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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미래를 앞당기는 사람들 (습 03: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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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 수년 만에 돌아오시는 아빠를 기다리는 아이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요. 이제 두주 후면 가슴 벅차도록 기쁘게 만나게 될 아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찬 아이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요. 어디 한 순간인들 그 사실을 잊겠습니까 그 아이의 가슴 속에서는 감격스러운 만남의 기쁨이 터져나오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기쁨을 앞당기어 경험하는 아이에게는 어떠한 어려운 일도 더이상 장애가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렇듯,기쁨의 현실을 기다리는 것에는 놀라운 힘이 담겨있습니다.
앗시리아의 위세가 꺾이고 점차 바벨론이 강대국이 되는 와중에서 이스라엘은 계속적인 수난 가운데 놓여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짖밟히고 고통은 깊이를 더해가고 있었습니다. 희망적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절규의 현실 속에서 스바니야라는 예언자는 역설적으로 기쁨과 축제(14절)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리둥절 하였지만, 스바니야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의로운 야훼 하나님의 다스림이 결국 해방의 기쁨을 가져오리란 확신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포로된 시절이 끝이나고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게될 그날을 내다보고 있었던 까닭입니다. 이렇게 모두가 어우러져 기쁨의 마당에 우뚝 서게될 그 날을 앞당기어 경험하는 근거는 “야훼께서 함께 계시다”(15절)는 사실에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실적인 경험과 그의 정의로운 다스림에 대한 확신은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떨치고 승리로운 미래를 내어다 보며 용기롭게 걷게하는 현실적인 힘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날은 올것입니다. 그날은 현실적인 경험이 될것입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 삶속에, 현장 가운데 계시다는 확신이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온갖 방해의 세력을 이겨내게 할 것입니다.
어둠 깊은 통곡의 역사 속에서 천박한 자기연민 속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살아계신 야훼 하나님의 정의로은 다스림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뛰는 가슴을 주신 이유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답답하고 음울한 현실 속에서 절망하는 것은 가장 졸렬한 범죄행위 일수도 있습니다.
오늘, 강림절 세째주를 맞이 하며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하여야 합니까 먼저 우리의 굳은 심지는 도려내는 일, 막연한 생각과 습관을 걷어치우는 일이 있아야 합니다.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 쉽사리 절망하는 태도가 야훼 하나님의 생각과 얼마나 다르며, 담담하게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였던 예수님의 삶과는 또한 얼마나 거리가 있는지를 묵상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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