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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리스도와 자아 (요 03: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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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 저지주에서 목회 하시는 한 목사님이 하루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의 장례식을 발표하고는 온 교인들을 참석케 하였습니다. 장례식을 집전하는 목사님은 여느 장례식과 마찬가지로 장례를 치르면서 설교하시기를 "이 관 속에 있는 사람이 그토록 죄를 많이 짓고 타락하여 이제 지옥으로 가게 된 것은 슬픈 일입니다. 이 사람은 세상에서 제일 악한 사람이었습니다"하였습니다.
이에 참례한 사람들은 어떤 못된 죄인일까 궁금하여짐과 동시에 자기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목사님은 `이제 시신을 볼 시간입니다'라고 알려 교인은 한 사람씩 관에 다가가 이 시신을 보도록 했습니다. 시신을 보는 순간 교인들은 너무도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관 속에는 바로 자기 자신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죄를 깨닫지 못하는 교인들을 깨우치기 위해 관 바닥에 거울을 놓았던 것입니다.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많은 순간에 나의 불행과 고통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롯이 된다고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문제들은 다른 사람에게서 이유가 있다고 여길 때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요인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깊이 있게 살펴보게 되면 나로부터 비롯된 문제가 훨씬 더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살면서 남을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남에 대하여 서운할 때가 있습니다. 왜 나를 알아주지 않는가하면서 기분이 깔아질 때도 있습니다.
가깝게는 부부생활에서 부터, 그리고 가정생활, 교회생활, 직장 생활, 사회생활, 이런 심리는 쉴새 없이 우리를 공격해 오고 여기에 빠져들어 가게 되면 계속해서 허우적거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견딜 수 없는 삶의 공허가 찾아오게 되고 인생은 너무나 무거운 짐으로 우리를 내리 누르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복되게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자기에 얽매여서 마귀의 종으로 우리 인생이 고달프게 되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서 인간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청산하시고 저주와 가난과 무지와 질병, 연약함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온갖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우리의 죄가 못박혀 있습니다. 그 십자가에는 우리의 병이 못박혀있습니다. 우리의 가난이 못박혀있습니다. 우리의 불안과 근심과 걱정이 못 박혀 있습니다. 우리가 그 십자가를 바라볼 때 평화가 내 맘 속에 넘칩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용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바울 사도는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6: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 때만 비로소 우리는 참 내 모습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삶의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이 관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 오직 예수님께로서만 모든 것이 흘러 들어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생명의 약동이, 풍성한 결실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단이 주는 생각, 인간의 생각이 개입이 되게 되면 삶의 질서가 깨어지고, 어지러움과 혼란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위대한 선배인 바울 사도는 (빌1: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빌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삶의 자세입니까
이 자세는 바울 사도만의 삶의 자세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바로 나의 삶의 자세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하지만 우리들 마음에 자아(내)가 있어서 이 삶을 방해를 합니다. 이 자아의 방해를 이겨내지 못하면 우리는 아쉬운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예화가 있습니다.
“고슴도치의 딜레마”라고 하는 것인데-어느 추운 겨울 날 너무나도 추워서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때에 고슴도치 두 마리가 덜덜 떨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둘이 몸을 맞대고 있으면 체온으로 따뜻하겠지. 해서 서로 붙었습니다. 정말로 따뜻합니다. 그런데 고슴도치의 상징인 그 가시 털이 살을 파고 찌르니 아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춥고 맞대면 아프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대책이 없습니다.
이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끙끙대고 있는 상황을 ‘고슴도치의 딜레마’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임을 우리는 봅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께 모든 것 맡기고 주님 뜻대로 살고 싶은데 아직도 ‘나’라고 하는 가시 털이 있어서 자꾸 주님을 아프게 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나의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제가 좋아하는 복음성가 가운데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본래 이 곡은 최용덕이러고 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청년이 작사,작곡을 한 곡인데 대구를 중심으로 활약한 ‘굳 라이프’찬양단이 처음 불렀습니다.
처음 노래를 들으면서 얼마나 가슴으로 파고드는지 망치로 얻어맞는 것처럼 마음이 아파 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수십 번 듣고 또 들으면서 회개를 했습니다. 바로 나의 실상을 깨닫게 해주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을 위해 살듯이
나의 일생에 꿈이 있다면 이 땅에 빛과 소금되어
가난한 영혼 지친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고픈 데
나의 욕심이 나의 못난 자아가 언제나 커다란 짐되어
나를 짓눌러 맘을 곤고케하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깨트려지지 않은 나의 자아가 주님을 찌르고 이웃을 찌르고 내 마음의 화평을 깨는 너무나도 무거운 짐입니다.
신앙은 순종입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신앙은 모험입니다.
(히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히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로부터 여인이 난자 중에 이와 같이 큰 자가 없다는 세례 요한에 관한 기록입니다.
세례 요한은 우리에게 신앙인의 삶이 어떻게 되어야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소망이었습니다. 민족의 자존심을 짓밟히고 로마의 식민지 생활에 찌들어지고 가난과 목표 상실, 가운데서 민족을 구원할 메시야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예언자의 소리가 끊어진지 400여년이 지났습니다.
이 때 유대 광야에서 누가 보아도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가 우렁차게 하나님의 음성을 대언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는 눅1:7, 13-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적으로 출생함
(눅1:7)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눅1:13)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눅1:15-모태로부터 성령이 충만함
(눅1:15)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한은 광야에서 낙타 털 옷을 걸치고 민족의 양심을 향해 강하게 회개를 외쳤습니다. 보기만 해도 그는 하나님의 대변자였고 자기들이 고대하던 메시야였습니다.
그러자 온 이스라엘이 술렁거렸고 이 놀라운 광경을 목도하기 위해 제사장도, 레위인도, 정치가도, 군인들도···· 요단강으로 요단강으로 몰려왔습니다.
그의 인기는 절정에 달하였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모든 사람의 관심과 인기를 한 몸에 간직한 슈퍼 스타였습니다.
찾아온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가를 확실하게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네가 그리스도냐”라고 물었습니다.
(막1: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그가 원하기만 했다면 메시야라고 선언해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분명하게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엘리야냐고 물었을 때 엘리야도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선지냐냐고 물었을 때 선지자도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네가 누구냐고 물어 올 때, (요1:23)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소리는 듣는 자의 마음에 감동을 새기고는 흔적이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사람의 마음에 새기고 자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할 소리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의 설교의 핵심은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어느 한 순간도 자신을 과시하지 않았습니다.
(요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 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렇게 오직 주님만을 보여주었습니다.
자신의 인기, 사람들의 관심, 권위, 예언자적인 삶, ······ 그러니까 자신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는 예수께서 공생애의 전면에 등장하시자 자신은 조용하게 사라져 갔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람들의 관심이 요한 자신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집중이 되고 요한을 따르던 자들이 모두 예수께로 가 버렸습니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한없이 측은하고 안되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신앙인 이었습니다. 주님을 나타내는 것이 삶의 본질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는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정말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것이었습니다.
(요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요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그렇습니다. 나를 통해서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드러날 때 거기에 성도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이 무엇인가를 보게 됩니다. ‘자아’가 살면 나는 혼돈 속에 빠지게 되고 삶의 질서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겸손하게 예수 그리스도만을 드러냈을 때 여기에 참된 삶의 보람과 축복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이러면 하나님께서 한없이 높여 주시고 존귀하게 안도하시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자신을 철저히 낮추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를 “여인이 난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로” 높여 주셨습니다.
여러분!, 성도의 삶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나는 철저히 낮아지고 죽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빌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보람있게 살아가는 것을 보고 싶어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또 일어서려고 하는 자아를 깨트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의 입술은 주님 닮은 듯하나 내 맘은 아직도 추하여 받을 사랑만 계수하고 있으니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우리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개척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 삶에 드러나야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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