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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고난의 사순절 (슥 09:9-12, 고전 0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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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일은 사순절 다섯째 주일이며 다음주일은 고난(종려)주일이 다. 사순절 다섯째 주일에서 고난 주일까지는 죽음의 준비 주간이다.

그러므로 사순절 다섯째주일에서 부활주일까지의 2 주간은 교회력 가 운데 가장 의미 깊은 주간이다.

예수는 권위와 영광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시지 않고 고난과 슬픔의 종으로 오셨다. 이사야는 고난의 종으로 오시는 메시야의 모습에 대하 여 생생하게 예언하였다(이사야 53장) 그는 실로 무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 각하기를 그는 질병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려 고난을 당한다 하였 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 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는 메시야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질고와 슬픔을 당하신 것을 말하였다. 또 그는 우리를 위하여 질병과 고난을 당한 것을 말하 였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위하여 찔림과 상함을 받고 우리의 평화와 나음을 위하여 징계와 채찍에 맞는다고 말하였다. 그리 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슬픔과 죽음에 대하여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그리스도의 겸손과 복종은 십자가 상에 절정으로 나타났다. 그리스 도를 주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슬픔과 죽음 에 동참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길은 하늘의 영광과 이 세 상의 행복을 누리는 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영광과 행복을 누리기 전에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바울도 훌륭한 유대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헬라 와 로마의 수많은 학문과 지식을 익혔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나 믿음을 가진 이후부터는 지금껏 지니고 있던 지식의 한계와 어리석음 을 철저히 깨달았다. 구원의 진리는 인간 이성에 의하여 깨달아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안에서 약하고 어리석음이 세상지혜와 세상의 강 한 힘보다 더 낫다. 당시 십자가의 도(도)를 어리석은 것으로 여기는 부류도 있었다. 하나는 헬라인들로 철학적 사고와 수사학 웅변술등을 기초로 한 언변 최고의 지혜로 여기는 자이고 또하나는 유대인들로 표 적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최고의 수단이라 생각하는 자들이었다.

이것은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되고 불신자에게는 심판이 된다는 진리는 철학적 사고와 체계있는 논리적 학문에 익숙한 헬라인 들에게는 매우 우습게 느끼는 것이다. 또 십자가의 수치와 고통을 당 시 화려한 헬라문명의 혜택을 누리던 헬라인들에게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기적이나 이적을 체험하지 않으 면 믿지 않으려는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의 도는 불신이었을 것이다.

십자가의 도를 불신하는 이유는 무었일까 예수는 미천한 목수의 아 들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일평생 집한칸 마련하지 못한 무주택자였고 만 인류의 구원이 된다고 예수의 가르침이 유대인들의 선민사상과는 부합하지 못하였고 예수가 메시야일자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십자가에 서 죽음으로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원의 진리는 이성과 철학 적사색으로 깨달을 수 없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예수 믿는 이들에 게 예수는 자기의 생애를 십자가로 훤히 내어 보이신다. 예수의 생애 는 고난으로 일관했다. 예수의 탄생 자체도 고난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그 자체가 바로 고난인 것이다. 마굿간에 서 태어나 갓난아기인 두살때 애굽으로 헤롯왕의 박해를 피해 피난을 가셔야 했고 30년간 목수의 아들로서 가사를 돌봐야 했고 공생애 3년 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해야 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둘 곳이 없다고 고백하셨다.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의 피와 땀을 흘리는 기도와 로마 군인에 의해 체포되어 헤롯법정, 빌라도 법정으로 끌려다 니면서 재판을 받으셨고 판결에 의해 십자가를 지시고 12번 넘어지면 서 골고다 언덕으로 가시는 고통을 당하셨다. 마지막 십자가의 처형에 피와 물을 다 쏟으시고 [다 이루었다]는 말을 남기고 운명하셨다. 예 수의 생애 전체가 고난의 생애였다. 그래서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라고 한다. 그러면 예수께서 죄가 있어서 고난을 당하셨는가 그것은 진리 와 정의를 위해 당하신 고난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따르는 자로서 이세상에서 정의롭게 진리대로 바르게 살려고 하면 고난이 따르게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 난을 채우는 일이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가야 된 다.

모든 생명은 고난을 통해서 태어난다. 어떤 생명이든 고난없이 태어 난 생명은 없다. 인간이 태어날때에도 모체는 고난을 겪는다. 산실은 고통과 신음 소리로 꽉찬다. 동물뿐만 아니라 초목도 그렇다. 한 국가 나 사회가 태어날때도 그렇다. 어떤 제도나 질서가 창조될때도 그렇 다. 고통과 고난없이 태어난 것은 하나도 없다. 고난은 인간 생명의 시작이다. 모든 생명은 고난을 통해서 성장한다. 그리고 성숙해 간다.

고난을 겪지 않은 인격과 고난을 통해 연단 받은 인격에는 큰차이가 있다. 한국교회는 고난보다 안일한 축복속에 자리를 펴고 안주하는 것 이 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복을 잘파는 사람들이 인기가 있다. 기독 교는 집안에서 안주하는 주인(Insider)보다 그 집을 지키는 파숫군 (Outsider)이 되는데 본질적 사명이 있다. 조직을 잘하고 관리를 잘하 는 지배적이고 관료적인 체제가 되어질때 기독교는 안으로부터 썩어갔 던 경험들을 하였다. 복음은 들판으로 뛰어나가도록 유도되어야 한다.

세례요한이 그렇고 베드로도 그렇고 바울이 그렇다. 그 이유는 구주예 수 그리수도가 그렇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안일해져서는 안된다. 고난의 종들이 하나님이 쓰시는 그 시대의 종들이 되어야 한다. 고난을 잊지 않고 기념하는 사순절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더욱 기념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 그리스도의 왕국이 들어있고 세상을 이겨나가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들 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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