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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과 함께 동반하는 실존들 (히 0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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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말씀을 우리가 읽으면서 생각하는 것은 '복음과 함께 동반하는 실존들이라' 하는 내용입니다. 복음이 가는 곳에 실존들이 따라갑니다. 복 음은 허울 좋은 이론이 아니기 때문에 참 복음에는 반드시 그와 동행하는 실존들이 있습니다.

복음의 사실이 있는 곳에, 복음을 누리는 심령 안에 (복음은 어떤 집이 나 장소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 속에 머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복음이 따로 있고 주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복 음이요, 말씀이 복음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서 그 실존을 가지는 사람이 복음을 들은 사람이요, 복음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즉 복음이 따로 있고 주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성경 말씀과 예수님은 일치되는 분입니다. 따라서 성경 말씀을 듣 는 것, 믿는 것, 그 안에 사는 것은 바로 주님을 아는 것이요, 주님을 믿는 것이요, 주님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과 마 찬가지이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까지 내가 예수님을 이해 하지 못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복음을 이해하는 사람이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거침 없이 복음을 알고 주님을 알고, 복음이 갖다 주는 실지가 무엇인 것을 알아서 그 안에서 사는 것이 참다운 신앙이요, 참다운 신앙 생활입니다.

말씀만 나가는 것이 아니고 말씀과 함께 동반하는 실존, 복음만 아니고 복음과 함께 동반하는 실존이 참 많은데 그 중에도 귀한 것은 노래 삼아 하는 말씀입니다만 구원의 확신입니다. 또 성결의 아름다운 것과 의에 대 한 확신입니다. 복음을 알았다고 하면 믿었다고 하면 기본적으로 구원과 성결과 의를 알고 믿어서 자기 생활로 옮기게 됩니다.

나아가서 가장 귀한 것이 안식입니다. 평강입니다. 복음을 알았다고 하 는 사람이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모를 리가 없습니 다. 지금도 여러분이 말씀을 들으면서 또 성경 말씀을 상고할 때에 이런 면으로 나의 신앙 생활이 어떻게 되어 가는가 하는 것을 책정해야 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느니라.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대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복 음은 주님의 죽으심과 사심이 전반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없이는 주님 의 사심이 없이는 복음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주님의 죽으심과 사심이 이 복음,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알고 성경 말씀을 듣는 것은 주님의 죽으심과 사심 을 듣는 것이고 믿는 것입니다.

이제 복음이 갖다 주는 실존, 복음과 함께 나타나는 실존 중에서 안식 에 대해 생각하려고 합니다. 안식입니다. 안식 없는 복음도 없고 안식 없 는 신앙도 없습니다. 안식이 없다면 복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안식이 없다 면 아직까지 내가 복음을 알지 못한다, 복음에 이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안식이 갖다 주는 사실은 참 귀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으며 교회에 오랫동안 나왔지만 복음이 갖다 주는 구원 도 알지 못하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성결도 의도 안식도 평안도 알지 못한 다고 하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나 말씀에 대한 의문은 가지지 마십시오. 말씀에 문제가 있어서 그 런 것이 아니고 내 신앙 자체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 면서도 아는 척 하고 가지지 못했으면서도 가진 것으로 생각해서 겉넘어 가기 때문에 그렇지, 복음이 내 안에 내가 복음 안에, 말씀이 내 안에 내 가 말씀 안에 있다고 하면 말씀이 의아스러울 리가 전연 없습니다.

사람들이 '내가 교회를 수십 년 다녔고 교회에서 중직을 맡았는데...' 하 는 말을 많이 합니다. '목사에게 회개 했느냐고 물어 목사에게 구원 얻었 느냐고 물어' 하면서 분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목사라도 이 사실을 모 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묻거나 물음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마땅한 일이고 내 신앙 생활에서도 아주 값진 물음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도 없고, 율법도 없고 또 이방인으로서 살았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겠습니 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요, 말씀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약속을 가졌습니다. 남이 가지지 못하는 약속, 남이 듣지 못하는 하나님에 대한 들음,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를 다 듣고 안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40년 동안 (그 전에도 그랬지만) 안식을 몰랐습니다. 구 원을 몰랐습니다. 더 이상 부족함이 없이 하나님 앞에 성결되고 깨끗하고 거룩하게 서는 진리를 몰랐습니다. 불신자와 방불한 삶입니다.

오늘날에도 광야에서 안식 없는 40년을 보낸 이스라엘 백성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땅에 수없이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이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있었으면서도 평안도 모르고 불신자와 방불한 생애를 보냈다고 하면 우리는 참으로 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믿음 이 없었습니다. 또 믿음에 대한 순종이 없었습니다. 만일 이 믿음과 순종 이 있었다면 여호수아와 갈렙 같이 가나안 땅에 들어 갔을 것입니다.

그들은 외적 안식도 없었습니다. 왜 40년 동안에 수없이 장막을 옮겼 기 때문에 외적 평안이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못 먹고 못 입어서 굶어 죽 거나 헐벗은 것은 아니지만 안식할 수 있는 사실이 없었기 때문에 마음 깊은 곳에 평안을 가진 사람이 없었습니다.

만일 있었다고 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로 믿는 믿음의 사 람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이런 안식을 누린 사람이 없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 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이것을 나도 듣고 있고 여러분도 듣고 있습니다. 나도 보고 여러분도 보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거울같이 밝히 드러나 있는 사실입니다.

몇십 년 전에 시작된 우리의 생이 이제 끝날 때가 가까와 오는데 아직 도 외적으로 평강을 누리지 못하고 내적으로 안식을 모른다고 하면 이스 라엘 사람들이 내적 안식도 모르고 외적 평강도 모른 채 40년을 살다 죽 은 것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위대한 사건과 생활을 거쳐 나 왔으면서도 그 생활이 자기들의 신앙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내적 안식을 모르고 살다 간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유월절에 참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신은 유월절 을 아느냐, 유월절에 참석했느냐고 묻는 것은 참 서글픈 말입니다. 이방 사람에게 유월절을 아느냐고 묻는 것은 말이 되지만 유대인에게 유월절을 아느냐고 묻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홍해를 건넌 경험이 있느냐, 홍해를 아느냐고 묻는 말과 같습니다. 다 홍해를 거쳤고 므리바의 생수를 마셨고 만나를 먹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당신은 교인이냐, 어느 교회를 다녔느냐, 언제부터 다녔느 냐' 하고 물으면 '나는 교인이다. 사신 우상을 섬기지 않았다. 다른 신을 믿지 않았다. 나는 교회를 믿었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습니 다. 믿음에 대한 순종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간에 생의 마지막 길을 걷고 있는 권사님을 찾아 뵈었습 니다. 또 믿는 가정 안에 세상을 떠난 분이 있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여러분, 그 모습은 그들만 가지고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도 가 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들의 모습이나 내 모습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도 세상에서 살았고 나도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그들도 굶주렸고 나도 굶 주렸습니다. 그들도 어려운 시대에 태어나 어려운 시대를 살았습니다.

다만 그들 안에 복음을 믿는 일, 아는 일, 복음을 순종하는 일이 있었는 가 내게는 있는가 하는 것만이 깊이 생각해야 될 문제입니다.

믿음과 순종이 갖다 주는 결과는 가나안입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믿 음이 여러분들에게 갖다 주는 결과는 광야가 아니고 죽음이 아니고 가나 안입니다. 광야에서 아름다운 건물과 토지를 가지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 루며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어도 순종한다 해 도 광야가 유업이 아닙니다. 유업은 가나안에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의 결과는 가나안입니다. 수고하지 않은 땅, 수고하지 않은 과원, 수고하지 않은 물에 대해 성경에서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가 수고하지 않은 가옥을 가질 때에 수고하지 않은 우마를 가질 때에 수 고하지 않고 얻을 때에...' 이런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잃으면 여러분의 신앙에 성장도 없고 안식도 없습니 다. 내 유업은 내 소득은 내 믿음과 순종의 결과는 이 광야가 아닙니다.

가나안입니다. 여기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여기에 대한 소망이 흔 들리지 않으면 끝까지 가나안을 보고서 찬송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오 히려 광야에서 있는 일들은 바람이 지나가듯이 구름이 지나가듯이 그렇게 지나가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분명히 성경이 말씀하는 안식과 평안은 광야의 것이 아닙니다. 육의 것 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사람이 돈이 생겨서 평안을 맛보게 된다 거나 자녀가 없던 사람이 자녀를 낳아서 평안하게 된다거나 명예가 없던 사람이 명예를 얻어서 평안을 누리게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평안 과 안식은 안식 같지만 진정한 안식이 아닙니다.

이것을 알면서도 우리의 속 마음이, 내적인 신앙의 걸음이 광야에서 발 을 떼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으로 옮겨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웃는 것도 광야 때문에 웃고 우는 것도 광야 때문에 웃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일어나는 웃음도, 광야에서 일어나는 울음도 모두 끝나고 다만 유업의 땅, 가나안 땅을 돌아보고 소유하는 것이 복음이 갖다 주는 결과입니다.

복음이 갖다 주는 안식과 평안은 절대로 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상이 내적인 평안이나 내적인 안식 때문에 부족을 느끼거나 만 족을 느끼거나 하질 못합니다. 외적인 것 때문에 시비하고 불평하고 근심 하는 것에서 떠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해서 주시는 안식은 임시가 아닙니다. 내가 애써서 얻은 안식이 돈 때문이라고 하면 그 안식은 나와 동행하지 못합니다. 얼마 안가 서 그 돈이 누구의 돈이 되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 자취도 알 수 없게 되 고 맙니다. 깨진 그릇에 물을 붓는 것같이 낡은 옷이 떨어지는 것같이 세 상의 모든 부귀와 영광이 안식 같으나 가고 맙니다. 임시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내적 안식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안식입니다. 여러분 에게도 영혼이 있고 나에게도 영혼이 있습니다. 얼마 안가면 여러분도 영 의 세계에 가서 살게 되고 나도 영의 세계에 가서 살게 됩니다. 이 영원한 영의 세계의 안식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준비하고 계십니다. 창세 전 부터! 준비하신 그 안식을 완성하신 것이 주님이 오셔서 죽으시고 사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이 분명히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실상 광야에는 안식이 없습니다. 안식과 평안은 가나안 땅에만 있습 니다. 만나가 끝나고 새 양식이 풍부할 때 안식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안식일이 있었고 안식년이 있었 습니다. 또 희년이 있었습니다. 이방 사람에게는 그것이 없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이나 안식년이나 희년은 모두 육에 대한 안식입니다. 임 시입니다. 그것은 신령한 안식의 그림자입니다. 안식일에는 아침부터 저녁 까지 장사하는 일에서 가르치는 일에서 공부에서 다 손을 뗍니다. 먹는 것, 입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날로 보냅니다. 이것 이 영원한 안식의 그림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림자 되는 안식일도 알고 안식년도 알고 희년도 알 고 육의 평안을 알았습니다만, 그림자의 본체 되는 그림자의 몸이 되는 신 령한 안식을 몰랐습니다. 만일 여러분들도 모른다고 하면 그들이 모르고 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육의 안식일을 생각하면서 영원한 안식을 생각해야 됩니다. 안 식년, 희년을 생각하면서 주께서 나에게 주시는 영원한 안식을 생각하고 믿음과 소망으로 누려야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가난해서 돈이 있어야 안식이 될 것 같으면 자신이 돈을 벌어야 됩니다. 피땀 흘려서 벌어야 됩니다. 남이 갖다 주는 돈으로는 안 식이 안됩니다. 남이 갖다 주는 돈으로 안식하려고 하면 오히려 화가 되고 맙니다. 지금도 보세요. 자기의 수고 없이 부자가 된 사람들이 큰 화를 당 하고 있습니다. 그 돈이 자기의 육체도 삼키고 자기의 영혼도 삼켰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수고로 노력해서 번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또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 배움이 안식이 된다고 하면 자기가 배워 야 됩니다. 남이 배워서 나에게 갖다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힘써서 배 워야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안식은 하나님이 준비해서 주시는 안식입니 다. 주시는 안식! 주님이 주시는 안식을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맛보고 있는지 경험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복음이 주시는 안식, 주님 이 죽으시고 사심으로 나에게 주시는 안식이 무엇인지를 알고 누리는 것 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값진 신앙입니다. 그것을 모르면 복음을 모릅니다.

하나님을 주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만일 각자가 벌어서 돈을 모은다고 하면 능력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많이 버는 사람이 있고 적게 버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또 만일 누가 준 다고 했을 때 그 주시는 분이 누구에게는 천 원을 주고 누구에게는 만 원 을 준다면 차이가 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일하게 주십니다. 천원을 준다고 하면 동일하게 천 원을 주고 만원을 준다고 하면 동일하게 만원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께서 주시는 평안과 안식은 동일합니다. 이 동일한 평안을 아는 것, 믿는 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누구는 더 갖고 누구는 덜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다 감사할 뿐입니다. 주시는 안식, 주시는 평안입니다.

근본적인 안식은 내적 안식인데 주 예수로 말미암아 오는 안식이 내적 안식입니다. 외적으로는 오히려 환란과 역경과 곤고가 밀려오기 쉽습니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깊은 안식, 심령의 안식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 리니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입니다. 다른 조건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남자만 오너라' '여자만 오너라' 그런 제한을 둔 것이 아닙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라면 누구든지 주님 께로 와서 그 짐을 주님께 맡기라고 하십니다.

주께로 가는 사람의 수고를 주님이 다 감당하십니다. 이쪽에서 가지고 가는 것은 수고의 짐인데 짐을 지고 가기만 하면 돌아오는 것은 쉼입니다.

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아주 편히! 수고와 짐을 지고 주께로 가는 사람에 한해서 편히 쉬게 하십니다. 그 러나 자기의 수고와 짐을 가지고 가지 않으면 그 사람은 죽기까지 영원토 록 그 짐과 수고의 종이 되고 맙니다.

오늘 쉬고 내일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힘을 모았다가 내일 일하 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쉼이고 내일도 쉼이고 영원히 쉼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만일 기독교에서 이 사실을 제한다고 하면 기독교 의 가치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가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마음에 두시기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니...' 이 말씀이 내 신앙 안에 성취될 때에 갖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닙니다. 이 짐을 맡긴 사람만 아는 평안입니다. 이 안식과 평안 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 가득 차서 넘치기를 원합니다.

만일 이 안식을 모른다고 하면 안식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안식일 은 지키면서도 이 내적 안식, 영원한 안식은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 시는 안식,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안식을 알아야 됩니다. 반드시 내가 가 져야 됩니다. 가져 봐야 그 말이 무슨 말인가, 그 일이 어떠한 일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안식을 가진 사람이 신자입니다.

이 안식과 평안은 주님 자신이요, 주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가운데 머 물음으로써 맛보는 평안과 안식입니다. 주의 말씀이 주시는 안식과 평안 은 영원 무궁한 것입니다. 그 영원 무궁한 안식과 평안을 알 뿐만 아니라 마음 속에 느끼고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마태복 음 12:6) 성전보다 더 큰 안식입니다. 성전보다 더 큰 주님을 말씀합니다. 만일 여러분의 마음 속에 안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 안식이 무엇 때문인지 생각 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아가서 제사보다 제물보다 더 큰 안식입니다. 이 안식을 여러분들은 찾아야 됩니다. 이 평안과 안식이 여러분의 심령을 다스리게 되면 제사보 다 제물보다 더 아름답고 귀한 사실이 이루어집니다.

주의 말씀이 '나는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제사를 원 치 않고 오히려 자비와 인자를 원하십니다. 이 주님을 인해서 주님이 계신 곳에는 안식과 평안이 함께 합니다. 주님을 참으로 알고 주님을 자기의 구 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바로 그 심령 속에 안식과 평안이 동참합니다.

성경 중에 이런 말씀은 너무너무 많이 있습니다. 다섯 남편 둔 여인에 게 주님이 '지금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할 때에 바로 그 심령 속에 이 안식과 평안이 왔습니다. 스스로 과거의 생활을 다 정리하고 '와서 봐라, 그가 메시야가 아니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 하고 주님을 증거 했습니다. 그 안식은 율법이 주지 못했습니다. 자기 생활의 선함이 그 평 안을 주지 못했습니다.

음행한 여인이 현장에서 잡혀서 주님 앞에 있을 때에 '여인아, 네게 죄 주는 사람이 없더냐 나도 네게 죄를 주지 아니하노라' 하시는 주님의 말 씀이, 주님 자신이 바로 그 여인에게 평안과 안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의 실존되시는 주님을 인하여서 안식과 평안을 맛보지 못하면 사람은 안식할 수가 없습니다. 평안을 가질 수가 없 는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이 안식과 평안은 우리가 생산해서 그 소득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시는 평안과 주시는 안식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해하든지 못하든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 안식과 평안을 주시려고 왔습니다. 이 안식과 평안을 주시는 일은 주님의 죽으심 과 사심입니다. 이 평안과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죽으시고 사셨습 니다. 주님의 죽으심과 사심은 완성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실 평안과 안 식은 완성되었습니다.

계속해서 '너희에게 평안을 끼치노니...' (요한복음 14:27) 이 말씀을 중 심해서 생각하려고 합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느니라. (누가복음 24:6) 살아서 실존하시는 주님을 어째서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는 말 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하실 일을 다 하시고 살 아 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은 예수, 죽은 주, 의문에 쓴 사실을 마음 속에서 벗겨 내질 못합니다.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누가복음 24:36)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 돌아와 보니 열한 제자와 다른 형 제들이 모여서 주님이 살아 났다는 말을 주고 받고 있었습니다. 그 두 제 자가 엠마오에서 주님과 함께 음식을 먹을 때에 떡을 축사하시고 떼시던 주님을 알긴 했지만 아직 부활하신 주님에 대해서 마음이 열린 바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놀란 정도입니다. 다른 제자도 그랬습니다.

이것은 주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대로처럼 활짝 열려야 되는데 그렇 게 되지 못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들으면서도 한 쪽으로는 불신이요, 보면서도 아직까지 안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때에 주님은 그것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친히 그들 가운데 서셔서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찌어다.' 하시며 그들에게 자꾸 확신시켜 주십니다.

여러분 앞에서 말씀하는 나 자신도 전에는 이 말씀을 할 수 없었습니다.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안식에 대해서 평안에 대해서 말씀할 수 없었습니 다. 그러나 주님은 내 안에 안식과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내 밖에서 내 안 에서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친히 주님이 가운데 오셔서 '너희에게 평안을 끼쳐 주노니...' 하실 때에 주께서 끼쳐 주시는 그 평안을 안고 일어나는 사람, 걷는 사람은 잠자는 사람이 아니요, 뒤로 물러 갈 사람이 아니요, 행여라도 음부에 떨어질 사 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평안을 가질 수 있는 일을 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상으로 주시는 평안이 아닙니다. 내가 주의 말씀 가운데서 평안을 가질 수 있는 일을 해서 그 일의 보상으로 받는 평안이 아닙니다. 이 제자들은 주님의 평안을 가질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습니다.

다만 주심에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끼쳐 주노니'-여러분이 받는 은혜가 여러분의 생활의 보상이라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그 은혜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안식과 평안은 보상이 아니고 100% 은혜입니다.

주시는 평안, 받는 평안입니다. 불교와 다릅니다. 타 종교와 다릅니다.

전혀 다릅니다. 주께서 갖다 주시는 평강, 주께서 갖다 주시는 안식, 이것 을 반드시 생각해야 될 줄로 압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누가복음 24:39) 확신하라-'내가 네 앞에 섰으니 네 손을 내밀어서 나를 만져 보고 나 를 확신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여, 예수님을 무엇으로 확신합니까 주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 주님의 말씀과 나의 심령이 접촉되었을 때에 하나가 되었을 때에 '주님은 과연 살아 계신다. 주님은 과연 나의 주님이 시다. 주님은 나의 모든 죄의 보장이요. 주님은 나에게 모든 의의 보장이 시다' 하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마음의 확신입니다.

그래도 제자들이 여전히 의아해 하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영이 뼈가 있느냐 나를 만져 보아라. 너희에게 먹을 것이 있느냐, 영이 먹더냐' 하 시며 이모 저모로 그들을 확신시켜 주십니다. 그 분들의 형편과 상황이 우 리의 형편과 상황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누가복음 24:45) 이모 저모로 제자들을 확신시켜 주시고 더 나아가서 그들의 마음의 문 을 열어서 성경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주님을 알려면 우리 의 마음의 문을 여는 데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다른 데서 주님을 알거나 보거나 확신하지 못합니다.

내 마음의 문이 열려서 성경을 내 마음으로 깨닫게 될 때에 주님을 확 신하게 됩니다. 주님을 확신하는 동시에 이 평안과 안식을 확신하게 됩니 다. 내가 누리는 안식은 영원한 안식이요, 내가 누리는 평안은 영원한 평 안인 것을 나 자신이 알게 됩니다.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요한복음 20:19) 이런 말씀이 언제 내 마음을 두드려서 열어 주었느냐 두드리고 있느 냐 언제 그렇게 했느냐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주님과 관계된 사람이라 고 하면 이런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넘어 갈 수 없습니다.

주께서 내 마음의 문을 열어 주셔서 내가 내 주님을 확신하는 일, 주님 에게 입맞추는 일, 내가 내 주님에게 나의 모든 짐을 맡기는 일들이 있었 습니까 언제 되었습니까 책망은 없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끼쳐 주노니...'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제자들이 안 믿을지라도 책망하지 않습니다. 다른 것을 거론하지 않 습니다. 내 마음 속에서 주님을 확신할 때까지, 믿을 때까지 주님은 책망 없이 원망 없이 나와 함께 하시면서 기다리십니다.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2절) 큰 무리가 이런 일에 참석한다고 하면 참 좋겠습니다만 이제 그런 무리 는 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가능합니 다. 자신을 확신시키신 후에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 하시는 주님, 이 주님은 교회 밖에 있는 주님이 아닙니다. 죽은 주님이 아닙니다. 오늘 도 마지막 때에 오셔서 교회에게 권면하시는 사신 주님입니다. 산 자를 왜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이 말씀을 우리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습 니다. 나중에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에 대해 말하자 도마는 자신의 손가 락을 주님의 못자국에 넣어보지 않고는 주님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여드레 후, 제자들과 도마가 함께 집 안에 있을 때 문이 닫혀 있었는데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도마를 원망하거나 책망하지 않으시고 그를 향해서 손을 내밀어 '내 손의 못자국을 봐라, 내 옆구리를 만져 봐라, 그리고 나인 줄 알고 믿으라. 믿음 있는 사람이 되고 믿음 없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말씀 했습니다. (요한복음 19:26-29) 이제 우리가 이런 말씀을 그냥 넘겨 버리고 지나가도 될 것인가, 아니 면 내 자신의 마음 속에 펼쳐서 주께 거론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 해야 됩니다. '믿는 자가 되어라.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아라.' 하신 주님 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도마는 결국 '주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고백했고 전설에 의하면 그 후에 주님을 위해 큰 일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복음이 갖다 주는 실지가 너무 많습니다. 복음이 있는 곳에 안 식이 있습니다. 복음이 있는 곳에 평안이 옵니다. 복음 없는 평안이나 안 식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평안이나 안식이 아닙니다. 주님이 거하시는 곳 에 평안이 있고 안식이 있습니다.

늘 그런 말씀을 합니다만 내게는 상상적인 천국이 없어졌습니다. 주님 이 함께 계시는 곳이면 어디나 천국이요, 평안이요, 안식입니다. 주가 없으 면 안식과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있다 해도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평안과 안식이 아닙니다.

 (기 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내 가 다시 와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신 주님께서 오늘도 신령한 교회에게 위로와 평강으로 임하시고 나타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안식을 저희 마음 속에 주의 죽으심과 사심 으로 주신 것을 알고 주께 감사함을 드립니다. 세상이나 그 무엇이 빼앗을 수 없는 이 평안과 안식 가운데서 주의 사람으로 살면서 그 날을 기다리 고 사모할 것 외에 다른 것이 없는 줄 압니다.

나그네로 사는 저희들이 세상 가운데서 안정되지 못한 광야 생활을 하 지만 주께서 우리 마음 하나하나를 점령하셔서 몸은 광야에 있지만 심령 은 가나안에 가서 주께 찬양하게 하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거룩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주의 이름으로 감사하는 것은 저희가 몸 을 입고 있는 동안에 신령한 성도들의 모임에 참여하게 하시고 감사와 찬 송과 예배에 동참하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신령한 눈을 열어 주셔서 땅에 있는 육체 외에 육체 밖에 있는 또 하나의 나를 생각하고 주께 영광과 존귀와 거룩함을 돌리게 하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주께서 구별하시고 성별하시고 할례를 베푼 자의 입 이 주를 찬양하며 그 심령이 주님 앞에 예배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 다. 이 때가 가기 전에 저희 모두에게 이 큰 은혜를 입혀 주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죽으시고 사시고 진행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 안 식과 평안이 어서어서 우리 마음 속에 임하게 하시고 우리가 안식 없는 곳에서 평안 없는 곳에서 헤매는 자들이 되지 않게 하시며 안식과 평안 안에서 감사와 찬송을 주께 돌리게 하시기를 비옵니다.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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