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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신앙과 고난의 삶 (고전 15: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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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나 이미 부활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똑같이 신선한 도전을 주는 말씀임에 틀림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난의 삶을 통해 생생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첨단 과학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부활신앙은 웬지 미신적이고 원시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솔직한 고백일 것입니다. 오늘 바울의 증언은 이런 우리의 의심을 씻어주고 부활신앙으로 이끌어 가는 큰 힘으로 다가옵니다. 그뿐 아니라 과연 나는 주님과 믿는 자의 부활을 진실로 믿고 있는가 나의 삶이 나의 부활신앙을 증명해주고 있는가 중대한 질문들을 던지게 합니다. 오늘 본문을 함께 묵상해보는 가운데 우리 모두 부활신앙을 새롭게 할 뿐 아니라, 부활신앙에 합당한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큰 은혜를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은 믿을만한가
바울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고난의 삶에 주목하게 함으로써 부활을 실감나게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동역자들과 더불어 편안한 삶을 버리고 언제 어떤 위험이 닥쳐올지 모르는 긴장과 불안이 연속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30절). 안일과 행복을 추구하고픈 자아의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는 죽음을 매일 뼛속 깊이 느끼는 삶을 산 것입니다(31절). 이 고백의 진실성을 확신시키기 위해 바울은 자신이 주안에서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 갖고 있는 자랑의 진실성을 걸고 단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에베소 경기장에서 바울이 맹수와 더불어 싸우는 모습을 연상시킵니다(32절).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었는지 아니면 은유적 표현인지는 단정짓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울은 에베소를 포함한 소아시아 지역에서 마치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살던 경험을 연상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고후 1:8`10). 바울이 이렇게 독자들의 관심을 자신의 고난의 삶에 끌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삶을 자랑하거나. 위로와 존경을 받고자 함입니까 아닙니다. 이유인 즉 부활을 확신시켜주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묻습니다. 왜 내가 이렇게 고난의 길을자처하고 있는 것입니까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이 고난은 무슨 의무가 있으며 도대체 어떤 유익이 있단 말입니까 죽음이 인생의 종착역이라면 부활에 소망을 걸고 온갖 고초를 기꺼이 감내하며 살아가는 자신이야말로 모든 사람 가운데 더욱 불쌍한 자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19절). 바울은 이렇게 자신의 고난의 삶을 부활의 산증거로 제시하고 있는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증언을 보다 생생하게 하기 위해 대조적인 삶의 철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2절). 부활이 없다면 현명한 삶의 모습은 자명해지는 것입니다. 사는 날 동안 최대한 즐기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철학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보편적인 것입니다. 이사야 22장 13절에도 보면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향락주의, 찰라주의적 삶에 빠져있던 예루살렘 백성들올 향해 이렇게 탄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또한 다이스만에 의하면 곧 죽으리니 마시자는 표현은 고대사회에 인기를 끈 도덕의 요약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종종 흥이나면 부르던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너무나 천박하고 피상적이어서 보편적인 인생 철학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듯함니다. 고상한 많은 사람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고상해 보이는 가식과 허위의 껍질올 벗어버리고 인생을 바라본다면 이보다 진솔하고. 현명한 인생 철학이 어디 있겠습니까
계몽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철학자 중의 하나로 꼽히는 칸트도 이점에 동의를 하고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도덕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도덕적인 사람이 행복을 누리기

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불멸해야 하고 하나님이 존재하셔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비로소 도덕적인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행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 지고선이 성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죽음 후의 세계가 없다면 인간의 도덕적인 삶은 무의미하고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율성을 그렇게 강조했던 칸트도 도덕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단지 이런 이유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옳지 못하지만 그는 중대한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없고 부활도 없다면 모든 고상하고 도덕적인 삶은 궁극적으로 무가치하하다는 점입니다.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는 삶의 양식이야말로 가장 진솔하고 현명한 답인것입니다. 그래서 실상은 많은 이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자발적 고난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는 이제 분명해집니다. 바울은 얼마든지 예수를 안 믿고도 뜻있고 멋있고 성공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미래가 밝은 유대교의 소위 떠오르는 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모든 것을 마치 지저분하고 쓸모없는 배설물처럼 여기도록 만들고(빌 3:4-14) 죽음의 삶에 뛰어들게 만든 것입니까 이를 설명할 수 있는 길은 자신의 증언처럼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 믿는 자의 부활뿐인 것입니다. 죽음을 담보로 한 바울의 증언이야 말로 우리 심령 깊이 다가오는 힘있는 증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활을 증언하는 책을 쓴 사람 중에 많은 이들이 법관이었다는 점은 매우 흥미있는 일입니다. 프랭크 모리슨 이라는 한 법관은[저작이 거절된 책] 이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이유인즉 예수님의 부활의 허구성올 증명하는 책을 쓰려고 성경을 연구하다가 그만 부활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법관들이 부활을 믿게 되는 공통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들은 이 세상 법정의 어떤 증인들 보다도 믿을 만한 확실한 증인들 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우리는 부활의 사건이 반복될 수 없기에 실험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아쉬움을 갖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증언들과 더불어 오늘 바울의 증언을 열린 마음으로 깊이 상고해볼 수록 성령께서 보다 확실한 부활신앙을 갖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꼭 예수님의 부활과 믿는 자의 부활을 믿는 축복의 대열에 동참하실 수 있기들 기도합니다.
또한 본문에서 바울은 부활을 이미 믿는 다고 하는 우리에게 중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신앙에 합당한 삶은 무엇입니까 입니다.

부활신앙에 합당한 삶
첫째로, 바울처럼 고난에 기꺼이 동참하는 삶입니다(30-32). 나의 부활신앙의 진실성을 가려내는 시금석은 이렇게 단순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기꺼이 위험한 길을, 매일 죽는 긷을 걸어갈수 있느냐를 물어보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혹시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바울의 역사적 현실과 우리의 정황은 다릅니다. 우리는 어느덧 개신교 100 여년의 역사를 거쳐 전 인구의 1/

4.이 기독교인이 된 사회속에 살고 있을 뿐 아니라 이제는 그토록 고대하던 문민정부 속에 살고 있기에 고난의 길을 굳이 걸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이는 일종의 고난 콤플렉스가 아닙니까 과연 그럴까요 우리는 그동안 사회와 교회 역사 속에서 주님의 진리에 가까워져가는 모습들을 인해 진실로 기뻐하고 감사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부활의 나라. 새 하늘 새 땅에 와 있지 않다는 현실을 잊어서도 안될 것입니다. 악의 영들은 오늘도 변함없이 좀더 세련되고 가장된 모습으로 세상을 주장하고 믿는 자들과 교회를 넘어뜨리려 하고 있습니다.(엡6:12,벧전5:8) .
종교의 자유라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많은 고난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라는 이름하에 이세상은 옳고 그름의 기준이 희석되어져 가는 가운데 속으로 점점 깊게 병들어가고 있는 부분들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보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은 비전도 잃고 도전할 힘도 없기에 고난의 길을 걸어갈래야 걸어갈 수도 없는 슬픈 지경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편협한 마음. 사랑없는 비판. 지혜의 부족에서 오는 무의미한 고난을 지처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자신의 성공과 행복을 최종 목표로 삼고자하는 숨은 동기를 십자가에 못박읍시

다. 부활의 진리로 향락주의적 병폐와 맞서 싸우다 소외당한다면 기꺼이 외로움의 길을 걸어갑시다. 주님의 고난을 닮은 십자가의 흔적을 우리 몸에 간직할 수 있다면 그보다 큰 영광이 어더 있겠습니까(갈6:14,17).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고난이 무엇인지를 늘 깊이 생각하면서 주님이 남겨놓은 고난의 발자취를 좇아갑시다(벧전2:19-21).
둘째. 속지 말아야 합니다(33절). 선한 행실을 더럽히는 악한 친구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들은 오늘도 은갖 그럴싸한 논리와 증거들을 들어가며 부활은 단군신화 같은 꾸며진 이야기라고 속삭입니다. 오직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만이 실재라고 설득합니다. 이 세상 안에야 말로 값진 보화와 아름답고 풍성한 삶이 있다고 호소합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런 유혹들은 더욱 설득력있게 들리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같은 연배의 동료들이 적당히 타협하면서 자리를 잡아가고 그럴듯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립니다. 내가 무슨 별난 의인이라고 잘난 척하지 말자! 겸손하고 폭넓게 살자! 그러는 가운데 우리의 선한 행실은 조금씩 조금씩 더럽혀져 가는 것입니다. 이런 유혹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 속임수를 대항하기 위하여 우리는 부활의 진리로 허리를 질끈 동여매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34절).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한다는 말입니다. 본문의 “깨어”는 본래 술취한데서 깨어나는 것올 의미합니다. 세상은 늘 우리에게 근사한 술을 권합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부지중에 홀짝홀짝 세상 술을 마시게 됩니다. 텔레비전, 영화. 스포츠, 소설, 안믿는 친구나 친척들 모두 잘만 다루고 사귀면 좋은 것이요. 좋은 분들이 될 수 있지만, 자칫하면 술잔이 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최고로 좋은 것의 적은 최고로 나쁜것이 아니요 조금 좋은 것이라는 속담은 귀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부활신앙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은 깨는 운동 정신 바로 차리는 운동을 게을리해서는 안됩니다. 육체의 건강을 위해 추운 새벽 공기를 뚫고 달리듯 우리는 경건의 연습을 해야 합니다(딤전4:7). 말씀과 기도, 성도와의 깊은 사귐 등을 통해 늘 새롭게 자신을 조명하고 심령이 아침 이슬처럼 청명할 수 있도록 갈고 닦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는 죄의 허가장이 아님을 기억해야합니다(롬6:1,2) 물론 거룩해지는 삶은 점진적인 것입니다.
완전주의의 함정에 빠져 늘 양심의 가책속에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나태해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죄의 종이 아니요(롬5:14) 성령님이 우리를 도와주신다(롬8:2)는 확신 속에서 죄와 싸워 정복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승리를 믿음의 선한 싸움을 통해 우리 것으로 누려야 합니다(딤전 6:12).
넷째,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34절). 바울은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죄 속에 잠들어 있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자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늘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시다. 나더러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마 7:21-23).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진실로 알아야 합니다. 그 앎이 삶으로 실현될 때까지 우리는 주님께로 더욱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참된 부활신앙은 우리의 삶에 진정한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그 진리를 바울의 증언을 통해 배웠습니다. 또한 이 진리는 초대교회의 평범한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입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행4:3

3.34). 부활의 큰 은혜가 그들로 하여금 사랑과 나눔의 삶을 살게 한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서 자주 사용되는 아주 아름다운 표현이 있습니다.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는 말입니다. 저는 영어 실력이 부족한 탓인지 도무지 이 뜻을 담을 만한 영어 표현을 찾을 수 없어 종종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감동받았다라는 말은 왠지 아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할 점은 은혜 많이 받고
삶의 점진적 변화가 부족하다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은혜가 좀 의심스럽다든지, 은헤를

쉽게 잊는 심한 증상을 앓고 있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이 부활의 계절에 사랑하는 성도님들의 심령 속에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큰 은혜가 임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바울을 본받아 기꺼이 고난의 길을 나섬으로 참된 부활의 증인들이 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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