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회개한 자를 용서하는 사랑 (고후 01:23-2:11)

첨부 1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방문 하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었으나 그것을 이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1:23-24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서 방문하 지 않았다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는 사도 바울의 사도적인 권위에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하는 무리가 이는가 하면 공공연히 음행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이같은 일련의 사건들이 고린도 교회 내에 바울파니, 게바파니, 아볼로파니, 그리스도파라는 분파주의를 만 들어 내었으며, 또한 정결해야 할 복음이 많은 지장을 초래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일찍 고린도를 방문하여 이같은 문제들을 정리하고 치리하여 해결하고자 하 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벌주고 치리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므로 스스로 뉘우치고 깨달아 돌아 오기를 사도 바울은 아픈 마음과 긍휼히 여기는 사랑으로 시간을 두고 서 다시 조금 더 기다리므로 개정의 기회를 주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스럽게 모든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 되기를 기도하며 원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 이 고린도 방문을 제때에 이행할 수 없었던 이유중 하나였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그를 근심되게 만들고 고통을 주었던 무리에 대하여 어떠한 사랑과 긍휼을 베푹고 있는 지를 좋은 모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성 도들은 이같은 바울의 긍휼과 용서의 사랑을 힘써 배워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1.성도는 다른 사람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합니다(1:23-2:4).

 바울은 고린도 교회 방문을 그들이 기대하던 때에 하였더라면 유익 보다도 해가 더 많았을 많았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2:1). 그 당시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는 바 울에 대한 반발심이 있었으며, 또한 교회에 의해 분명히 치리를 받아야 할 사람이 있었습니다(5-6절). 바울이 예고하였던 그 때에 방문 하였더라면 오히려 그들을 ' 근심케' 할 만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교회를 방문하는 대신에 편 지를 한번 더 하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3-4절).

이같은 바울의 처신은 그 자신의 감정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먼저 생각하는 사 랑에서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주의 일을 할 때에 우리에게 커다란 기쁨을 안겨다 주는 사람들이 동시에 우리에게 커다란 슬픔을 안겨다 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같은 양 극단을 다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 들을 향하여 아주 단호한 내용의 편지를 보내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개인적인 감 정으로 씌여진 편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고뇌하는 편지였습니다.

바울은 일찌기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실족케하 는 자를 징계하며, 그로인해 교회가 순결해지고 평화롭게 되기를 진정으로 원했습 니다.

바울은 자신의 단호한 말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 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마음은 더욱더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치 부모 가 자녀를 사랑하듯이 책망했습니다. 바울은 누군가를 질책하는 책망과 해 하려는 책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진정으로 고린도 성도들을 사랑하였기에 그들이 마침내 해를 당하고 마는 길로 가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래 서 바울은 고린도도 교인들을 살리려는 의도로 질책하는 책망을 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사도적 권위를 내세우며 자신을 존중하고 자신에게 복종하라고 사람 들에게 요구하고 명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기보다 인내 와 사랑으로서 더욱더 섬기는 편을 택하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방문 계획을 변경 한 것이 더 큰 고통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려는 동기였음을 하나님께서는 아시고 계셨습니다(고후1:23-24).

바울의 이같은 계획변경과 더욱더 기다려 보겠다는 결단은 다른 사람을 우선으로 생각해 주고 염려해 주는 사랑에서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자기의 유 익을 먼저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2.성도는 다른 사람의 신앙 성장을 도와야 합니다(2:5-6).

 바울은 그를 반대하고 교회 성도들을 이간시킨 그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 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사실입니다. 이것은 그 영혼이 다시 새로운 자세로 신앙 을 출발하는데 돕고자하는 최선의 배려가 베어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바울은 공공연히 드러난 죄를 방관만 하고 쉬쉬하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교회의 유 익을 위해서 이 사람을 징계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언급된 사람을 교회 가 징계하였으며, 그 결과 그의 죄를 회개하고 돌아왔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6절) 그래서 본문 6절에 "이러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은 것이 족하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다운 징계는 사랑의 증거입니다(히12장). 오늘날 자녀 교육에 관한 현대적인 견해를 따르고 있는 젊은 부모들 가운데는 자녀들을 너무나 사랑하 는 나머지 순종치 아니하는 자녀들을 징계치 못하는 경우도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매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징계가 없이는 올 바른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을 뿐아니라, 징계가 없다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없다 고도 볼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징계는 별로 인기있는 화제도 아니고 널리 행해지고 있는 관습도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엡4:15절 말씀처럼 "오직 사랑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도 많은 교회들이 권징을 마치 필요없는 물 건인양 아예 쓰레기 통 속으로 밀어 넣어버리고 있습니다. 평화 제일 주의 라는 성 경적 원리가 아닌 원리를 더 추종하기 때문에 생긴 오류인 것입니다. 좋은 것이 좋 지 아니한가 하는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말씀의 법을 무시하는 인위적인 처사가 아 닐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진정한 영적 평화란 성결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약3:17-18절에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 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 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불의를 덮어 두 고, 죄악을 인간적 정리 때문에 모르는 척 방관하고서 참된 평화가 이루어 질 줄로 여기는 것은 인간의 어리석은 생각일 뿐입니다. 쓰레기 통으로 쓸어넣어버린 문제 들은 오히려 더 많은 문제를 야기시킬 것이며 사태를 더 악화시켜 악취를 풍기게 될 것입니다.

EX>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죄악을 그대로 방치해 두면 어떻게 되는 지를 다음의 예화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그 누구보다도 열성을 가지고, 몸을 아끼지 않고 봉사하는 젊은 대학 생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이 청년을 보면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 큰 일을 할 사람' 이라고 칭찬이 자자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장래가 촉망되던 청년에게 애인이 생겼습니다. 애인이 생기고 난후 부터는 심각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일에 시큰둥해졌을 뿐만아니라 주일 예배도 빠지기 일쑤였습니다. 목사님이 찾아가고 친구들이 찾아가도 그는 그 저 근성으로 "다음 주엔 꼭 가지요"할 뿐이었습니다.

알고보니, 그 청년에게 생긴 애인은 지독한 무신론자였을 뿐 아니라 공공연히 하 나님을 비방하며, 조롱하는 여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청년은 그 여자의 미모에만 반하여 그녀를 좇아 다니느라고 신앙이고 뭐고 다 팽개쳐 버렸던 것입니다. 생각있 는 성도들이 찾아가서 왜 하필이면 그러한 여자를 좇아다니냐고 타일러도 보았지만 그는 오히려 화를 벌컥 내거나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시키는 말을 하곤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여자가 하나님을 믿 지 않는다고 하여서 어찌 그영혼이 소중하지 않겠습니까 두고 보십시오. 제가 그 녀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고야 말겠습니다." 하지만 모두 말 뿐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그녀에게 푹 빠져서 영혼이고 구원이고 아랑곳 없이 그녀가 하자는 대로만 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아예 교회에 발을 끊고 말았습니다. 한술 더 떠서 그는 자기 부모들한테까지 교회에 나가지 말 라고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집이 하나님을 믿으면 결혼하지 않겠다지 뭡니까 그러니 얼마간만 참아 주 십시오. 우선 결혼식이나 올려놓고 난 뒤에 그 사람이 우리집 식구가 되고나면 그 때가서 모두 함께 교회에 나가도 되지 않겠습니까" 청년의 부모는 어이가 없었지만 아들이 하도 성화가 불같아서 할 수 없이 몇주 동 안만 교회에 나가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식 장소 문제를 놓고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여자의 부모쪽에서 자꾸 만 예식 장소를 절에서, 그것도 불교식으로 드려야만 되겠다고 우겨댔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여자에게 눈이 먼 이 청년은 무턱대고 그 말에도 동의했습니다. 그리 고는 서둘러 가까운 절을 찾아가 결혼식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그 청년은 또다시 부모에게 와서 "이번만 참아 주십시오. 하자는대로 다 해주고 나중에 하나님께로 인도하면 되지 않습니까"하고 자기 행동을 합리화 시켰습니다.

이지경에 이르도록 그들 부모는 한번도 제동을 걸지 않았습니다. 맹목적으로 아들 을 사랑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올것이 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부모 마저 제대로 통제하고 다스리고 징계하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직접 손을 드셨습니다. 결혼식을 하루 앞둔 전날밤, 그 청년은 갑자기 복통으로 괴로와 하더 니 그대로 죽고 말았습니다. 적당한 시기에 적당히 제동을 걸고 징계하지 못한 그 집안이 풍지박산이 난 것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징계는 절대적으로 우리를 유익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 래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범죄한 자의 문제를 언급 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직접 상관하였던 그 문제는 마침내 바울과 교회의 사랑어린 관심으로 도움 을 받아 정당한 벌을 받았습니다(6절). 본문 6절에서 "이러한 사람이 많은 사람에 게서 벌 받은 것이 족하도다"고 했습니다. 분명히 이같은 징계는 범죄한 본인에게 유익한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에 우리가 부모로부터 매나 징계를 받을 때에 한번도 그 순간 달갑게 여 긴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매를 든 부모가 그 순간 원망스럽고 미워지고 싫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장성한 후에는 오히려 우리가 더 큰 벌을 받아 마땅하였 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각각 과거를 돌이켜 보건데 나의 부 모님께서 나를 징계하실 정도로 나를 사랑하셔서 내가 스스로 해받지 않도록 하신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려 마땅한 것입니다. 장성한 우리는 "맞는 너 보다 때 리는 내가 더 아프다"고 말하시던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의 징계에 대하여 사랑이 없다느니 화평을 깬다느니 하는 말 들을 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 미성숙해 있다는 것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3.성도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며 위로해야 합니다(2:7-11).

 바울은 교회가 범죄하여 징계 받아 회개한 자를 용서 하라고 강권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세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첫째, 우선 징계 받고 회개한 그 사람 자신을 위하여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즉 징 계로 인해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기지 않도록"(7-8절)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는 상한 심령을 치료하는 약입니다. 교회가 회개한 교인에게 사랑을 확인시켜 준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자녀를 징계하는 부모들이 따라야 할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징계를 하 되 사랑과 용서를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 징계는 유익이 아니라 오히려 해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 자녀를 징계 할 때에는 징계를 위한 징계 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를 위한 징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징계 후에 반드시 사랑과 용서의 표현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징계로 끝나는 징계는 자녀 의 마음을 황폐화 시키고 파괴시켜 삐뚤어진 마음을 키워나가는 원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징계받은 성도를 사랑과 용서로 받아들이고 용납하는 교제의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한 교회가 범죄한 형제 자매를 용서해 주고, 또 그 들의 죄가 잊혀졌으며 성도들 간의 교제할 권리도 회복되었음을 알려주고 격려해 준다면 이것이야말로 십자가의 용서와 주님의 사랑이 임재하는 것을 체험하는 계기 가 될 것입니다.

둘째로, 주님을 위해 회개한 자를 용서하며 사랑을 보여야 합니다(9-10절). 본문 10 절에서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라고 하였습 니다. 결국, 징계는 형제에 대한 마땅한 의무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 시에 주님께 대한 순종의 문제 이기도합니다. 단순히 범죄한 사람과 근심하는 사도 바울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앞에서의 문제이며, 무었보다도 주님께 범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징계는 교회의 대표자가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주 는 것으로서 주님의 징계입니다. 따라서 인간적인 여러가지 변명이나 생각들을 버 리고 주님 앞에서 겸손히 받으면 주님께서 주님의 이름으로 시행한 징계를 기뻐 받 으시고 용서와 사랑으로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심한 교회 지도자들이 범죄한 자들을 정직하게 대하지 않고 "회칠한 무 덤" 식으로 상황을 무마시켜 나가고자 한다면, 오히려 그들이 주님의 마음을 근심 시키는 자들이 되고 말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징계는 주님을 위해서 이루어져야 하며, 용서와 사랑도 주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셋째, 교회를 위해 회개한 자를 용서해야 합니다(11절). 본문 11 절에 "이는 우리 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다." 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단의 궤계란 교회가 죄 문제를 성경적인 방식으 로 처리하고 용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에서든 형제를 용서치 않으려는 마 음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 내에 있다면, 그것은 마침내 사단이 교회 내로 침투해 들 어와 역사하게 하는 교두보(교두보)를 제공해 주는 격이되고 마는 것입니다. 용서 치 아니하는 완고한 마음은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이며, "마귀로 틈을 타게"(엡4:2 7-32) 하는 것입니다.

사단의 간계 중의 하나는 죄 지은 신자들을 고소하여서 그들로 하여금 절망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셔서 우리가 그 죄를 자백하고 정결함을 받도록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게 해 주지만, 사단은 우리의 죄를 심하게 질책함으로 스스로 낙담과 좌절에 빠져 다시 재기 하지 못하도록 넘어 뜨리고 심각한 영적 질병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형제나 자매가 성경 말씀에 따라서 징계를 받고 회개하게 되면, 교회는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속히 잊어버리고 또 다시 언급히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우리 주님께서도 회개하여 용서 받은 죄에 대하 여는 다시는 기억지 아니하시며, 동이 서에서 먼것 처럼 멀리 옮기시고, 우리를 새 롭게 받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결론>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자리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인 간적인 사고방식에 밀리게 될 때에 교회의 시련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의 치리를 인간적인 판단으로 가볍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주 님께서 허락하시고 세우신 권위입니다. 교회의 치리와 다스림을 무시할 때에 마침 내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교회의 치리는 십자가의 사랑에서 시작된 것으로서 용서와 회복을 가져다 주는 축 복의 통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비함을 보이기 보다 사람들 앞에서 명예의 손 상을 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불복종하며 원망한다면 더욱더 교회를 혼란시키는 자가 되고 말것입니다.

참으로 치리와 징계를 달게 받고 회개한 성도를 색 안경을 끼고 경원시 한다면 사 탄으로 하여금 교회를 분열시키고 어지럽히도록 사단의 발판 역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과 사랑이 말씀 안에서 풍성한 교회가 되도록 겸손 으로 허리를 동이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