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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의 영광 (고후 0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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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과연 사도이냐 하는 문제로 많은 도전을 받아왔습니다. 물론 이것 은 바울을 시기하는 무리들로 부터 시작된 훼방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복음 을 훼방하려는 사단의 간교한 궤교가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 중에는 바울의 사도됨을 증명하는 천거서를 요구하는 무리들이 있 었습니다. 이에대해 바울은 새 언약의 우월성과 복음의 영광을 들어 반박 하고 있습니다.

바울을 반대하여 바울을 곤경에 몰아넣으려는 무리들 중에는 잘못된 복음 과 믿음을 가진 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들의 주장하는 바 그 핵심중 구원관에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그리스도 를 믿는 믿음을 가질 뿐만 아니라 율법도 함께 지켜야 된다는 것입니다(행 15:1). 신자는 믿음 안에서 모세의 율법을 순종해야 온전해 진다는 것입니 다. 이들의 가르침을 '율법주의적인 복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것이 당시 구약의 율법으로 인한 행위구원에 익숙한 유대인들에게는 참으로 잘 먹혀들어가는 논리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다운 의인 성령으로 말미암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보다 인간적인 종교성의 노력으로 성취하려는 종교적 의를 더 강조하는 것으로 서 진리에서 교묘히 이탈되어진 속아 넘어가기 쉬운 교리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을 가리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하는 자들", 즉, 어리석고 무지한 자들을 무더기로 갈취해 가려는 "종교적 사기꾼들"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의 잘못된 구원관을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지적하고 거절하였습니다(4:2). 이같은 엉터리 교리 로 많은 사람들을 회심시켰다고 자랑하는 태도의 어리석을 지적했습니다( 10:12-18).

그래서 바울은 이같은 일련의 사실들 앞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점 과 새 언약의 복음의 영광에 대하여 강조하며 가르키고 있습니다.

 1.돌비-육의 심비(1-3절).

 유대주의자들은 저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어떤 중요한 사람에게서 '천거 서를 받았다고 자랑합니다(1절). 그리고는 바울에게 그러한 신임장이 없음 을 지적했습니다. 이들은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 게 여기시는가 하는 문제 보다도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뭐라고 말하는가 하는 것에 더 의존하였던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평가보다, 사람들의 평가 에 대하여 더 관심이 컷다는 사실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최고의 신으로 섬기며 그 말씀을 복종하노라 외치지만 실제 생활 은 하나님을 무능한 고문관 자리에 앉혀놓고 거들떠 보지도 물어 보지도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요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 지도자들의 신임장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삶과 사역 그 자체가 가장 확실한 하나님의 보증이요 천거서였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일을 하나님께 인정 받는 일 보다 더 열심 내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을 바로 잡지 못하고 아무 소용없 는 쓰레기더미를 하나 더 차지하려고 위하여 그토록 애쓰고 힘쓰고 수고하 는 모습이 처량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실 때 그것을 돌비에 써서 주 셨습니다. 그 리고는 그것을 언약궤 속에 보관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들이 두 돌판에 새겨진 글들을 읽을 수는 있었지만,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 지는 못했습니다. 사람들의 삶이 변화 되려면 내적인 힘이 필요한데, 율법 은 외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주의자들은 '이것을 하라' 혹은 '저 것을 하지말라'고 훈계는 할 수 있지만, 그러한 훈계에 순종할 능력은 줄 수 없었습니다. 그 율법의 가르침을 지킨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음으로부 터 지킨 것이 아니라 겉치레 행동으로만 지킨 것이기에 결국 이전보다 더 나쁜 외식의 회칠한 무덤에 갇히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계명인 은혜의 사역은 사람의 심령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그것을 돌비가 아닌 사람의 마음 비에 새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율법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강력한 변화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을 바울이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모두 사악한 죄인들 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의 사역으로 인해 그들의 삶이 완전히 변 화되었습니다(고전6:9-11).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는 사실은 거짓 교사들의 인간적 천거서 보다도 훨씬더 의미있는 것이었습니다. 고린 도 성도들은 바울의 가슴 속에는 사랑으로 씌어졌고, 성령께서는 그들의 마음에 진리를 쓰셨습니다. 따라서 고린도 성도들이야말로 "살아있는 그 리스도의 편지"였습니다((1-3).

사역에 대한 평가는 어떤 보고서나 통계 숫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역의 대상자의 삶이 변했느냐의 여부에 의해서 좌우됨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 다. 율법주의자들은 외적인 표준에 의해서 사역을 평가했기 때문에 쉽게 자랑 할만도 했습니다. 왜냐면 이들은 인간적 기준에 맞춰 판단하고 그것 에 대한 공로를 자신에게로 돌리려 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 나님의 영에 의해 인도받는 지들은 주의 일을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방법으 로 해 나갑니다. 그리고 반드시 사역의 결실은 주님께 바칩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고 그 공력이 파뭍히기 쉽습니다. 그래서 조용 하고 별로 한 일이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결실을 하나 님께서 헤아려 어김없는 칭찬과 상급을 예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고 열매맺는 성도가 되시기 를 축원합니다.

 2.사망과 생명(4-6절)(옛언약과 새언약)

바울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를 지체치 않았습니다. 그의 확신( 신뢰)은 하나님께 있었으며, 그의 만족도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었습니 다. 바울은 명석하고, 교육받은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능력에 의지하지 않 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어떤 사람이든지 율법을 잘 지키면 신령하게 된 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이같은 율법적인 사역은 사람들의 이기심만 자 극시켜 삐뚤어진 외식과 자랑과 교만을 만들어 내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 래서 바울은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15:10)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한 충분한 능력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나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 말씀하는 돌비에 새긴 '의문'으로 된 율법으로는 우리에게 사 망만이 가져올 뿐입니다. 은혜의 복음보다 규칙이나 규정들을 강조하는 설 교자들은 성도들 을 어두운 죄의식의 구름 한가운데로 가둬버리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기쁨과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담대함을 말 살시켜 버리고 맙니다. 이러한 결과 끊임없이 서로를 재고, 결과들을 비교 하며, 서로 경쟁하는 그리스도인들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이같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육체에 의지했다 는 사실이 곧 드러나고 마는 것입니다.옛 언약인 율법 속에는 결코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에 의해 역사되는 성령의 은혜만이 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살아있는 편지로 변 화 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3.사라지는 영광과 나타나는 영광(7-11절).

 이 단락은 3장의 핵심적인 부분으로서, 출애굽기 34장 29-35절 말씀과 관련하여 연구해야 합니다. 바울은 예언약인 율법에 있는 영광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율법을 주시고, 법구궤와 성막 예배를 지속시킴에 있 어서도 분명히 영광이 있었시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새언약의 영광 이 훨씬 더 우월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몇가지 들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새 언약의 영광은 사망이 아닌 영적 생명을 의미합니다(7-8절). 모 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아 내려 왔을 때, 그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으 로 광채가 났습니다. 이것은 율법 수여에 따르는 영광의 일부였으며, 이로 인해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음이 분명하였습니다. 이 사실에서 바울은 비교 적 가치가 덜한 영광이 이러하거든 하물며 생명을 가져다 주는 영광은 어 떠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유대주의자들과 율법주의자들 은 율법의 영광은 극대화시키면서도 그것의 약점에 대해서는 가능한 극소 화하여 지나쳐 버리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이 러한 약점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율법의 결점이란 죄인을 의 롭게 할 수 없고(갈2:16), 죄인들에게 의를 주지 못하고(갈2:21), 성령을 주지 못하며(갈3:2), 유업을 줄 수 없고(갈3:18), 생명이나(3:21), 자유를 (갈4:8-10)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영광이란 사실상 사 망으로 역사하는 영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새 언약의 영광은 정죄가 아닌 영광을 의미합니다(9-10절). 율법은 구원을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율법을 순종하여서는 구원 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정죄만을 가져오며, 또한 우리의 얼 굴이 진실로 얼마나 더러운가를 드러내어 주는 거울의 역활을 해 줄 뿐입 니다. 하지만 거울로는 더러운 얼굴을 닦을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대속과 은혜의 복음으로 만이 사람의 더럽고 추한 것을 깨끗이 할 수 있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책감만 더하는 율법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복 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셋째, 새 언약의 영광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11절).

바울 시대에 율법의 영광은 이미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그 영광이 오직 기록된 성경 속에서만 찾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지금의 이 스라엘에는 성전도, 제사장도 없습니다. 지금 그들이 성전을 건축한다고 하더라도 과거 구약시대의 지성소에 거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다시 없을 것 입니다. 모세의 율법이 과거에는 가장 영광스런 종교였지만 이제는 아무런 영광도 없습니다. 이미 그빛은 사라졌고, 남은 것은 그림자 뿐입니다.(골2:16-17절).

 <결론>

우리에게는 천사들도 흠모하는 새 언약의 복음의 영광이 주어졌습니다.

이제 우리가 무었을 따라 살것인가 하는 것은 분명해 졌습니다. 외식적이 고 율법적인 틀에 얽매여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참 진리와 참 자 유를 누리며 말로 형용 할 수 없는 다가올 복음의 영광을 바라보며 오늘도 조용한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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