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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안에 (약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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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종종 그의 독자들을 "내 형제들"이라 부르고 있다.

본문에서 그는 사실상 그리스도 안에서는 "부자도 가난한자"도 없다고 역설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부자를 두둔하고 가난한 자 를 업신여기는 편파심이나 차별하는 마음을 회중(글자 그대로의 뜻은 "회당") 안에서 없이 하라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영광 의 주"(1:1)라는 기독론적 칭호는 어쩌면 부자들의 자칭 영광에 대한 암묵의 힐책을 함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회중의 멤버들은 부자에게 경의를 표하거나 ("좋은 자리"에 정중하게 모 시는 것) 가난한 자를 멸시하거나(서 있든지 아니면 못한 자리, 즉 "발등상"에 앉으라고 명하는 것)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차별 대우는 교회에서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렇게 서로를 차별하는 자들은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된다(4 절). 고린도 전서나 에베소서에서 처럼 여기에서도 믿음 안에서 (1절) 그리고 교회 안에서 하나 될 것을 요구하는 것을 볼 수 있 을 것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빈궁한 자들을 부끄 럽게 하지 말라고 교훈하고 있다(고전 11:22).

 그런데 5절에서는 이외에 뭔가 다른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즉, 하나님께서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자기 나 라의 유업을 받을 자로 삼으신 자들은 다름아닌 바로 "세상에 대 하여 가난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분명히 야고보서 2:6-7과 5:1-6의 의미이기도 하다. 부자들은 불의로 말미암아 정 죄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여러 말슴 들도 같은 취지의 말씀들이다(예:막 10:17-31, 눅 6:24-25, 16:19-31["오순절 후 열 아홉째 주일"의 "신약" 본문 참조]). 그 러나, 야고보서 2:1-5에서 저자는 부자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 니라 다만 가난한 자들에 대한 꼴사나운 태도를 규탄하고 있을 뿐이다. 5절에서 말하는 내용은 교회에 들어오는 가난한 자들에 게도 정당한 존경심을 보여야 할 또 다른 이유다. 그러한 자들은 믿음에 있어 부요한 자들이다(참조:막 10:29-30).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들이다. 복음서에 의하 면, 그러한 생각은 예수님 자신의 생각이기도 했다(눅 6:20-21[ 비교:마 5:3-10], 12:33, 16:9, 20-22, 25). 예수님의 다른 말씀 들과 바울의 주장에 따른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들은 의인들 곧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다(예:마 7:21, 13:43, 25:34-39, 고전 6:9).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또 하나님 을 섬기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기로 결심한 자들은 자기 재산 을 포기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였을 것이다(마 6:24=눅 16:13, 막 10:21-25, 참조:눅 16:19-31).

 야고보 자신도 가난한 자를 차별 대우하는 것은 "최고한 법" 곧 사랑의 법을 범하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그 까닭인즉, 이러한 차별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시험 에 합격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8-9). 잘은 모르겠지만 이것이 암시해 주는 바에 의하면, 아마 야고보는 자기가 편지를 쓰고 있는 교회들이 부유하다고는 할 수 없더라도 "더러운(남루 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여유있는 자들이 대다수였 을 것으로 알고 있었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동

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자를 부끄럽게 하거나 괄시하는 것(2:6 상반절)은 사랑의 법에 배치되는 것이 다.

 제 2주제:야고보서 2:1-5 부자들을 더 좋아하고 경애하고자 하는 유혹은 거의 불가항력 적인 유혹이다. 거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이를테면, 두려움, 덕을 보려는 욕심, 지위, 보호, 권력, 영향력 등이 그 이유일 수 있다. 왕자의 환심을 사고 그럼으로써 자기의 애궈은 운명뿐만 아니라, 자기를 못살게 굴던 가족들에 대해서도 승리를 거둔다는 신데렐라의 이야기는 어느 사회에서나 강력한 모티프가 된다. 그 러나 한편으로는,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기 위해 만든 바로 그 처형대에 달려 죽었을 때처럼 "아첨꾼"(apple-polisher)이 만천 하에 드러나 조롱거리가 될 때에도 우리는 마찬가지로 기뻐한다 (참조:에스더서). 그러고 보면, 우리에게는 부자에 대해 서로 상 반되는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그를 존경해야겠다는 감정을 느끼면서도, 한편 그렇게 하는 것이 스스 로 자기 자신을 멸시하는 것이요 또 자기의 품위와 자유를 손상 시키는 일임을 깨닫게 된다. 가장 한심스러운 것은 경제적인 이 익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몽땅 팔아버리자."는 감정이다. 모 르긴 해도, 아마 그래서 세계의 여러 이야기에 등장하는 부자는 그토록 자주 스크루지(챨스 디킨즈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에 나오는 주인공으로 노랭이의 대명사-역주)와 같은 노랭이꾼으로 묘사되는가 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팔려갈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증오하며, 우리를 사간 사람을 더욱 더 증오하게 되는 것이다.

 고대 시대에 최초로 사회적 차별과 계급의 차별을 깨뜨린 것은 교회였다. 주인이 자기 노예의 손에서 성찬을 받는다는 것은 실 로 혁명적인 일이었다. 야고보가 편파심을 보이는 데 대해 그토 록 정열적으로 반대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우리가 쉽게 잊어버 리는 경향이 있지만, 야고보는 무엇보다도 편파주의가 파괴적이 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과 맘몬신(Mammon, "돈" 이라는 뜻-역주)에 대한 분리된 충성심을 낳게 하고, 또 그것을 나타낸다는 점에 있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파괴해 버린다. 그것은 이중적인 기준을 허용함으로써 인간 관계 를 파괴해 버린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의 목적에 정면 으로 반대함으로써 "사랑의 법"을 무효화시킨다는 점에 있어서 인간 자체를 파괴하고 만다.

 야고보의 호소 가운데에는 야유조의 풍자가 다분히 있다. 가난 한 자를 압제하는 부자에게 각별한 경의를 표한다는 것이 얼마나 희한스러운 일인가! 이것은 단순히 자학적인 변태증 처럼 보인 다. 그러나, 그 이상이다. 머리 둘 곳도 없으셨던 주 예수를 따 르는 자들이 금반지와 아름다운 옷에다 굽실거리는 것이 더욱 이 상하다는 것이다. 그 풍자의 화살이 우리의 풍요로운 정신 상태 를 꿰뚫기 시작할 때면, 우리의 안락한 좌석은 응당 가시방석처 럼 느껴지기 시작해야 한다. 오늘날 예언자적인 말과 예언자적인 행동은 어디로부터 오고 있는가 교회는 기꺼이 또 하나의 "바벧 론 포수(捕囚)"에 돌입하였는가 볼지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보기에 가난한 자를 택하여 믿음 에 부요하게 하시고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로 삼으셨다. 아니 다. 가난 그 자체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티켓이 아 니다. 차라리 하나님의 나라는 적어도 공의에 있다. 그리고, 하 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실진대(편파심이 없으실진대!) "나의 이 형제들 중에 지극히(가장) 작은 자"가 규준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한다면, 더러운 옷을 입은 사람 곧 머리 둘 곳이

없는 사람이 규준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초대교회 시절엔 교 호 외에는 그런 자를 돌아 보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 그 러한 자를 돌볼 자는 과연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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