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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리고를 무너뜨리는 믿음 (히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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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치인도 연예인도 아니면서 개인 홈페이지 방문의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한 자매의 이야기를 이미 접하신 분들이 적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자매의 홈페이지는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름 이지선, 생일 1978년 5월 24일(그리고 또 하나의 생일을 기록하고 있는데 2000년 7월 30일) 혈액형 0형, 사는 곳: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갈산동 샘마을 쌍용 아파트 205동 303호, 종교:믿음의 집 교회, 학교:서울 둔촌 국민학교, 세륜 국민학교, 서울 오륜 중학교, 창덕 여자 고등학교, 이화여자 사범대학 유아 교육과(97년 입학, 2001년 8월 졸업) 이미 국민일보에도 그 간증이 소개된 것처럼 그녀의 이야기는 2000년 7월 30일 KBS뉴스 광장 앵커의 다음과 같은 뉴스보도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어젯밤 11시 30분쯤 서울 한강로 1가에서 서울 후암동 마흔 두살 김모씨가 만취상태에서 갤로퍼를 몰다가 마티즈 승용차등 6대와 추돌 했습니다. 이 사고로 마티즈 승용차에 불이 나서 차에 타고 있던 경기도 안양시 갈산동 23살 이모씨가 온 몸에 2도(사실은 3도 화상)의 중화상을 입고 인근 병원으로 긴급 후송 되었습니다. 경찰 조사결과 갤로퍼 승용차 운전자 김씨는 혈중 알콜 농도 0.35%의 만취상태였습니다.

이 사고로 꿈이 많았던 아름다운 자매, 교회 찬양 팀에서 찬양 부르기를 좋아했고 얼굴도 고왔던 이 자매는 계속되는 피부이식 수술로 턱도 없어졌고 등도 굽어져 척추엔 압박 골절이 생겼고 고개를 들고 앞을 보는 것조차 불가능해졌습니다. 사고 이후 처음 의식을 회복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의식한 자매는 산소 호흡기로 목을 눌러 산소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죽음을 시도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빠, 나 어떻게 살아, 나 죽여 줘라고 외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다만 처절한 목소리로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을 노래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 초기에 우리는 종종 믿음이 우리의 모든 고통을 예방하고 해결한다고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상은 우리의 그 좋은 믿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여정에는 우리의 생각으로 예측하지 못하고, 우리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난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여리고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새 지도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믿음으로 이 여리고를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오늘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혹은 민족적으로 또다시 여리고를 경험하고 있는 우리들이 배워야 할 여리고를 무너뜨리는 믿음, 도대체 이 믿음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여호수아 6:1-2에 보면 하나님의 약속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더라.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여기 1절의 굳게 닫혔고라는 표현은 이 여리고 성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얼마나 심리적으로 공략 불가능의 성으로 보였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28은 이스라엘 정탐꾼들이 보았던 바로 이 여리고 성에 대한 묘사였을 것으로 보여 집니다.--그 성읍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라고 보고합니다. 신명기 3:5에도 그 모든 성읍에 높은 성벽이 둘러 있고 문과 빗장이 있어 견고하며라고 기록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이 성읍의 점령은 처음부터 승산이 없는 도전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읍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성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 이상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천지는 변해도 내 말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그 약속이 아닙니까

성경은 약속의 책이며 성경의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흑인 교육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부커 와싱톤(Booker T. Washington)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고 노예 해방이 선언된 후 자기를 고용했던 백인 주인을 찾아가 빚을 갚습니다. 주인이 놀라 아무도 다른 흑인은 그런 일을 안 하는데 그만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를 물었을 때 두 가지 대답을 합니다. 첫째는, 빚을 갚지 않고는 참으로 자유할 수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자기가 믿는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며 그의 약속의 말씀을 따르는 인생만이 참된 자유의 인생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부커 와싱톤의 믿음-이것이 그로 하여금 흑인은 교육이 불가능하다는 당시의 신화에 도전하게 만든 비밀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믿음으로 여호수아도 불가능한 여리고 정복의 숙제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과 제가 동일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도 오늘의 여리고를 무너뜨리는 도전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오늘 내 인생이 불가능의 벽에 부딪쳐 있다고 느끼십니까 성경을 열고 당신을 위해 예비된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이 말씀을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으로 신뢰하고 주장하십시오. 그때 당신의 여리고는 무너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알고 믿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순종하는 행동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구체적인 지침을 말씀하십니다. 남은 것은 순종입니다. 그런데 이 지침이 내 이성으로 판단했을 때에 매우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보여도 순종하시겠습니까 아니 순종을 명할 바에는 이성적인 순종을 요구하실 것이지 왜 비이성적인 순종을 요구하실까요 그것이 바로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인 순종이라면 믿음 없는 사람도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성을 넘어선 순종은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독교 신앙을 비이성적인 것으로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기독교 신앙은 결코 비이성주의나 반 이성주의는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보다 더 초이성적인 신앙입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신앙은 이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하나님은 이성과 상식의 판단을 넘어선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순종은 결국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순종을 요구하셨나요 여호수아 6:3을 읽어 보십시오.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칠일에는 일곱 번 돌라는 것입니다.(4절) 아니 성을 공격함이 나니라 성을 그냥 매일 한번씩 돌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돌지 않고 돌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하여 결국 여리고 성은 무너졌습니다. 성을 돌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순종이 무너뜨린 것입니다. 오늘의 성도들의 무기력한 패배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약속의 말씀을 몰라서 일까요 아니지요. 오늘의 성도들은 다른 어떤 시대의 성도들보다 지식과 정보의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지나치게 성경말씀을 알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순종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순종입니다. 참된 믿음은 약속의 말씀을 순종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 순종할 때 우리의 여리고는 무너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을 바라며 침묵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리고 성을 도는 동안 흥미있는 한 가지 명령을 추가하셨습니다. 무엇입니까 여호수아 6:10을 읽어보십시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곧 행진하는 동안에 침묵을 명하신 것입니다. 왜 이런 침묵의 명령이 필요했을까요 두 가지 가능한 추측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침묵이 명해지지 않았다면 백성들 사이에 얼마나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번져 갔을까요 야, 우리가 돌아서 여길 돌고 있냐. 이렇게 돈다고 글쎄 이 성이 무너지겠나 틀림없이 이런 부정적인 메시지는 쉽게 동조자를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침묵의 시간에 약속의 말씀을 묵상하며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소원하신 까닭이었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진지하게 영성을 추구한 모든 신앙의 선배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신앙훈련의 하나가 바로 이 침묵의 훈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런 진지한 침묵 속에서 우리는 침묵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라 맥로린이라는 분은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는 패스워드가 바로 침묵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시대 영성 운동의 스승인 리챠드 포스터는 그의 책 기도에서 어느 믿음의 할머니의 명언을 이렇게 인용합니다. 침묵의 한 복판에는 매우 고요하고 매우 평화로우며 매우 침착한 주님이 계시다고. 주께서는 이런 침묵의 행진으로 우리가 주님과 동행함으로 인생의 여리고를 깨뜨릴 것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충분히 침묵했을 때 주께서 우리에게 소리를 치라"고 말씀하실 때 그 소리야말로 믿음의 소리일 것을 그는 아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내는 소리들은 과연 믿음의 소리일까요 아니면 의미 없는 헛된 소리들일까요 그렇다면 이제 침묵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의 임재를 경험하십시오. 그리고 주께서 명하실 때 믿음의 소리를 선포하십시오.

저는 오늘의 메시지를 지선 자매의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지선 자매의 이야기를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 결코 비극의 이야기이어서가 아닙니다. 이 사고 후에 지선 자매는 그녀의 새로운 인생을 지선의 주바라기라고 부릅니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이 참담한 상황에서 주를 바라보게 했을까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자매는 상당한 침묵의 시간을 지난 후 비극을 넘어서서 믿는 자들에게는 용기와 격려를, 안 믿는 이웃들에게는 이제 복음을 선포하는 전도자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홈페이지에 이제 그녀의 장래희망을 희망을 전하는 선교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매는 구체적으로 상담심리학을 공부해서 아픔이 있는 분들을 위로하고 치료하는 꿈을 갖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자매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저를 잃음으로 더 많은 사람을 가슴으로 안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고난이 아니면 얻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구나 나름의 크고 작은 아픔을 안고 사는 이 세상에서 그런 아픔을 나누고 또 그것이 치유 받아야 할 아픔이라면 치유 받도록 도와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 자매는 자신의 여리고를 무너뜨린 승리의 고백을 이렇게 나누고 있습니다. 이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저는 처음에 오빠가 저를 구해낸 것이 실수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실수가 아니었음을 우리 하나님께서 계속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미 제 안에서 시작하신 일을 끝까지 이루실 것으로 믿습니다. 이전의 저였다면 믿지 못할, 다 이해하지 못할 평안을 맛보시게 하시는 분, 이 모습이라도 행복을 느끼게 하시는 분, 이전보다 더 크고 풍성한 것들을 알게 하시고 느끼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소망합니다.

자매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되고, 자매의 믿음이 또한 우리의 믿음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설교 적용 질문>

1. 여호수아 6:1-20을 읽고 여리고를 무너뜨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이 무엇이었는지 정리해 보십시오.

2.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지 나누어 보십시오.

3. 내가 꼭 순종함으로 실천해야 할 것을 못하고 있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4. 나의 신앙생활에서 교정되어야 할 언어생활에 대하여 나누어 보십시오.

5. 본문에서 나에게 적용되어야 할 교훈을 정리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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