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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찬의 바른 시행 (고전 11: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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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 우리가 읽은 성경교독에서도 같은 사상이 표현되어 있었는데 오늘 성가대의 찬양에서도 우리가 주님의 집에 거하기를 원한다, 그런 이야기가 이제 나왔습니다. 오늘 성경교독을 보면 우리가 할 때 주님의 집에 있는 하루가 다른 곳에 있는 천 날보다 나으니라, 천날을 다른 곳에 있는 것보다 주의 집에 하루 있는 것이 좋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쉽게 오해랄 수가 있습니다. 아, 예배당에 나오는 하루가 다른 데의 천날보다 낫다는 말인가 그런 함의가 있는가, 그러나 거기서 우리가 벌써 벗어나야 할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교회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무슨 생각을 했었냐면 예배당이 주님의 법이 아니라고 그랬었죠. 우리는 그렇게 일고 있는데, 우리가 여태까지 무엇을 했습니까 주의 집, 성전 그런 것은 다 교회를 가르친다고 그랬는데, 그런데 교회는 무엇이라고 그랬죠 우리 자신들이라고 그랬습니다. 이 건물이 교회가 아닙니다. 이 건물이 주님의 집이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우리가 이야기한 것이 맨날 분명히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집이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들의 삶이, 그죠 그럼 결국 뭐냐 우리가 주의 집에 하루 있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주의 백성 노릇 해야죠.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 공동체가 우리 회원들의 그 모임이 사귐들이 정말 주님이 원하는 그런 모습을 드러내야죠.
그래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면 교회가 참 교회이기 위해서는 어떠한 특성들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지금 살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하게 이야기하기를 교회가 참 교회이려면, 즉, 지금이 우리의 공동체가 정말 주님이 내 교회다 인정하는 공동체이기 위해서는 첫번째 무엇이 있어져야 한다고 했어요 바른 복음이 선포되어져야 한다고 그랬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바른 복음이 선포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뭐 헌금도 하고 해도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고 그랬었습니다.
먼저 그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내가 그 교회와 관련해서 생활해 가면서 내가 내 마음속에 그리스도에 관한 바른 복음의 인식이 생겨지는가, 내 속에서 생겨져야 선포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복음을 정말 내가 즐거워하며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말로만 선포되면 말로만 하면 졸린다고 그랬잖아요. 그죠 예수께서는 이것을 말로만 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사람들이 보고 느끼게끔 하기 위해서 무엇을 제정하셨다고 그랬습니까 성례를 제정하셨다고 그랬습니다. 세례를 주고, 그래서 눈으로 보지 낳습니까 아, 우리가 저처럼 예수와 함께 죽고, 살아났다고 하는 것을 눈에 보면서 나한테도 저런 일이 있었지, 그죠 성찬을 하면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고 구체적으로 그렇게 하라고 그러셨습니다. 그것도 같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성례를 제대로 시행하고 있는가 그것이 교회의 제대로 된 표징이라고 그랬습니다.
이것과 연관이 되어서 대단히 중요한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교회가 권징을 시행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는 이야기는 뭐냐 우리가 교회는 복음이 선포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선포되는 것이죠. 문제는 이 말씀이 선포되어지면 그 말씀대로 우리가 사는 가 아닌가 하는 것을 서로 살피고 그 말씀대로 살도록 서로 권면하고, 아닐 때 징계도 하고 하는 것이 권징입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한국 교회는 권징을 거의 안하고 있거든요. 그러면 다 진짜 교회가 아니죠. 무시무시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이것을 분명히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왜 권징을 시행하라고 했는가 이것이 성찬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제대로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가 없는가를 판단하도록 하기 위해 권징을 시행하라는 것입니다. 즉 모든 사람이 성찬에 제대로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끔 인도하는 방식이 권징이라는 것입니다. 왜 성찬 그것 그냥 하면 되지 어떤 사람은 하고 안하고를 생각해야 되는가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주의 떡이나 주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주의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27절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죠. 우리가 성찬을 할 때 떡을 떼면서 이것은 우리를 위해서 찢기신 주님의 살입니다, 주님의 몸입니다 그렇게 했고, 포도주 잔을 나누면서 이것이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주님의 피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데, 그때 이것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면 결국은 그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다, 그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신다는 것은 무엇이냐 이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그냥 교회 가면 하는 것인가 보다, 그냥 1년에 몇차례씩 이것을 하는 것인가 보다 라고 그 뜻을 별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냥 거기에 들어가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적으로 왜 이것을 우리가 행하는가 결국은 왜 행합니까 우리가 여태까지 몇 주일 동안 생각해온대로 주님과 나와 그 생명 적인 관계를 말해 주기 위해서, 그죠 나는 그냥 살지만 나는 그냥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 적인 관계를 가지고 살게 된다, 우리가 밥을 먹어야 살듯이 우리 영혼이 주님과의 관계성 가운데에서 그것이 내 영혼의 음식이고, 자양분을 공급해 주는 것이고 내 영혼을 상쾌하게 해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일을 행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몸이다 해서 한 떡에서 참여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생각하면서 내가 이것을 깊이 있게 생각하고 그 뜻이 드러나게끔 해 내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것을 행하면서 그 뜻을 별로 생각하지 않으면서 행한다든지, 아니면, 뜻을 생각하면서 행하긴 행했었는데 그 다음에 우리의 공동체 모임 가운데에서 그것이 잘 드러날 것 같지 않으면 지금 한 몸이라고 해서 한 몸에 참여했는데 실제적으로 살아갈 때는 한 몸이 아니라는 이야기지요. 그러면 그것은 결국 무엇이 되느냐면 주님의 몸과 살을 범하는 죄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그것을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느냐면 “너희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국민학교 학생들이나, 중고등부 학생들은 흔히 그런 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배당에 나오다가 저런 사람이 있으니까 안 나와야겠다, 흔히 그런 생각을 가질 수가 있는데, 결국 한 몸이라고 하는 성격이 안 드러난거쟎아요. 그걸 굉장히 의미 있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거 그래도 되는 것인가 그러면 안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지금 이 고린도교회에는 구체적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성찬을 하는데, 우리와는 다른 한가지 양식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찬을 다 대개 미리 준비해왔는데, 이 분들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각자가 성찬에 사용할 것을 다 가져 왔었습니다. 옛날에 다 그렇게 했었습니다. 성찬을 할 때 가져올 것을 다 가져온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도 가끔가다가 늦었는가 어쨌는가 잘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안 오니까 자, 그럼 우리가 먼저 시작하자, 그래서 자기가 싸온 것을 먹어요. 도시락 싸와 가지고 자기들이 먼저 먹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간이 없어 늦게 오니까 못 먹고 어떤 사람들은 많이 가져와서 많이 먹으니까, 포도주도 많이 먹으니까 술취하고, 진짜로 그렇지요. 예를 들어서 한 번 보십시오. 21절-그러한 일이 실제적으로 교회 안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한몸도 아니고 같은 먹을 수 있느냐 싸우고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칭찬할 수 없노라, 바울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구체적인 문제를 볼 줄 알아야 됩니다.
아, 이런 것들을 바라보면서 요 비슷한 기준으로 바울이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를 바라봤을 때 뭐라고 이야기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이 주의 만찬에 대해서, 즉 교회에서 행하는 이런 예식들에 대해서 별 의미 없이 임한다든지, 의미 있게 임하였다고 할지라도 그 결과가 삶 가운데 드러나지 아니하면 그것이 결국은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느냐 하면,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결과를 나타냅니다. 무시무시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행하는 거냐면 우리에게 은혜를 나누어주기 위해서 행하는 것이거든요. 은혜의 방편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사림들한테 무시무시한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고 죄를 짓게끔 하는 결과를 결과적으로 나타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고린도교회에는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한번 보십시오. 30절-“잠자는 자”-예배 시간에 조는 자가 많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성경 가운데에서 잠자는 자, 그 이야기는 뭡니까 죽은 자들,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사람들, 그러니까 함의가 뭐냐면 약하게 되고, 병들데 되고, 죽게 되는 일이 성찬을 잘못했기 때문에, 자기의 죄를 먹고 마셨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도 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또,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 가운데 병들고 약하고 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런 것 없습니다. 바울이 그 이야기를 하는 것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고린도교회 상황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약하고 병들고 죽은 사람도 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즉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느냐 이것은 모든 병의 경우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경우에는 주님께서 거룩하게 여기는 것을 정말 거룩하게 여기지 안을 때 주님은 거룩하다고 그랬는데, “아이 주님, 그게 뭐 거룩하겠습니까” 말로는 그렇게 안하죠. 실제적으로 거룩하게 여기지 않을 때 결과적으로 이런 일이 발생했던 결과들이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왜 이렇게 주님은 하게 하셨는가 주님의 중요한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그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잘못하면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이야기이죠. 우리가 자녀들이 잘못하면 그냥 내버려두지 않죠. 징계를 합니다. 히브리서에서도 그 말씀에 근거해서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생자일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징계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여기에 약하고 병들고 한 사람이 있다면 그게 우리 사이에 약하고 병든 사람이 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살면 우리가 죄악의 구조 가운데에서 살기 때문에 온전하게 살아도, 그래도 죄악의 구조 가운데 나타나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우리 가운데 임할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때 욥처럼 굳건하게 우리가 그것을 이겨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간혹 가다가 이러한 일이 발생할 구도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러니까 경우가 다 다르기 때문에 일반화하면 안됩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한테 와서 뭐라고 합니까 야, 네가 죄를 범했으니까 이렇게 당하고 있지, 이 따위로 이야기하는 사림이 있죠. 친구들이 와서 위로한다고 하면서 이들이 신앙이 있는 사람들이겠죠.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한다는 말이죠. 이렇게 일반화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마다 경우가 다 다르기 때문에, 뭐 한꺼번에 다 몰아가 지고 이건 이래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거지요.
그러나 또 그런 경우는 아예 없다, 그것도 또 문제입니다. 그런 경우가 또 있는 것을 고린도교회의 경우를 통해서 봅니다. 왜 그렇게 됐을까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징계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 징계는 하나님이 매번 너 잘못하면 저 잘못했지, 매번 이래요 우리들이 아이들을 야단칠 때 아이들이 잘못한 만큼 뭐하지 않죠 하나님의 징계는 형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맨날 그대로 갚으시면요, 벌써 여기 있지 않았어요. 벌써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그리고 사실은 우리는 형벌을 안 받습니다. 예수님이 그 형벌을 다 받으셨죠. 내가 예수님을 믿는 한. 그런데 간혹 가다가 주님께서 우리가 잘못하면 그 우리가 잘못한 것에 비례해서가 아니라 조금씩, 거기에 비례하면 아무것도 아닌 징계를 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보면서 아,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니까 이런게 있구나 하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결국 이런 것이 무슨 이야기냐 하면 우리가 그런 경우들을 통해서 우리의 실수를 살피게 됩니다. 아, 나 스스로의 삶을 살피고, 내가 그 교회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는가를 살피고 하는 것을 통하여서 왜 그렇게 하려고 하느냐면 맨 마지막 순간에 죄 정함을 받지 않게끔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32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32절-죄 정함이라고 하는 것은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정죄 하시는 거예요. 그것을 언제하시냐면 최후의 주님의 심판의 날에 하실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때에, 그렇죠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받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미리 주님의 죄 정함을 받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것을 안 할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살펴 가면 됩니다. 그 판단하는 권리를 누구한테 주셨느냐 하면 우리 스스로에게 주셨다는 거지요. 그래서 성격 가운데에서 우리에게 해 주는 말 가운데에서 제일 중요한 말이 무엇이냐 하면 “스스로 판단하라” 그런 말입니다. 너희 스스로를 살피라, 그리고 난 다음에 성찬에 참여하여라 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스스로를 판단하는 기준을 찾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어디에 있느냐면 성경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혼자 읽을 때에도 이것이 우리에게 판단의 기준을 설정해 줍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한국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옛날에 서구 교회에서도 성경을 우리의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거울 앞에 가면 여러분의 얼굴에 검뎅이가 묻어 있는지, 뭐가 잘못되어 있는지 그게 드러나지 않습니까 그처럼 우리가 우리의 스스로의 기준을 갖고 딱 생각하면 우리 잘못한 것 없죠, 내 기준을 가지고 했으니까. 그러나, 우리의 기준은 뭐냐 성경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알려주는 것이 이 설교 시간에 하는 것이라든지, 교회에서 이렇게 말씀을 선포 해줄 때 그것이 기준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 기준의 잣대를 가지고 우리가 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정말 우리가 주님의 성찬에 은혜롭게 참여할 수 있는 것이고, 원래 그렇게끔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하고 마지막 날에 최후의 심판에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왜 우리는 매번 우리 스스로를 살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스스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한 몸이기 때문에 혼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다 각자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양심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각자가 주님 앞에 가는 것입니다. 양심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각자가 주님 앞에 가서 갈 수가 있는 거란 말이지요. 여러분이 판단했을 때 잘못했다고 와서 교회의 목사님한테 와서 하나님 앞에 제가 이러이러한 것을 잘못했습니다, 그렇게 고하실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지요. 그냥 여러분 스스로가 잘못했다고 인정하면 됩니다. 옛날 캐토릭 교회에서는 성찬을 하기 위해서는 목사님한테 가서 즉, 신부님한테 가서 내가 이러이러한 잘못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야만 해요. 그걸 해 놓은 다음에야 비로소 성찬에 참여할 수 있게 해 놓았단 말이지요. 나쁜면이 있습니다. 왜 우리 양심의 주인은 어떤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신부님들이 우리의 양심을 지켜 주는 그, 이 시대의 양심이 아니에요. 목사님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양심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뿐 이십니다. 그러니까 각자가 스스로를 살펴서 주님 앞에 이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또 교회가 서로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로가 좀 살펴 가지고 이렇게 믿음의 길로 나아가지 않을 때 알아서 하십시오, 당신이 알아서 하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서로 돌아보도록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 책임을 어디에서 주고 맡느냐 하면 당회에서 주로 맡습니다. 당회가 그것을 위해서 그래서 성도들이 신앙 생활을 잘 안해나갈 때 그것에 대해서 하게 끔하고, 안할 때에는 벌이라도 가해서 하게끔 하는 것이죠. 옛날에 이 말씀에 충실할려고 하였을 때에는 요한 칼빈이 종교 개혁을 일으켰을 때 제네바에서는 사람들이 잘못하면 당회에다 갖다 좋고 막 야단을 치는 거에요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도록 우리가 다음 주에 이제 교회에 세운 일꾼들에 대해서 공부할텐데 그 중에서 장로님들은 뭘 하느냐면 주일날 선포되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이 맨날 생활에 적용을 하면서 살고 있는가 그것을 살펴보는 일을 합니다. 그것이 심방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제네바 교회에서는 심방을 누가 했느냐 하면 장로님들이 주로했습니다. 장로님들이 하다가 아, 우리가 하다가 안되니까 말씀을 가르치는 분들이 좀같이 좀 해 주십시요. 그래가지고 서는 목사님도 같이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장로님들이 심방을 했다는 말입니다. 심방을 하는 목적이 뭐예요 사람들이 정말 이렇게 선포되어지는 말씀에 따라서 살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살피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 그 일이 왜 일어나지는 겁니까 우리가 교회에서 중요한 일이 하나님의 복음이 말로 선포되고 그 다음에 그것이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선포되는 성찬을 행하고 하는데, 그 성찬을 행할 때 제대로 참여할 수 있도록 그것을 돌보는 일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말씀의 선포, 성찬, 또는 성례의 시행, 그리고 권징의 시행이 다 따로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한 묶음입니다. 그래서 서로 맞물려서 돌아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중요시해야 합니다. 이것이 있는 교회는 참 교회라고 말씀하신다, 이거죠. 이것이 제대로 안 행할 때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행할 수가 있습니다. 그 시대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게 어디냐면 구약의 사사기입니다. 그때는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 행하더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렇게 되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기본적인 것이 뭐냐 하면 각자가 판단해서 알아서 해야 합니다. 그것이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잘못되어지면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서 내 기준을 설정해서 하게 되면 그게 문제란 말이지요. 그래서 마음속에 이 생각을 하시면서 주의 교회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주의 교회 다운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이는 목적이 뭡니까 교회에 모이는 목적은 기본적으로는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한 것이죠.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하니까 드리는 것입니다.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입니다. 그 외에 어떤 다른 일이 교회에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주님께 경배하는 일인데, 경배는 왜 하는가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만,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그 경배한 자로서 우리의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삶에 그 경배의 모습들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모이는 것이란 말이죠. 그런데 그게 우리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성찬 가운데에서 한 몸이라는 것이 나타났으면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 그것이 한 몸임이 드러나야 되고,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백성임이 구현되어져야 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바울이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야기해 준 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우리도 이것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들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그저 아, 교회 나가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보다, 그 정도로만 멈추어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제 몇 주간에 걸쳐서 교회의 교회된 표징을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교회를 참 교회되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놓쳐 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노력을 해 가지고서는 물론 우리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것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이것을 이루어 나가게끔 마음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노력을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성령께서 그런 마음을 주실 때 그렇구나, 내가 이것을 이루어 나가야겠다, 하는 마음에서 이것을 이루어 나가야 교회로서 서는 것입니다.
성찬을 행할 때 사람들이 스스로를 판단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왜 이렇게 하라고 하느냐면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스스로 판단하고선 내가 주님께로 한번 돌아섰잖아요 그런 다음에 사람들은 맨날 잊어버립니다. 마치 거울을 보고 자기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잊어버리는 거와 같습니다. 맨날 잊어 버려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꾸만 행하도록 했습니다. 성찬을 얼마나 자주 행해야 되는가 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제네바 교회에서는 이 말씀을 보니까 워낙 초대 교회 때 매주일 행했으니까 매주일 행하게 되요 그래서 이 말씀에 따라서 제네바 교회에서 매주일 행하라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반대합니다. 왜 반대하는가 이것을 매주일 행할려면 자기 스스로를 매주일 살펴야 되잖아요 안 그러면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신다는 무시무시한 일이니까 매주일 할 필요가 있을까요 하도 반대하니까 이것을 좀 절충을 해 가지고서는 제네바 교회에서는 한달에 한번씩 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것을 잘 생각을 하셔야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기준이 어디서 찾아 나와야 되느냐 우리의 전통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번 교회에 관한 것들을 어깨 너머로 배운단 말입니다. 교회에 가니까 이런 식으로 하더라, 그래서는 안되고 성경 가운데에서 뭐라고 하는지를 배워나가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거에 따라서 우리가 규정을 해야 됩니다. 따라서 이 성찬을 얼마나 자주 행해야 할 것인가 그 성찬에 참여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이렇게 권장 하는 일들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 하는 것들도 우리는 성경 가운데에서 배워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원리에 충실해서 장노님들이 당회에 모여서 아, 우리 교회는 1년에 몇 번을 성찬을 행합시다, 하는 것들이 결정이 되겠지요. 아, 우리가 매번 행한것이 있는데, 그것대로 하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잘 생각을 하시고 주님의 뜻이 이것을 행하도록 하신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보시면서 여러분들이 “ 참 답답한 사람들”, 그런 생각이 들죠. 아, 그 주님의 귀한 만찬을 먹으러 와 가지고서는 다 나뉘어지고 말이죠. 이것 뭐하는 것들인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 가운데에서 생각되어져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일에 참여하고 난 다음에 정말, 아 주님께서 우리를 주의 백성으로 어떻게 부르신가 어떻게 하도록 하신가 이 인식이 딱 서 가지고 그 다음에 각자가 흩어져서 자기의 삶의 처소에서 정말 주의 백성답게 행하고 그리고서는 또 주일마다 모여서 주의 앞에서 이 축제를 벌이고, 이게 어떤 축제냐면 하나님의 나라가 극치에 임했을 때 임할 축제가 우리가 맨날 앞당겨 쓰는 것이란 말이죠. 앞당겨 축제를 벌이고, 또 그 말씀에 근거해서 또 주님 앞에서 열심히 하나님 백성답게 살고, 저는 교회에 대해서 생각할 때 늘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되야 된다는 말이죠. 고 원리대로-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 원리들을 이제 교회에서 배워나가야 한다는 말이죠. 그죠 그런데 이 원리들을 배우기에는 시간들이 너무나 없어요, 사람들이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주로하는 이야기가 뭐냐면 해도 해도 안 나오니까 맨날 오십이요, 오십이요, 그러다가 시간 다 사죠. 그래서 하는 본래의 일은 다 제쳐놓고 딴 일을 하는 겁니다. 딴 일을 하는 건가 일단 또 와야 배우니까 자꾸 오십이요, 그 이야기하다가 시간 다 가 버리고 뭐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고린도교회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그 교회 다 해산해 버리지,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도 이 답답한 사람들, 사실 여기 이 문제 뿐만 아니라 고린도교회에 아주 복잡한 문제가 많거든요.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도 뭐라고 하느냐면 “형제들아”, 그러니가 우리가 문제가 많아도 바울이 형제들아, 그럴 거예요, 그렇죠 형제들아, 그 소리를 들었으면 그 다음에는 그 소리에 맞게끔해야 됩니다. 또, “주안에서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성도들아,”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향해서도 그럴 거예요. 우리가 문제가 많지만, 주님이 원하는 대로 아직 우리가 구현해 내지 못하지만 그래도 우리를 향하여서 성도들아, 그렇게 하시면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족해도 우리가 그 일을 이루어 내기 위해서 우리의 최선을 다 행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다짐하시고 그 모습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이죠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어디서 구현되느냐 하면 사실은 여러분들이 사신데 서 교회가 구현되는 것입니다. 그게 주님의 집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시는 것만이 주님의 집에 있는 것이 아니에요. 요것은 반입니다. 반도 안될지 몰라요. 그러니까 내가 주일날마다 예배에 다 참석을 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집에 있는 것의 반은 어디에서 행하는 것이냐 여러분의 가정, 여러분의 직장에서 여러분들이 정말 이렇게 참여하는 사람다웁게 구현해낼때 그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호산) 교회는 여러분이 퍼져나가면 퍼져나간만큼 이것이 (호산) 교회입니다. 그죠 요 공간만이 호산교회가 아니라.
여러분이 가서 얼마나 하나님 백성다웁게 그 나라의 영향력을 드러내면서 사는가 그래서 교회의 영향력이 있는 것이란 말이죠. 우리가 그것을 안 행할 때, 우리가 이렇게 모일 때는 좋은데, 교회로서의 영향력이 이 세상에 하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구체적으로 일하는 처소 가운데에서 정말 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영향력이 드러나는가 그리고는 앞으로는 우리가 정말, 이렇게 자연스럽게들 다 모이기 때문에 다 모여서 우리가 이제 구체적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그런 것들을 또 잘 교훈을 받아 나가고, 그것을 실현해 나가고 그런 우리 교회의 모습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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