하는 대로 바꿔서 해야 합니다.
그런데 또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가끔가다가 예배당을 필요해서 짓는 일에 대해서 열심을 덜 내는데 참 이상해요. 성전 건축하면 열심히 하면서도 예배당 건축하면 안 그런단 말이죠. 그러나 우리에게는 진정한 성전 건축이 딱하나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이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공동체답게 잘 세워져 나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성전 건축입니다. 신약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이야기해 줍니다. 여러분이 이 일에 진력해야 합니다.이 일은 하루아침에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다음주에도 좀더 그 이야기를 하겠지만 우리가 이 일을 하려고 할 때 내가 어떠한 존재로 주님 앞에서 부름을 받았는가. 우리를 주의 성전이라고 부르신 그 뜻을 생각하시면서 우리 가운데서 그 뜻이 개인의 삶을 통해서나 우리 모두의 공동체의 삶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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