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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기념주일을 맞으며 (시 18:1-2; 요 08: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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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루터가 독일의 비텐 베르크교회의 정문에 그의 95개 조항의 반 박문을 붙인것(1517년 10월 31일)을 기념하는 날로 금년이 476년째되는 해이다. 이것을 종교개혁의 시작으로 간주하고 있다. 독일의 루터파와 연 합지역 교회들은 10월 31일 또는 그 다음의 주일을 종교개혁주일로 지켜 내려오고 있다. 16세기초의 유럽은 카톨릭 교회에 의해 명목상이나마 통 일을 이루고 있었다. 그 당시에 있어서 로마 카토릭의 신앙과 역사는 인 간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주어진 것 이다. 개혁의 선구자들은 종교적 통일을 이룬 카톨릭의 교의를 부정적 시 각에서 보았다. 이들은 당시의 종교를 잘못된 종교라고 비난했다. 도덕적 으로 타락했고 신의 뜻과는 관계있는 부패된 교리를 강요한다고 힐책했 다. 종교개혁주일을 맞아 16세기의 종교개혁을 되새겨보는 것은 역사적 사건을 통해 오늘의 한국교회에 개혁의 요소와 필요성을 발견하자는 것에 그 의의를 둔다.사

16세기의 유럽은 변혁의 길을 걷고 있었다. 상업의 발달과 도시의 발 생 그리고 화폐경제의 발달은 중세 봉건체제의 붕괴를 부추겼다. 당시 종 교의 분위기는 날로 뜨거워져가고 있었으며 종교개혁이 발생하기 1세기반 전에 이탈리아를 포함한 유럽 대부분의 지역이 종교적 열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성지와 순례지가 점점 증가하였고 새로운 기도문들이 나타났으며 성지에 대한 숭배의식도 증가 하였다. 유럽토지의 3분의 1은 하나님의 이 름아래 등기 되었으며 그 소유권은 교회에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당시 중세교황 교회의 몰락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중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신앙적으로 사상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고 성경적 신비주의로서 기독교의 신앙과 역사개혁의 전초역을 담당했다. 그들은 저명한 학자였으며 교수, 설교자들이었고 저술가였다. 그들에게 유능한 제자들이 있었으며 그들의 주장을 받쳐주는 조직체가 있었다. 개혁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요한 위 클리프는 성경의 교리적인 개혁자로서 어거스틴과 신플라토주의의 영향을 받고 그는 황실 전속 성직자로 활동하면서부터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 다. 당시 교황이 기독교회의 최상권을 갖고 있는 상황을 반대하고 하나님 이 교회에 주신 영적 물질적 지배권을 악용, 교회가 영지와 재산을 소유 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며 교황에게 도전하였다. 위클리프는 기독교회의 법률은 오직 성령 뿐이며 기독교회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의 단체라고 강조하며 성경으로 돌아갈것을 주장했다. 보헤미아의 요한 훗스는 교회개 혁의 강풍을 일으켰다. 옥스포드대학에서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은 그는 위클리프의 개혁정신을 계승했다. 교황 요한23세가 나폴리의 라디스라우 스왕을 정복하기 위해 십자군을 일으키면서 여기에 참전하는 자들에게는 죄를 사하여 준다라고 말했을때에 그에게 정면으로 도전했다. 기독교회의 개혁운동은 이태리 페라라출신의 신학자 지로라모 사보나롤라 독일의 신 비주의 신학자 마이스터 엑하르트등으로 이어졌고 1517년 10월 31일 교황 레오 10세가 면죄부 판매를 시작 했을때에는 이에 반발한 마틴루터가 종 교개혁의 봉화를 높이 치켜 들었다. 교황레오10세가 성베드로 대성당을 속히 완공하기 위하여 소위 면죄부를 판매했다. 그리고 이것을 사는 사람 은 연옥에서 천국으로 옮김을 받을 것이라고 선전했다.

 루터는 이에대해 기독교회 복음의 본질에서 이탈된 행위요 돈으로 죄 를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비성서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31일 비텐베르크교회의 정문에 라틴어로 쓴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게시했 다. 이 사건은 카톨릭교회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고 면죄부 판매는 부진 해지기 시작했다. 루터는 이 반박문을 통해 교황은 권세가 없으며 기독교 의 최종적 권위는 교황이 아닌 성경에 있다고 주장했다. 루터의 이같은 사상은 카톨릭에 의해 이단자로 규정 모진시련을 겪어야 했지만 이때부터 기독교회의 개혁운동은 불길처럼 일기 시작했다. 스위스 개혁운동의 창시 자 울리히 쯔빙글리는 루터보다 앞선 개혁운동을 전개했고 곧 등장한 칼 빈을 위해 개혁의 길을 활짝 열어 놓았다. 그는 어떤 내적인 신앙의 경험 보다는 자신의 인격적인 지적 비판으로 개혁을 시작했다. 성경만이 신자 에게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한 그는 옛 예배의식과 제도면에서는 루터보다 과격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16세기 개혁자들의 신앙을 집대성하 고 말씀의 원리 속에서 구체적인 삶의 내용을 정립하기 위해 전생애를 바 치다시피한 요한 칼빈은 26세의 나이로 "기독교 강요"를 저술 하나님 중 심, 성서중심, 그리고 교회를 중심으로 한 개혁 신학을 집대성 했다. 그 의 신학체계는 오늘날의 역사적 칼빈주의를 이룩했으며 개혁교회의 최대 산실인 장로교회의 출범을 가져왔다. 칼빈은 제네바시를 기독교회 개혁의 본산지로 작정하고 기독교 교육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제네바시의 산업구 조도 개혁, 정밀기계, 공업 견직물 공장, 중공업을 육성하기에 이르렀다.

이같은 역할은 기독교가 세계문화문명의 산소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16세 기 종교 개혁은 중세 교황교회의 몰락과 함께 중세기의 종교적 관념을 완 전히 뒤집고 자유와 평화 그리고 평등을 기조로 한 근대 기독교회시대의 문을 열어 놓았다. 사람들은 이제 더이상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 받지 않 았고 강요받을 필요도 없었다. 반면 자유로운 생각, 자유로운 정치, 경제 활동 그리고 과학과 하늘에 대해 새로운 시각은 기독교를 이성적 사고에 서만 해석할려해 교회의 권위가 상당한 도전을 받게 되는 종교개혁이후의 세계교회가 수난의 시기를 맞기도 했다. 이후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기독 교는 자유주의 영향 때문에 흔들리기 시작했고 칼바르트, 루돌프 불트만, 폴 틸리히 등에 자유주의, 비 신화화 사신신학들은 기독교역사의 새파문 을 일으켰고 동시에 현대 기독교가 다양화되고 좀더 확정되어가는 계기가 마련됨과 동시에 기구적인 교회 일치 운동으로 발전한 에큐메니칼운동으 로 발전 기독교 신학의 신사조인 신정통주의 근본주의 신복음주의화 구속 사 신학, 희망의 신학, 해방신학등 현대 신학 사상등을 탄생케 했다.

 일제에 의해 압박을 받던 우리 민족은 정신적 갈등 속에서 억압의 굴 레로부터 해방받고 싶어했으나 우리나라 전통 종교들은 민족 의식고취에 미약했을 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어떤 비젼도 제시하지 못했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미국 선교사들이 전한 복음은 민족을 새롭게 각성시키는 계기 가 되었다. 유교와 불교등 이질적인 문화의 바탕 속에서 어려움도 많았고 일본의 교회탄압에 큰 위험도 당했지만 선교사들은 성경을 가르쳤고 읽게 했고 배우며 신앙의 열기가 높아져 갔다. 산사참배는 한국교회에 큰 시련 을 안겨준 사건으로서 교회의 분열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지만 복음의 불변성을 굳게 믿는 신도들은 강한 민족의식 속에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신앙을 가졌고 1919년 독립운동을 계기로 발판을 마련해 갈 수 있었다.

1950년 6월 25일의 동란을 비롯 민족의 영욕과 함께한 기독교는 사회 문 화 정치 경제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깊숙히 관계해 오늘날의 자유 민주국 가를 건설하는데 일익을 감당하는 기반을 조성했다. 한편 한국교회는 발 전과 성장을 거듭함에 따라 각종 이단 종파들이 발생 정통교회와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고 자유주의 신학의 새사조는 초기 기독교를 여러 분파 로 갈라지게 만들어 한국교회의 장자적 역할을 하고 있는 장로교도 통합, 기장, 합동 등으로 분열 오늘날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교파로 갈라서고 있다.

 금세기에 들면서 교회는 큰변화를 겪게 되었다. 두차례에 걸친 세계대 전 이데올로기의 대결, 급격한 과학기술문명의 발전, 식민지주의와 관련 한 제 3 세계의 선교와 교회의 성장으로 교회는 신학적 탈바꿈이 요구되 었고 새로운 탈출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될 시기를 맞고 있다. 그래서 교 회의 신학은 시대적 요청에 따라 실존주의 신정통주의 세속화신학 해방신 학 희망의 신학 여성신학 민중신학등 많은 신학사조를 탄생케 했다.

 한국교회는 급성장했고 신자들의 신앙심은 영적열기로 가득하다. 1974 년 엑스폴로 대회는 1백만명의 신도가 여의도 광장에 운집했다. 100년만 에 1,200만 신도를 헤아리게 되었고 100만 신자를 가진 개교회도 있는 매 머드 교회가 있다. 이제 선교 200년을 향하게 된 한국교회는 해방이후 지 나친 교권주의로 분열을 거듭하더니 물질주의와 물량주의의 노예가 되어 크고 작은 교회간 갈등을 야기시켰으며 예배당의 크기와 예산의 규모 그 리고 신도수가 교회부흥의 척도로 자리 잡았다. 건전한 교회 보다는 안수 기도로 병고침의 기적을 베푼다는 특정기도원으로 신도들은 모여 들었고, 정통교리 보다는 시한부 종말론 같은 비성서적 주장에 더욱 귀가 솔깃했 다. 신도들은 물질적 축복에 욕심을 내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기복주의적 인 신앙으로 역할을 담당했다. 이러한 신앙흐름속에서 문민시대를 같이 가는 한국교회는 교회구석구석에 개혁의 바람이 일어나야 한다. 내적 성 숙의 교회상이 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가 서 있는 자리에 빛과 소금의 역 활을 감당해야 한다. 종교개혁에서 시작된 복음주의 신앙의 기본적인 원 리는 가 오직 신앙으로만 가 오직 은총으로만 가 오직 그리스도로만 가 오직 성경으로만이다. 종교개혁은 신학 교회 신앙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심을 가지듯이 복음은 교회를 새롭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오늘의 개혁의 물결에서 교회도 개혁의 기본정신을 본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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