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요 02:1-11)

첨부 1


잔칫집엔 손님이 많아야 하고 음식이 넉넉해야 하고 흥겨움이 있어야 합니다.

손님은 많은데 음식이 모자란다든지,음식은 많은데 손님이 적다든지,손님도 음식도 많은데 둘러앉아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패잔병처럼 앉아 있다면 즐거운 잔치는 아닐 것입니다.

가나 지방 어느 집에서 있었던 결혼식 잔치에는 손님에 비해 음식이 모자랐던 것 같습니다.

본문 3절을 보면 “포도주가 모자란지라”고 했고,3절 끝에서는 “포도주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 그 집도 처음부터 음식이 모자라진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포도주도 음식도 넉넉했을 것입니다.그러나 잔치가 계속되는 동안 모자라기 시작했고,결국은 떨어지고만 것입니다.

우린 이 사건 속에서 우리 시대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삶이라는 것도 백일 잔치나 돌 잔치로 시작해서 결국은 장례식으로 마치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포도주를 약용으로,음료로,때론 제물이나 예배용으로 사용했습니다.잔칫집에 포도주가 모자라다가 떨어졌다는 것은,마치 꼭 있어야 할 것들의 상실과 결핍과 품절 때문에 삭막해져 가고 있는 우리 시대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참 만족이나 참 기쁨이 없습니다.모두가 욕구 불만으로 지쳐 있고 긴장해 있습니다.

양심도 무디어졌고 도덕심도 땅에 떨어졌고 윤리성도 바닥이 나버렸습니다.마치 호세아 시대처럼 진실도 인애도 사랑도 공의도 다 메말라 버렸습니다.

저는 과학도는 아닙니다만,과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바다의 수면 즉,물 높이가 점점 높아져 가고 있다고 합니다.이유는 우산과 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는 오존 층의 파괴로 기상의 이변이 도처에서 일어나면서 빙산이 점차 녹아 내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지구가 바닷물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결국은 지구의 어느 부분이 터지거나 갈라지게 될 공산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지구의 종말도 자연의 역학 작용에 의해 그 수명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인구의 폭발,자원의 고갈,인간성의 상실 등을 들면서 종말을 강력하게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새로운 출구와 해결의 길을 밝히려고 합니다.

 1.철저히 떨어져야 길이 열립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가나 혼인 잔칫집의 경우 모자라다가 떨어지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만일 어느 정도 포도주가 남아 있었다면 그날 그 집에 모인 사람들은 주님이 만드신 포도주를 맛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떨어졌기 때문에 새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고 그들은 그것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한 개인이 지니고 있는 신앙의 경우도 “나에게는 약간의 신앙이 있다”고 자부하거나 생각하는 경우가 더 어렵습니다.

성경이나 기독교 진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보다 성경이나 기독교 진리를 약간 아는 사람들에게 전도하기가 더 어려운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 집을 짓는 것보다 헌 집을 뜯어 고치는 것이 더 어려운 이치와도 흡사합니다.

자신이 죄인 임을 50퍼센트 인정하면서 또한 자신의 의(義)를 50퍼센트 인정하려 드는 사람은 구주이신 주님 앞에 서기가 어렵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날이 새면 바다에 나가 고기 잡고 밤이면 처자식과 함께 평범한 삶을 누리던 베드로에게 무슨 죄가 그리도 많았겠습니까 그가 역적 모의를 했겠습니까 모리 협잡(謀利挾雜)을 했겠습니까 부정 축재로 재산을 모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완전한 100퍼센트 죄인으로 고백했습니다.

내가 만든 포도주가 완전히 바닥 나야 주님이 만드시는 새 포도주가 항아리에 차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그리고 내가 만든 낡은 포도주와 주님이 만드신 새 포도주를 섞으려고 해도 안됩니다.

 2.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해야 합니다.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먼저 안 것은 마리아였습니다.그녀는 이 사실을 먼저 예수님에게 알렸습니다.그리고 하인들에게 주께서 너희에게 무슨 말 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실을 주님이 알고 계시느냐 하는 것입니다.다시 말하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일과 이 사건을 마리아처럼 주님에게 말씀드렸느냐 하는 것입니다.

누군들 그 일,그 사건이 없겠습니까 그리고 가나 혼인 잔칫집에 포도주 떨어진 것보다 더 절박하고 답답한 사정이 누군들 없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실을 주께 말씀드렸느냐는 것입니다.

본문 7-8을 보면 주님이 돌항아리 여섯에 가득가득 물을 채우고 그리고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명령을 받은 하인들이 선뜻 순종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비상식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그 집에 있었던 6개의 돌항아리는 식사 전후에 손씻고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 발씻기 위해 사용할 물을 담아 두는 항아리였습니다.다시 말해 포도주 용기가 아니었습니다.그것은 마치 발을 씻고 손을 씻는 세수 대야에 고깃국을 담는 비상식과도 같은 것입니다.

둘째는,비과학적입니다.

포도주는 잘 익은 포도로 담습니다.그 당시에는 포도주 공장이 없었기 때문에 각자 집에서 적당한 방법으로 담가서 사용했습니다.그러나 공통된 한 가지 원리는 포도주는 포도로 담그다는 것입니다.

순수한 물(H²O)만으로 포도주를 만든 사례는 요한복음 2장 사건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습니다.

하인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찾아보았지만 포도주를 담글 포도는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그리고 포도주란 당장 되는 것이 아닙니다.

포도를 깨트리고 짜서 그 액체가 상당 기간 동안 발효되도록 보관해야 됩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비상식적이고 비과학적인 방법으로 포도주를 만들겠다고 하인들에게 명령을 했기 때문에 선뜻 순종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셋째는,연회장에 갖다 주라고 했지만 믿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물로 된 포도주를 떠다가 주지 않었더라면 포도주로서의 가치가 드러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주경가는 하인들이 떠서 가지고 가는 동안에 포도주가 되었다는 해석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인들의 입장에선 이것이 정말 포도주일까,괜히 떠다 주고 핀잔이나 받지는 않을까 등의 회의나 염려를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상식이나 과학적인 사고라는 것들이 그다지 위대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진흙탕에서 피어나는 연꽃 색깔은 진흙탕 색깔이어야 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푸른 풀을 먹고 사는 소에게서 짜내는 우유는 푸른 색깔이어야 그것이 상식입니다.

죽음도 나이 많은 사람에게 먼저 임하고 젊은이는 나중에 죽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엔 비상식적인 것들이 더 많습니다.

더욱이 성경 안에는 상식과 과학을 초월한 사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던 사건,40년 동안 굶어 죽지 않고 광야를 횡단했던 사건,하룻밤 사이에 창 한 번 던진 일이 없었지만 이스라엘을 쳐들어왔던 앗수르 병사 18만 5천 명이 떼 죽음을 당한 사건 등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상식과 과학을 초월한 사건들이 연속되어 있습니다.

오늘 요한복음 2:1-11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치에 맞든 안 맞든,상식적이든 비상식적이든,과학적이든 비과학적이든 그대로 해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45:9을 보면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피조자는 창조자의 절대 권능 앞에서 이러쿵저러쿵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대로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자신의 경험과 하나님의 능력을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1분에 100미터를 달리면 하나님도 1분에 100미터밖에는 달릴 수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실패했기 때문에 하나님도 실패할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또 내가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사탄이 그 사람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은 사탄이 그들의 마음을 장악했기 때문입니다.사탄이 마음을 사로잡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게 됩니다.

셋째는,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과소 평가 때문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십시오.하나님을 거역했거나 불순종한 사람들은 모두가 심판을 받았습니다.그 사실을 외면하거나 무시하기 때문에 불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8을 보면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라고 했습니다.

가나 혼인 잔칫집에서 있었던 포도주 기적은 그 자리에 함께 했던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었습니다.

주경가 버나드(Bernard)는 여섯 항아리의 포도주는 70가족이 먹고도 남는 양이라고 했고,바클레이는 180갤런(gallon)이나 되는 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양이 아닙니다.“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물을 채우라고 했을 때 물을 채웠습니다.떠다 주라고 했을 때 그대로 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라는대로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이 말씀은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이다라고 생각이 되면 이 핑계 저 핑계로 빠져 나갈 궁리를 하지 말고 그대로 순종합시다.

설교를 듣다가 저 말씀은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다라고 깨달아지고 감동이 되면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당장 실천합시다.

사도행전 7:54은 스데반의 설교를 듣던 유대인들의 죄악상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요한복음 12:48을 보면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고 했습니다.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시면 가득가득 채우는 사람이 됩시다.

떠다가 연회장에게 갖다 주어라 하시면 두말 말고 그대로 떠다가 줍시다.

믿으라 하셨으니 믿읍시다.

기도하라 하셨으니 기도합시다.

염려하지 말라 하셨으니 염려하지 맙시다.

기쁨과 행복이 바닥 난 가정이라고 해도 그곳에 주님이 계시면 물이 변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삶의 의미가 사라지고 희망이 끊긴 내 인생 삶이라고 해도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는 주님을 영접하면 그 삶 속에 새로운 희망이 솟아 오르게 될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옳습니다.오늘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합시다.

그리하면 텅텅 빈 돌항아리들이 새로운 가치와 축복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