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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혹 (창 02:7-9, 롬 05:12-19, 마 04:1-11)

첨부 1


이 귀절들을 뽑은 것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강조하기 위한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별을 따로 하는 것은 위험스럽다. 왜냐하면 그것은 잘못 해석된 오랜 전통에 깊이 연결된 귀절들의 분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에 속하는 것은 뱀을 사탄과 동일시 하는 것과, 인간 생활 중 죄악된 성적 차원의 발견으로서 "타락"(fall)을 이해하는 것과 여성을 죄악된 욕망의 기원으로 해석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헤석 중 어느 것도본문에서 그 바탕을 찾을 수 없다. 만약 누구든지 이 뿌리 깊은전통적 해석의 함정을 피하고 싶으면, 이 귀절들이 취해진 전체의 문맥, 즉 창세기 2:4-3:24을 검토해 보아야만 한다.

이 두 장의 저자는 태고로부터 이야기로 전하던 (storytelling) 종교적 전통에 분명히 속했을 두 종류의 오랜 이야기들을 함께 결합해 놓았다. 첫째 이야기는 대충 창세기 2;4-8과 18-24을 포함하는 창조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전통적인 창조의견해에 대해 깊은 불만을 가지고 있다. 즉, '사람은 진흙으로 한인간이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입김으로 생령이 되었다'는 것과"하나님이 말씀 하시기를, '(보시기에)좋지 않다'"고 이야기를전개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돕는 사회적 존재다 ["돕는자"(helper)]. 둘은 상호 협력 안에서 함께 함으로써만 인간(mankind)이 된다. 이것은 2:24의 결론에서 최종적으로 표현되어있다. 물론 이것이 성적 관계를 포함한다 해도, 그것이 이야기의주요 동기는 결코 아니다.

창세기 2-3장에 있는 두 번째 이야기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낙원의 묘사를 삽입함으로써 (2:9-17과 25) 2장에 이미 그것을 예비하고 있다. 낙원에 관해서 설명한 자세한 내용들(그 풍성함과 경이로움과 생명 나무)은 3:16-19에 있는 인간존재에 관한 진술 (고통과 수고와 땀과 사망)과 대조를 이룬다.
질문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어찌하여 낙원은 인간에게 폐쇄되어 있고, 어찌하여 인간의 생명은 우고가 많은 짧은 일화에지나지 않은가 대답은 고도의 해학적인 내용은 물론 고도로 개발된 설화자(narrator)의 기술 (극적인 행동과 대화)을 밝히고나타내는 형태로 주어져 있다. 그 이야기는 또한 바벧론 및 가나안의 기원을 가진 다수의 신화적 개념 (생명 나무, 낙원에 흐르는 강, 뱀의 형상)을 담고 있다. 창세기 3:1-7은 극적인 행동과대화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으며, 왜 사람들의 문화 및 경제적 상황이 이 상태인지, 그리고 왜 "낙원"에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없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과 (그로 인해) 불멸성을 가지게 되는것"은 신의 음식을 함께 나눔으로써 죽지 않게 되는 고대의 동방신화의 문맥에서 이해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보통 두 신의 질투에 관해 이야기 하는데, 한 신은 그가 소유하고 있는 나무의 비밀을 지키려는 신이고--그래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이 있다--또 다른 신은 이러한 계획을

파괴하고 질투로 말미암아 금지시킨 바를 드러내려고 하는 신이다. 후에 영지주의적인 뱀신(Ophites)과 같은 기독교 이단들은이러한 신화를 재생시켰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뱀이 구약에 나오는 질투심 많은 하나님의 전제로부터 인간을 구원하는 참 하나님의 대표자였기 때문이다.

성서에 나오는 형태 안에서 그 이야기는 신화적 내용을 상실하고 있다. 뱀은 "단지" 하나의 사악한 동물이 되었다 (참조:3:14-15). 비록 저자가 뱀의 종교적 상징을 충분히 알고 있는 것같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뱀을 하나의 동물로 낮춤으로써 저자는 종교적 의미에서 "하나님과 같이 되는" 이해에는 문을닫고 있다. 그 남자와 여자는 나무 실과를 먹음으로써 진실로 하나님과 같이 되었지만(참조;3:22!). 다른 의미에서, 즉 "선과 악의 지식"(Knowledge of good and evil)을 소유하였다고 말한다.
이 지식은 성적 욕망과 특별한 관계가 없으며, 실과를 먼저 먹은사람이 여자라는 것이 (비록 그것이 설화자의 고도로 개발된 기술의 한 부분이긴 하지만) 이야기의 의미의 본질적인 중요성을제공해 주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선과 악"이 도덕적 의미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 개념보다 문화적 개념이다. 즉,선이 의미하는 바는 "유용하고",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등의 개념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발명하고 창조하는 능력인 것과 같이, 이에 상응하는 인간의 지식은 문화와 문명을 창조하는지혜와 창조성이다. 그래서 저자는 벌거벗음(2:25)으로부터의 문화적 발전을 강조하고 있는데, 나무로부터 옷을 해 입고(3:7),종국에는 동물의 가죽으로 옷을 해 입는 (3:21) 것이다.--이것은 불멸성을 찾으려는 종교적 신화의 제안에 반대하여 낙원 밖에서의 문화제 속에서 인간의 상황을 현실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원 이후의 문화적 상태에 대한 이해가 세속적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의 법을 어긴것이 이러한 상황을 만들었고, 하나님의 저주가 이 상태를 결정한 것이다. 그것은 문화 발전의 댓가로 치룬 것이다. 즉, 즉각적인 죽음이 아니라 수고와 애씀과 궁극적 죽음이 그 댓가이다. 이러한 인간 생활과 문화에 대한 신학적 견해에 "원죄(originalsin)에 대한 깊은 종교적 견해가 상응하고 있다. 그것은 어떤 금지 사항에 대한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이들 인간들이 함께 그를통해서 스스로 하나님의 지위를 차지하려 했으며 그들 자신의 문제를 다스리려고 했던 행동이었다. 이 원죄는 인간의 삶이 저주아래 놓이게 된 것 (3:14-19)과 낙원이 철저하게 폐쇄된 것(3:24)이라는 실제적인 결과만을 남기고 있다.

제 2주제:로마 5:12(13-16), 17-19
로마 5:12-21은 모든 인간이 죄와 사망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원초적 인간에 대한 유대교 및영지주의의 신화적 사고를 반영하고 있으며, 바울 당시에 중요한역할을 했던 하늘로부터 온 구속자에 대한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참조:고전 15:21-22, 45-49도 보라). 이러한 사고는 원초적 인물과의 운명적인 일치를 의미하며, 빠져 나갈 수 없는 연대를 통하여 정죄와 구원을 이해하는 것이다. 바울이 아담과 그리스도의유형론(typology)에 대하여 묘사할 때, 그는 반복해서 이러한 개념과 그 결과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 이것이 이 난해 귀절의복잡한 문장 구조에 대한 주요한 이유이다. 바울은 유형론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 논리적 결론들은 피하고자하는데, 이는 존제질서로서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아담의 옛 질서에 꼭 상응하지도, 운명적인 필연성의 관계에 일치하지도 않음을 보기 때문이

다.
로마 5:12은 창세기 2장과 3장에 대한 당시의 유대교의 이해를인용함으로써 시작하고 있다. 즉, 그 이해란 '한 사람(아담)과그의 범죄를 통해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에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말을 삽입하고 있다. 모든 인류가 아담의 범죄(혹시 모르고 그랬다 하더라도) 때문에 당해야 하는 것은 단지 사망 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관여되어 있다는사실이다--"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어거스틴 이래로이 문장은 "그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로 읽어왔고, 이러한 해석은 원죄의 교리에 대한 논쟁, 즉 모든 사람은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나는 불가피한 운명을 타고났다는 논쟁에사용되었다. 그러나 바울이 죄란 보편적인 실재라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12절의 마지막 부분에 대한 올바른 해석은 모든 아담적인 인류를 죄와 사망에 종속시키는 것은 모든 사람의 능동적인참여 때문이라는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생명이 이르렀다"는 예상된 상응 귀절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에 5:13은두개의 괄호로 시작되고 있다. 첫째 괄호, 즉 5:13-14은 죄를 지은 것이 죄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로 "여김"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 국한되지 않음을 명백히 한다. 이것은 죄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질문을 받았다면, 바울은 로마 1:18 이하에서처럼하나님의 뜻이 창세로부터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다고 주장했을것이다(참조:롬 7:8 이하에서도 율법은 오로지 죄를 깨닫게 할뿐이라고 말한다). 5:14의 결론적인 부분,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type)이라"는 말씀은 두 번째 괄호의 주제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다음의 유형론은 아담과 그리스도의 상응성을 그 외관 구조에서 이미 깨뜨리고 있다. 5:15과 5:16-17의 구조 ["...같지아니하며, ...(그러나) 더욱..."]는 여기에 유비(analogy)가 없음을 강조한다. 유형들은 반제들(antitheses)이 되고 있다. 이중 첫째 것(5:15)은 둘의 유형이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것(참조:"선물"과 "은혜"의반복에 유의하라)은 아담의 범죄와 비교해서 전혀 다른 차원의실재에 속하기 때문이다. 구원은 아담의 원래의 축복된 상태로단순히 되돌아가는 것으로 이해될 수 없다--그러한 이해는 창세기 처음 부분에 대한 많은 유대교 및 영지주의적 해석의 요지를 이루고 있다. 두 번째 반제(5:16 상)에 이어 유형론의 구조를보다 근본적으로 이탈하는 두 설명(5:16 하반절과 5:17)이 따르고 있다. 서로 간에 상응하는 아담과 그리스도의 문제는 더 이상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많은 사람의 범죄에 대한 병열로써 아담의 범죄가 논의되고 있다. 즉, "한 사람의 범죄는 정죄를 가져왔고--많은 사람의 범죄는 의롭다함을 가져온다"(5:16 하)고하며, 이와 마찬가지로 두 번째 설명에서 "아담의 범죄를 통하여사망이 왕노릇 하였고--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의 풍성함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왕노릇하게 될 것이다"(5:17)라고 말하고 있다.

은혜와 생명은 죄에 사망에 대한 단순한 반대어가 아니다. 죄는 정말 치명적인 세력이다. 그러나 은혜는 그 반대자를 자기 목적에 맞게 사용함으로써 범죄의 풍성함을 기초 위에 은혜의 풍성함을 확립시킨다. 아담적 인류는 폭정과 노예 제도가 존재의 구조인 죄와 사망의 폐쇄된 궤도 안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은혜는 그 사악한 궤도 속으로 바로 들어가, 생명과 왕권을 소유하도록 하는 길로, 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인도한다. 이것은 다른 이미지(imagery)를 필요로 한다. 거기에는 은혜와 생명으로

된 폐쇄된 궤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기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역설적인 관계가 있다. 과거는 범죄에 의해결성된 것으로써 "은혜의 다스림"(rule of grace)을 확고하게 세운다(롬 5:21). 생명과 왕권의 미래는 환란에도 불구하고 현재의자유와 의 안에서 이미 예상되고 있다(롬 5:3 이하).

이러한 조건 하에서 바울은 그가 5:12에서 시작한 문장으로 되돌아갈 수 있으나 불완전한 채로 남겨 두었다. 로마 5:18과 19은엄격한 평행 귀절(parallelism)로서 두 개의 유형론적 주제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5:12에서 시작한 처음 문장에 의도했던 상응귀절--아담의 불순종을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오고,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생명이 왔다--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신에 5:18은 정죄를 사죄와 병열시키고 있다.
또한 5:19은 "제한된 것"과 "의인된 것"이 대조되어 있다. 아담유형론의 일차적인 유용성은 바울로 하여금 구원의 보편성을 강조할 기회를 갖도록 한 것이어던 바, 이는 그 유형론이 정죄의보편성에 대하여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는 이들의 새로운상황의 "의" (righteousness)로서 특정지워진다면, 아담 유형론은 숙명적인 과거로부터 신앙의 역사적 차원으로 의식적인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그 과거를 설명하고 아직 오지 않은 궁극적 성취를 실현하는 것으로서 현재를 이해하는 실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복음서 주제:마태 4:1-11
마태와 누가 복음에 있는 예수의 시험에 관한 이야기는 이 두복음서의 두 번째의 공통적 자료, 즉 공관적(synoptic) 말씀 자료 ("Q")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예수를 낙원에 있는 사람으로묘사하는 마가 1:12-13의 간단한 이야기를 대체하고 있다. 참고로 현대 유대교의 납달리서 8:4에 보면, "사람들과 천사들이 너를 축복할 것이며, ...그리고 마귀는 너에게서 도망하고 들짐승들이 너를 두려워할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광야에서 40일 간 있었다는 언급은 이 동기에 속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동안 광야에 있었다. 또 모세는 성산에서 40일을 보냈다(출34:28). 또 엘리아도 하나님의 산에서 40일을 보냈다(왕상19:8). 이처럼 예수의 시험은 원초적으로 낙원에로의 회귀의 시작으로 보여진다.

마태와 누가의 자료에서 그 이야기는 하가다 (Haggadah), 즉교훈과 권고를 위해 이야기의 형태로 율법을 해석하는 내용으로확대되었다(Haggadah는 행위에 대한 규율의 형식으로 율법을 해석하는 Halakah와 구별된다). 이것은 우리의 본문에 대한 보다널리 퍼진 세 가지 해석을 배제시킨다.
(1) 이 본문에서 예수의 시험을 정치적 메시아가 되는 기록으로서 보는 역사화하는 이해
(2) 예수께서 신적인 능력을 행사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질문과 관련하여 예수의 갈등을 말한다는 심리학적 해석(3) 예수께서 자신의 행동을 하나님의 뜻 아래 준속시켰다는증거로서 이 이야기를 사용하려는 조직 신학자의 관심하가다로서 이 이야기는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 위험이되는 그러한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처럼 이 본문은 행위와 윤리의 문제에 관심하고 있다. 이러한 윤리적 문제는 초대교회에 있어서 기적과 그것의 정당화의 문제였다. 보다 현대적인용어로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의 과시 대 하나님의 뜻의수용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첫번째 유혹은 '배가 고프다면 왜 당신은 돌로 떡을 만들지 않는가' 하는 유혹자의 질문을 불러 일으키는 이야기의 동기로서광야에서 머문 내용을 사용한다. 이것은 예수 뿐만이 아니라 성령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도 억시 이러한 기적을 행할 수 있음을암시한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신명기 8:3을 인용하여 그러한 능력의 사용을 거부하는데, 이는 기적이 필요하다면 그것을 행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신뢰 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은훌륭한 일의 성취를 통해서 세상을 구원할 어떠한 의무도 없다.
두번째 유혹은 장면이 바뀐다. 마귀 자신이 지도자가 되고 있다. 예수께서 첫번째 유혹에 대한 대답에서 강조한 것은 하나님신뢰인데, 지금 마귀가 성서를 인용함으로써 (시 91:11-12) 바로그 하나님 신뢰를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마귀의 창의력에돌려서는 안 된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성서가 그들에 반대적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한 성경 귀절을 가지고 다른귀절을 비판하는, 유대교에서 이미 사용되던 원리를 따라서 신명기(6:16)가 또 다시 "기적을 구하는 자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라는 대답을 제공한다. 만약에 그리스도인들이 기적을 구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음을 나타내고, 기적을 행하는것 이외에는 다른 아무 선택도 하나님께 남겨 놓지 않는 어리석은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세번째 유혹에도 새로운 장면이 등장한다. 이 경우를 첫번째와두번째 유혹과 비교하면 확실한 구분을 발견할 수 있는데, 마귀는 여기에서 "나를 경배하라!"고 말하면서 경건한 체하는 어떤모습도 보이지 않고 있다. 만약 이 말을 이 세상의 선한 것들(권력, 선한 생활, 위로 등)을 추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궁극적으로마귀의 권세에 굴복하게 되는 것으로 해석하면, 이 장면의 요점을 놓지게 된다. 오히려 사탄 숭배는 이 세상을 소유하는 시작이며 조건이 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권세의 상호 배타적인 주장을반대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경배할 하나님은 한 분 뿐이라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을 인용함으로써 (신6:13) 대답하는 데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교회는 교회 자체의 상황이 여전히 최종적인 성취 이전의 상황이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예수의 시험은 계속되는 교회의상황을 위한 예이다. 마태 4:1-11은 교회에 문제를 던져 주는데,마귀가 정서적 신앙의 바탕 위에서, 심지어는 공개적으로 사탄을숭배하도록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는 능력을 어느 때 보다도 갈력하게 발휘하는 상황에서 교회가 실제적이고 충성스러운 결정을내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설교를 위한 해석

인간성이 어떻게 이 본문에 흐르고 있는지 주의하여 보라:인간적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인간적으로 남아 있으며, 인간성의 내재적인 위험은 무엇이며, 인간적이 되는 방법이 한 가지이상 존재하고 있는가 여기에 흐르고 있는 사상은 권력과 결속에 대한 중대한 문제인데, 따라서 인간 권력(들)의 의미와 사용에 대한 문제이다. 성(sex)은 그와 같은 하나의 힘이지만, 마귀가 달라붙어야만 그런 해석에 유일한 단서가 되기 때문에 (창세기 2장의 주석을 보라) 우리는 성에 사로잡혀서도 안 되고 또 그것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어떻게 그 모든 것을 사순절에 연결시킬 수 있겠는가

우리가 헤쳐 나가야 할 문제에 대한(특히, 창세기 본문에서)

보편적인 잘못된 개념들에 유념하라(주석을 보라). 이런 잘못된개념들은 하나의 설교에서 극복될 수 없으며, "신화"라는 말을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백지화시킬" 필요도 없는 것이다. 즉 우리가 혼동하지 않고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것이 바로신화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신화는 인간문제에 대한 보다 명백한 차원을 개발해 준다. 무엇인가 기본적인 것을 알고 그 주제를 단번에 모든 가르침에서 전개시킴으로써 회중의 마음을 거기에 집중시키게 하는 것이 최선이다.

근본적으로 두 종류의 인간성, 즉 원초적 및 종말론적(이러한단어가 쓰이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인간성이 문제가 되어 있다. 기원에 관한 옛 이야기에 보면 아담은 신과 같은 존재가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새로운 결속 관계(allegiance)에 굴복시킨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불순종한다.
그 결과는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이라는 인간 조건이다. 낙원은 폐쇄되어 더 이상 선택할 수 없게 되고, 인간은 그곳에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이는 이 일괴 이외에서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찾아야 되는 것은 되돌아가는 것이 아닌 앞을 내다보는(종말론) 것으로부터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인간성은 파멸일 뿐인가 바울이 말하는 바대로 우리는그것에 고착되어 있다("아담" 때문에--유전으로 발생한 원죄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인간은 되돌아가서 불행한 결정 이전의아단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룻소의 "고상한 야만인"(noblesavage), 이외에 다른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를 인간성을향유하는 데서 방해하는 것은 "단지" 왕들이나 제사장들이나 조짓체나 "제도"(establishment)가 아니다. 우리는 "은둔할" (cop-outs) 가 될 수도 없다. 우리가 필요로 하고 가지고 있는 것은신중한 선택에 의해서 아담의 선택이 거부되고 다른 선택이 이루어질 때, 인간성에 대한 새로운 전망(새로운 "아담")인 것이다.

여기에는 경계를 멀리하고 있는 두 극단이 있다. 한쪽은 포기하는 쪽이다. 이 견해는 우리 안에 짐승이 있어서 우리가 짐승처럼 행동해도--성적으로나 권력의 사용으로나--인간은 비난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짐승을 본성적으로 포악하고 자기 종족에 대해서조차 죽이는 성질이 있다고 보는 것은 동물 왕국에 대한 모욕일 뿐이다. 다른 극단은 인간의 밤법에 의해서 인간성을탈피하려고 시도한다. 즉, 인간성은 지고하며, 그래서 인간성을포함한 어떤 것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고, 여전히 그렇게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돌아가 하나가 된다"고 한다. 짐승과 '자신의 운명을 창조하라'는 형태는 다같이 결속의--혹은 잘못된 결속의--양식이다.

그것이 마태가 밝혀 놓은 것이다. 인간보다 못하게 되기는 매우 쉽고, 다른 사람을 인간보다 못하게 대하는 것은 지극히 쉬운일이다. 인간보다 더 낮게 되려는 것은 인간보다 못됨을 통해서종국에 도달한다. 인간의 운명은 인간 이상의 어떤 존재가 되는거이 아니다--우리는 그것을 최선으로 붙잡았다. 성육신의 심원한 진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인가닝 뒤졌다는 것인데, 그 인간성을 그리스도의 인간성의 형상을 따라 만드는 것이지 천사나 다른 무엇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짐승이 되도록 의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또한 스랍이나천사가 되도록 고안된 것이 아니며, 더군다나 로보트가 되도록창조된 것은 더욱 아니다.

순종이 실패했으니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지식(아담의 발견)에 의존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인간의 철학, 과학,기술에 구속되고, 그리고 이것은 이상하게도 (또는 섭리에 의해서) 우리를 인간보다 못하게 하는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자연, 즉 우리 자신의 몸과 마음의 환경을 포함한 생태계 또는 그 환경을 지배하는 가까운 지점에 위험스럽게서 있으며, 그 사실이 그 모든 것을, 심지어 이제까지 유전을 통해 다스려지던 것까지 우리가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질수 있게 되었으며, 이 땅과 인류를 우리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려고 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미 파멸의 선을 넘어섰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구 우주선"이 기술공학적이고 권력에 미친 인간성을 지탱하는데 얼마나 연약한가 하는 것과 인간의인격은 컴퓨터가 되는데 그렇게 저항적이 아닐지 모른다는 사실을 눈여겨 보아왔다. 우리의 운명을 아무런 결속 관계를 갖지 않고 다른 누구에도 책임이 없이 우리가 마음대로 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또 다른 지배 하에 두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마귀" 또는 더 낮게는 "사탄"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신화적으로), 이 말은 번역하면 "적대자"가 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신화적으로 "둘째 아담") 안에서 제시된 인간성에적대적인 어떤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쪽에든지 참여하는 것은 "불가피한"(koester) 일이며, 따라서 무수한 선택이뒤따르게되는 결정과 결단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신학적으로쉽게 형성되거나 강단에서 쉽게 설명되는 반제들(antitheses)은그 끝이 숨겨져 있는 기괴한 집적체(集積體)이며 분명하지 않은혼합물이어서, 그 진정한 모습을 감추는 가면을 쓰고 있다. 인간성과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모든 질문은 끝이 보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앞이 내다보이는 끝을 향해 열려 있다.
우리는 어쨌든 되돌아가 유혹할 사과를 갖고 있지 않은 아담이나하와(주석을 보라)가 없는 아담이 될 수는 없다.

이것은 유혹 이야기를 다루는 한 가지 방법이다. 분명히 예수께서는 여기에서 평야에서의 이스라엘의 시험은 물론, 유혹 아래에 있던 아담의 실패를 역전시키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아담과 이스라엘과 예수의 경우에서는 다같이 "시험"(test:유혹(temtation)이란 말이 현대적 용법으로 낮춰진 것)이 단순히 하나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시험의 형태가 어찌되었든(생명 나무, 하늘로부터 내려온 만나. 돌을 떡으로 바꿈), 문제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표적을 제공해 주고 자신을 정당화시킬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유혹에 연관된 문제 중에 아무 것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문제가없으며, 또한 개인 윤리의 제한된 의미에서 순수하게 도덕적인문제도 없다. 문제는 인간의 상황에 기본이 되는 한 가지 요인을갖고 있다--즉 사람들을 지배하는 권력의 사용, 특히 "성공적인" 권력 사용을 하나님의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관심에 반대해서사용할 때도 하나님께 원인을 돌리려는 유혹이 그것이다. 마귀는그 "타자"(other), 즉 태초부터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권력의 사용을 허락한 것으로 생각케 하여 권력을 사용하는 인간을노예로 삼고자 권력을 추켜 세우고, 심지어 권력을 제공하기까지하는 피할 수 없는 궤계를 가진 대적자이다.

우리는 실제로 거의 문자적 의미에서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할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빵"(bread)은 권력의 형태이며, "빵"은넓은 의미에서 인간을 지탱해 주고, 힘을 제공해 주고 즐거움을가져다 주는 바, 모든 것의 필수 요소가 되는 형태이다. 그것은

언제나 통제의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는데, 생산, 또는 분배의 조작을 통해서 지금은 전세계적인 규모의 통제가 일어나고 있다.
빵을 보장하고 빵이 가진 힘을 보장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지배권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이 진실로 아버지가된다는 증거로서 빵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전을 받았다. 예수의응답은 "그것이 필요한 전부는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사람은"빵 만으로" 살 수 없고 궁극적 이해와 결속으로 산다. 빵이 하나님의 선물인가의 여부는 그것이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거나 자유롭게 하는 것에, 또 그것이 사람들로부터 본질적인 인간성을탈취하거나 그들을 진정으로 인간답게 하는 것에 달려 있다.
이제(주석을 보라) "다른 자"(that other one)가 성경을 들고그 말을 인용하여, 종국에는 그가 하나님보다 잘 제공해 줄 수있다고, 따라서 경배를 요구할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하기에이른다.

기적을 행하는 것은 영향력과 지배권에 대한 유력한 원천이 된다. 왜 하나님께 도전하여 가능한 선까지 하지 않겠으며, 하나님을 몰아붙여 모든 의심을 제거하고 분명한 표지를 보여달라고 하지 않겠는가 성경에도 그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는 듯 한데, 정말 왜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사람은 놀라운 일에 "중독"이 될수 있다. 그들은 빵에는 물론 서커스에도 의존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형태의 중독과 마찬가지로 자멸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더 크고 더 훌륭한 기적을 필요로 한다.
즉, 사람은 보다 강력한 것을 위하여 자유를 팔아넘길 용의가 있다. 그것은 기적을 제공하는 자에게 노예가 됨을 의미한다.

예수의 기적이 반대자들의 경우에는 바로 목적을 이루었다고생각되었는데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결정적이 되지 못했다는사실이 그들을 괴롭혔다. 모든 의심을 풀어줄 기적이 요구된 장소는 성전이었는데, 예수는 성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자(사탄)에 의해서 그곳에 인도되었다. 루터가 신학적 반성을 하며 바울이 요구한 대로, 영들은 시험을 받게 되었는데, 이는 의심할여지 없는 기적은 자명한 것이아니기 때문이다. 누구와 연합(또는 결속)하여 그리고 어떤 목적에서 행하여졌는가 귀신을 내어쫓는 것은 분명히 자유케 하는 수단이며 육체적 질병을 고치는것도 그러하지만, 교회는 육체적 치유 센타 만은 아니다. 질병이치료되지 않을 때도 획득할 자유는 역시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을은시험에 넘겨서는 안 된다고 했다.
우리는 모든 의심을 다 풀 수 없으며,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할수 없으나 여전히 사람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또는 어떤 다른 권력의 사용으로 야기된 정치적 지배의문제는 가능한 일이지만, 우리가 배운 바대로치명적인 의미에서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의 철저한 행사는무엇을 포함하며, 철저한 복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타자"(theother one)와 예수는 다같이 대답을 아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경배나 그 이하의 어떤 것도 아니다. 복종보다 궁극적인 그 무엇이며, 몸과 마음과 영을 바치는 궁극적 형태의 순종이다. 그 댓가는 인간성을 생명력 넘치는 자유의 지점에서 희생하는 것이다.

세 가지 제안은 분명히 거부되었다.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지지 않는다. 이 세 길들 중 아무 것도 아니라면 무엇인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는 세워질 수 있는가 복음서 기자들은직적적인 대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문제는"토론의 여지로 남겨져 있다"(open-ended).

슬프게도 우리는 인간 상황에서 예수께서 거부한 것으로 묘사된 세 가지 일반적인 수단에 의해서보다 더 인간의 혼란을 부과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면 무엇인가 바울은말하기를 논쟁의 여지로 남겨진 목표(the open end)는 예수 자신, 즉, 새로운 인간성이라고 한다. 반복된 아담이 아니고 역전된 아담이며, 아담의 상황은 단순히 회복된 것이 아니라 "폐쇄된제도"를 가지지 일은 새롭고 "다른 차원"의 인간이다. 진실로 그온전한 의미에서(아직까지 경험하지 못한) 다른 경배는 순종으로부터 온 것이다. 예수는 복음서의 상징적 인물 중에서 "타자"와연합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것을 철저히 낯설은 것으로 보며 생각할 수 없는 것이며 진정한 경배의 궁극적인 부인으로 보고 있다.
그리스도적 아담(the christ-Adam)은 일신된 원초적 인간이 아니라 종말론적 주님이다. 인간성은 새로운 전망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획득되며,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로써 받아들일 용의가 없을때까지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 다음의 질문은 우리는 궁극적 해답없이 살아갈 수 있는가,다시 말해 예상(anticipation)에 의해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성서적 해답, 즉 특별한 의미에서 신약의 해답은 그렇다는것이다. 그것은 지나간 일들을 표시해 주는 것들[상기(anamne-sis)는 예배 용어이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하지는 말라!]의 암송에 기초한 예상이며, 암송 이상의 과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올것의 영향력에 의해만나진, 그래서 변화된 지점에서 과거와 현대적으로 조우(encounter)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와 미래[종말(eschaton)]가 만나는 곳에서살아간다. 상기된 내용들은 예상으로 변하고, 그곳에서 성례전이일어난다. 인간 상황은 버려진 역사, 즉 포기한 인간성의 특징과관계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새로운 사람들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이다. 여전히 인간이며, 마지막에는 짐이아니라 승리의 존재가 된 것인데, 이는 우리가 자신을 그리스도께 드렸기 때문이며, 거기에 우리의 삶과 우리의 형상과 우리의모습과 우리의 운명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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