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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 (롬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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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4장에 대한 주제는 3:27-31에 나타나 있다. "자랑"(3:27)이란 말은 모든 인간의 성취, 그것이 종교적인 것이든 도덕적인것이든, 또는 그밖의 다른 종류의 것이든, 그런 것들에 대한 요약된 용어다. 그것은 "율법"에 의해서 배제될 수가 없는데, 이는율법이 행위를 통하여 성취하려고 하기 때문이며, 성취가 되었을때는 자랑이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이란 "행위"를 요청하는 것이면 어떤 종류의 법이든 해당이 되는것으로서, 모세의 율법이 아니더라도 행함에 의한 성취를 뜻하는것이면 율법이라 불렀다. 한편 바울이 우리는 "율법을 굳게 세운다"(3:31)고 말할 때, 그는 특별히 하나님의 뜻의 표현인 구약의율법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율법"은 행위를 요청하지 않고 믿음을 요구한다.

로마 4:1-25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참조:롬3:21-26) 바울의 주제에 대한 성서적 증거를 제공한다. 그러나거기에는 헬라적 논쟁법(diatribe)의 문제에 해당되는 요소들도있다(참조:4:1과 4:10의 수사학적 질문들과 3:27-31에 있는 똑같은 논쟁적 문제를 유의하여 보라). 그 중심 주제는 극단적인논의와 역설적인 문장 구조를 필요로 하고 있다. 구조는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1)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4:1-8:(2)그것이 할레자와 무할레자에게 미치는 유용성, 4:9-12:(3)아브라함에 대한 약속, 4:13-25, 이번 주일을 위한 제 2 일과는 첫번째및 세 번째 부분의 처음 부분을 취급한다.

첫번째의 수사학적 질문(4:1)은 아브라함이란 인물에 대한 모든 통용되는 해석을 부정하고 있다. 기존의 해석의 목적은 아브라함은 순종적인 인물이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친구로 불리웠다는것을(신약에서는 약 2:21-23을 참조하라.)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바울은 "그런즉 육체를 따라서 우리의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발견했다 하리요 "(이 번역은 RSV와 다른데, 이는 대부분의 고대 증거들에 의해 저지를 받고 있다)라고 묻는다. 그 대답

은 "은혜"다. "내가 당신의 보기에 은혜 [RSV는 호의(faver)로번역하고 있다.]를 발견하였으면"이라고 되어 있는 창세기 18:3을 참조하라. 만약 아브라함이 그의 순종에 대한 임정을 발견하였으면, 그는 자랑할 것이 있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은혜(grace)를 발견하였으면, 거기에는 자랑할 아무 이유도 없었다--그 자랑이란 어쨌던 하나님 앞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리라. 이처럼 아브라함은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다(참고:3:27). 로마 4:3은 창세기 15:6을 인용하면서 RSV에서 "여긴다"(to reckon)는 말로 번역된 용어를 소개하는데, 여기에서 반복해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가 된다. 그것은 사업상의 말로서 "다른 사람의 제정에 기입하다"(입급이든 대출이든)라는 의미다. 로마 4:4은 "은혜"의 개념을 일과 삯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업의 세계에 연결시키는, 터무니 없는 일반율에 대한 것을 인용하고 있다. 한편 하나님이 행하시는 "회계"(accounting)의 종류도 종교적 가치의 세계에 들어맞지 않는다. 이것은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인 4:5에 의해 보여지고 있다. 사해에 있었던 쿰란 종파의 한 문서에서는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 [사독의 문서(CD)1:19)을 불경건에 대한 최악의 예로 보고 있다--이것은 물론 회계하는 죄인을 받아들이는 것은 경건한 행위로 구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하나님은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고 하셨다"고 말한다. "불경건한"(ungodly)이란 말은"경건한"(pious) 및 "종교적"(religious)이란 말의 극단적으로반대되는 용어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불경건하고 비종교적인 사람을 의롭다고 하시는 신앙의 모범 인물이다.

로마 4:6-8은 또 하나의 성서적 증거인 시편 32:1-2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는 이 본문이 하나님을 죄를 "계산하지"(reckon)않는 분으로 보고 있기때문이다. 로마 4:9-12은 아브라함에게로다시 돌아오는데, 이번에는 '구속사에 있어서 아브라함 신앙의중요성'이라는 두 번째 요점을 논의하기 위해서 창세기 17:10-11을 언급하고 있다. 4:13-17에서는 "약속"이란 말이 중요한 용어다. 그것은 일반적인 미래에 관련된 약속이 아니라 특별히 조상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참조:롬 15:8, 롬 4장과 갈 3장에 나오는 아브라함, 갈 4장에 나오는 이삭을 보라). 유대인들에게는 이 약속이 율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율법과 언약의 성취는 약속울 실현시키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약속과율법 사이에는 아무 연관도 없는데, 이는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이 온 세계의 상속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4:13은 약속을 특별하게 제한시키려 하는데 대해 반대하고 있다. 로마 4:14은 약속과 믿음을 동일시하면서 상속(inheritance)과 율법의 연관성을 부인하고 있다. 이는 어떠한 율법이든 범법(transgressi-on)을 가져오기 때문인데, 이 문제는 "율법"의 영역에서는 해결될 수가 없는 것이다(4:15).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이 자유롭게 행동하시고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나("은혜") 주실 수 있는 영역을 뜻하고 있다. 그럴 때에라야만 하나님의 행동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장될 수 있다(참조:이 "모든"이란 말은 4:16에 반복되고 있다). 로마 4:17에 있는 창세기 17:5의 인용은 이 주제를확증하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은 경건하고 도덕적인 사람들에게좋고 나쁜 등급을 매기는 데 만족하지 않으신다.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자랑할 무엇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불경건,즉 하나님의 능력과 자유에 대한 모욕이다. 하나님은 그의 주권적인 능력을 통하여 없는 데서 있게 하시며, 죽은 장에게 생명을주시는 창조자이시다. "믿음"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을 통하여 새로운 창조를 이미 시작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다(4:24-25)--이것은 "우리"가 죄와 용서라는 교묘한 도식 안에서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산하시는"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계산 평가는 다른 사람들의 것보다 나을 것이 조금도 없다. 아브라함은 우리의 생각과 다른 증인이 된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 것--은혜 외에--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 2주제: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두 단계가 있는데,각각은 창세기의 아브라함 안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아브라함을 성취에로 길을 계획하는 사람 으로서 이해하며, 제 4복음서의 그리스도는 성취로 들어가는 새 아브라함으로서 말씀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가졌던 유일한 "올바름"은 하나님의 방향, 즉 하나님의 의도와 임재였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확신에 의해 적응시켰다! 우리가 말하는 '믿음만'이란 그것이 오로지 언제나 은혜이기 때문인데, 이는 은혜는 길"이었기"(was)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위에 "길잡이 표적을 새겼다"(blazedthe trail). 그것은 길에 표적이 새겨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가 가는 곳에 도달한 것이 상급이었는데, 그것은 길을 만들기 위한 것도, 땅을 답사하기 위한 것도,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한 것도, 또는 어떻한 다른 업적을 세우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오직 그는 종점과 상급이 있을 것이라는 것과 그 둘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라는 점을 믿었기 때문에 간 것이다. (만약에우리가 적어도 잠시 동안이라도 여기에 결합되어 있는 이미지인"행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도움이 될 것인가 "믿음"도 우리가 어떤 내용을 부과하기 전까지는 어떤 능동적인 비유가아니지 않은가)

어떤 의미로 이러한 여행의 이미지가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케 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는가 그것은 개척자들이 록키 산맥(사실 횡단해야 하는 그러한 산들이 있었다는 것이 발견된 것이다.)을 지나는 한길이 "있었음" (was)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덮개를 한 짐마차가좇아 갈 만한 "오레곤 산길"(19세기 전반에 개척자가 발견한 미조리주에서 오레곤주까지 이르는 길:역자주)은 없었다는 의미에서다. 아브라함이 보지 못하였던, 그러나 또한 그가 본 것은, 즉그를 위해 존재하지 않았던 그러나 가정과 같이 친밀한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예견"(fore-seen)되었고 미리 실재를 갖도록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라는 의미의 일부분이다. 도착한 아브라함은 도착하기 전에 "죽어 있었으나", 도착함으로써"거기 있는 아브라함"(Abraham-there)으로서 살아 있다. 조상 아브라함은 또한 창설자 아브라함이다(주석을 보라).

이것은 신앙의 삶(life-in-faith)인데, 진부한 의미에서 "모든것이 잘 될것이다"라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기독교적 의미,즉 앞을 내다보며(proleptically) 사는 것을 으미한다. 왜냐하면믿음이란 아브라함적인 의미에서 "종말론적"이기 때문에, 즉 우리를 만나려고 이미 그 길에 있는 것에 대해 기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이렇게 작용하며, 기대를 가지는 것이어서 언제나 희망으로 연합되어 진다. 우리가 이렇게 행하여 나가는 것은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확신과우리의 효율성과 우리의 성취와 우리의 덕에 있어서 놀라운 바가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것에서 부터는 멀다. 우리는 주저할수도, 의문을 표시할 수도, 불평할 수도 있으며, 신뢰하는 대신에 거래를 하려 하거나 분명히 어떤 것을 성취하지 못하거나 거룩한 것에는 미치지도 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 "기묘한"(queer) 분이시다. 우리의 표준으로볼 때 하나님은 엉뚱하다(odd)--이는 단지 하나님이 우리가 이미 도달한 것처럼, 우리를 장차 될 바의 사람들로서 인정하시고취급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편성이 가능해지는 것인데,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모든 민족을 위한" 것이 실현된다. 그의 유전성 때문이 아니라 그의 특질(믿음의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때문에 후손들, 즉 보편적인 민족이 생겨나게 된다. 이렇게 한 경계 안에 들어온 우리들에게 어떤 일련의 규제도 없고, 다만 신앙 행동(faith-action)은약속의 후사들을 구별해 준다. 이러한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은아무런 제한도 없는데, 하나님께 제한을 주는 것은 그를 단번에"하나님이 아닌 분"(not-God)으로 만드는 것이리라. 오로지 이기반 위에서 상속이 있고 성취된 약속이 있다. 이 모든 것은 규제보다 앞서 있고, 이미 없었던 것을 규제할 수 있을 뿐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을 창조할 수는 없는 "율법"보다 우선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장소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 후대의 세대들은아브라함의 "표시들", 즉 그의 깨달음의 제단을 기존의 율법, 기존의 계층 구조 (hierarehies), 간단히 말해 "기존의 제도"

(establishment)를 가지고 사당(shrines)으로 만들지 모른다. 그러나 "이 분이 그다" 또는 "저 분이 그다" (막 13:21을 보라)라고 하는 이상의 "여기" 혹은 "저기"란 없는 것이다. 어느 것이되었든 우리를 예수와 여인에게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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