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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를 보는 눈 (눅 23: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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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독교인들은 주위에서 흔히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집에서도, 교회에서도, 방에사도, 책에서도 십자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아니, 주위에 십자가가 없으면 어딘가 허전하고, 모자라는 듯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어디에서든 십자가를 보게 되면 반갑고 흐뭇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 십자가는 원래 유대인들이 흉악범을 처벌하는 사형틀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십자가를 보면 흉악범을 상상했고 수치와 치욕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후에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고, 우리와는 아주 친숙해진 기독교의 상징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믿는 신자들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도 십자가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보는 사람마다 십자가에 대한 생각은 모두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어리석게도 봅니다.
어떤 사람은 코웃음을 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긍정적인 생각으로 십자가 앞에서 경건한 마음을 갖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울며 매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전 1:18 말씀에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마다 서로 다르게 십자가를 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던 당시 예수님옆에서 같이 십자가를 지던 두 강동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이 두 강도의 모습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십자가를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지를 살펴보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예수님을 비방하였던 강도는

첫째로 십자가는 실패와 절망으로 보았습니다.
39절에 보면 ‘비방하여 가로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십자가는 굴욕과 치욕의 대상이요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때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 그러했듯이 이 강도의 눈에는 십자가는 바로 멸시,천대였고 절망과 좌절, 실패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강도처럼 십자가는 아무 의미없는 로마의 사형틀이요, 2000년 전에 로마의 사형수 예수님의 실패를 대변하는 하나의 표시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니 2000년 전에 이미 사라져 버린 그 몇가지 사건을 가지고 그 막대기 두개를 모아 놓은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비웃는 사람도 있습니다.
‘ 차라리 예수님을 믿으려거든, 그 십자가를 믿으려거든 내 주먹을 믿으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알고 바로 볼 줄 아는 눈이 열려야 되겠습니다.
십자가는 실패와 좌절이 아닙니다.
바로 승리요 성공의 상징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뒤에 예수님의 부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승리요 성공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눈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이 강도는 십자가를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39절에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말하면서 어떻게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느냐고 조롱하였습니다.
이 강도는 그 십자가가 바로 그 강도 자신을 위하여 그 강도의 죄와 허물을 위해 고통받으시는 것임을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모든 인류를 위하여,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아니 바로 그 강도 자신, 아니 바로 나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다는 사실을 그는 모르고,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이상하게 여기며 어리석게 보고 비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십자가는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관적인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 세상 사람, 다른 사람, 저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 보잘것 없이 죄와 허물에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바로 ‘나’를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예) 못생긴 엄마-너 때문에
구경만 해서는 안 됩니다.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세번째로 이 강도는 십자가를 이 세상의 욕심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29절에 ‘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고 말하면서 ‘ 너도 살고 나도 살자 ’고 비방하면서, 믿지도 아니하며 자기 욕심만 구하며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일에만 눈이 어두워 바라볼 것을 바로 보지 못하는 측은하고 가련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썩을 육신의 것만 생각하고 영원한 것을 바라볼 줄 모르는 불쌍한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혹시 이 강도처럼 이 세상일에만 눈이 어두워 바라볼 것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자신의 일에만 급급하여 주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하거나 아프게 해 드리는 일은 없었습니까
정말 우리는 십자가를 바로 볼 줄 아는 눈이 열려야겠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박는 어리석은 일에서 벗어나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어리석은 눈으로 인하여 이 강도는 귀한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바로 예수님 곁에 있으면서도, 세상의 구세주, 메시야의 곁에 있으면서도, 바로 옆의 강도가 구원받는 것을 보면서도 그는 은혜 받을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잘못과 허물을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고후 6:1-2말씀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원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 강도처럼 은혜받을 기회도, 회개할 기회도, 용서받을 기회도 잃어서는 안되겠다는 말입니다.
소경 바디매오처럼, 삭개오처럼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겠다던 여인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는 잃어버리지 말고 기회를 잡고 축복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제는 구원얻은 강도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이 강도는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자신의 죄를 깨달았습니다.
40장에 ‘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 고 말함으로써 그는 그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당연히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고 깨닫고 있었습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죄를 가볍게 보이려고 하는 법입니다.
이 강도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죄없이 달려 고통받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죄를 정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바라보면 이런 마음을 가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나의 잘못과 허물을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의 말을 들었을 때 죄를 깨달았던 것처럼, 베드로가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던 것처럼, 탕자가 괴로움 속에서 자기의 허물을 깨달았던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잘못과 허물을 깨달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바로 우리의 죄와 허물과 잘못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예) 죄-두 여인-선생에게 가르침을 청함
큰 죄-큰 돌 작은 죄-작은 돌 도로 가져다 놓으라

둘째로 이 강도는 십자가를 보면서 산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비록 자신의 모습은 추악하지만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억만이라도, 생각만이라도 추악한 강도지만, 버러지만도 못하지만, 기억해 주소서.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강도에게는 마지막 순간의 꿈이었습니다.
그는 이 꿈을 버리지 않았을 때, 그 믿음으로 소망을 가지고 마지막으로 구했을 때 응답을 받았습니다.
십자가에 죽은 강도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도 마지막 순간에 가졌던 그 꿈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봅니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꿈을, 소망을 버려서는 안 되겠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어떤 경우에 있더라도, 아무리 죄와 허물이 크다 하더라도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라 할지라도, 꿈을 버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어떤 잘못과 허물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회개하고 나아오는 자를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바로 그 사랑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을 아무 책망도 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받아주시는 뜨거운 사랑입니다.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 현대판 탕자의 비유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을 삼아도, 저 하늘 높이 쌓아도’채우지 못하는 바로 그 사랑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처럼 미련하게 보지 말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 자신을 보고, 소망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생각하고 우리의 잘못과 죄와 허물을 깊이 깨닫고 살아야겠습니다.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비록 연약한 모습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늘 우리를 부르시고 계시는 것을 깨닫고 마지막 순간가지 소망과 꿈을 잃지 않고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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