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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를 가르치신 예수님 (눅 18:1-14)

첨부 1


우리는 지난 시간 번개같이 임하실 예수님을 공부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자세를 가르쳐 주신 비유의 말씀입니다. 주기도문이 기도의 내용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준다면 오늘 말씀은 기도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그러므로 쉬지 않고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줄기차게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낙망하기 때문입니다.
또, 기도는 하지만 확신이 오지 않고 답답하기만 한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비유를 통해서 이러한 내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본문을 통해서 올바른 기도의 자세를 배우고 기도의 용사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Ⅰ.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1-8)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1)
우리는 기도하다가 쉽게 응답이 되지 않으면 낙심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도는 항상 해야 합니다.(should always pray)
그런데 항상 기도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면 항상 기도하기 어려운 점이 무엇입니까
기도하다가 낙망하기 때문입니다. 낙망<lost heart>이란 낙심 또는 포기(give up)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다가 낙심해 버리면 더 이상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경우에 기도하다가 낙망합니까
기도가 빨리 이루어지지 않을 때 낙망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바라고 원하는 내 때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낙심하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깨우쳐 주셨습니다.
한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한 과부가 그 재판관을 찾아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였으나 그가 얼마 동안은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번거롭게 하리라”(2-5) 하며 들어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재판관은 자기의 재판에 따라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 교만이 하늘을 치솟았습니다. 또, 항상 죄 많은 쓰레기 같은 사람들만 상대하다 보니 사람을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안하무인이었습니다. 이런 불의한 재판관에게 정의를 기대하고 동정을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한 과부는 그 재판관을 찾아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였습니다.
당시에 과부는 가장 힘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불의한 재판관이 이 과부의 청을 들어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관심조차 없습니다. 서류가 올라오면 뒤로 돌렸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부는 낙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용기를 내어 찾아갔습니다.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그러자 이 재판관은 화를 내면서 비서들을 불러 내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과부는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지 않고선 살 수가 없었습니다. 과부는 다시 재판관을 찾아가서 애원을 했습니다. 그래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하루종일 울면서 사무실 주위를 떠나지 않고 맴돌면서 원수를 갚아 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래도 들어주지 않자 이번에는 재판관의 집을 찾아가서 이른 아침 출근 전에, 또, 퇴근 후 날마다 찾아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며 구슬피 울었습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은 낮에는 이 과부 때문에 사무를 볼 수 없고, 밤에는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꿈에도 나타나서 원수를 갚아 달라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재판관은 견디다 못해 들어주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이 재판관은 과부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늘 와서>라는 말은 <끝까지 와서>라는 뜻입니다. 괴롭게 한다는 동사는 <눈 아래 부분을 친다>는 말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이것을 보면 불의한 재판관이 이 과부로 인해서 많이 시달리고 얼마나 많은 골머리를 앓았는지 짐작이 갑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은 결국 과부의 낙망치 않는 끈질긴 간청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곧 이 과부의 끈질긴 간청과 낙망치 않는 믿음이 승리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가 무엇입니까1)첫째, 낙망치 말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다가 낙망하는 이유는 내 때에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낙심하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창세기 15장에 두 가지를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①먼저는 자식을 주겠다(창15:4)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면 주실 줄 믿고 5년이고 10년이고 20년이고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기의 원하는 때(時)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삐꺽해서 애굽에서 나온 지 10년만에 하갈을 취해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것이 악의 불씨요, 중동(아랍) 전쟁의 불씨요, 마지막 아마겟돈의 불씨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하나님의 때인 25년 뒤에 이삭을 아들로 주셨습니다.
②둘째는 아브라함에게 땅을 준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창15:7)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려고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낸 여호와로라”(창15:7) 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주실 줄 믿고 기다려야 했는데 기근이 들므로 그만 약속의 땅을 버리고 두 번씩이나 애굽에 내려갔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 400년간 종살이를 할 것이 예언됩니다.(창15:13) 사실 그대로 역사적으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내 때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고 낙담하는데 하나님은 더 좋게 하려고 하시는 줄 믿고 낙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까지 기다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또, 요셉의 한 예를 생각해 봅시다.
요셉은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옥살이를 하던 중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복직이 되어 히브리 사람 요셉이 억울하게 모함을 입어 감옥살이를 한다고 바로 왕께 고하라고 부탁을 했는데 그만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이 된 후 잊어 버렸습니다. 그 잊어버리는 것이 큰 은혜입니다. 만약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석방되어 요셉은 역시 종의 몸으로 풀려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에 풀려나니까 애굽의 총리가 된 것입니다.
뒤에 바로 왕이 꿈을 꾸게 되는데 그 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에 대하여 바로 왕에게 고하고 바로 왕 앞에서 요셉이 왕의 꿈을 해석하게 되어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내 때보다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다 내 때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고 원망하는데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때는 내 생각, 내 계획하던 것보다 훨씬 더 좋게 이루어지므로 낙망하지 말고 기도하며 그때까지 기다립시다. 하나님의 때까지 기다립시다. 이것을 우리 예수님이 비유로 기도하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신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롬8;28)

2)둘째, 반듯이 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6-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과부의 청을 들어준 불의한 재판관과 택하신 자녀들의 기도를 들어주실 하나님을 비교하여 말씀했습니다.
재판관은 불의 합니다. 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사람을 무시합니다. 과부의 청을 더디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택하신 자들을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밤낮 부르짖는 그 택하신 자들의 기도를 속히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7절을 보십시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지 않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하나님은 당신의 택하신 자녀들의 밤낮 부르짖는 기도를 오래 참으시지 않습니다.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우리보다 더 안타까운 마음으로 해결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가 빨리 응답되지 않는다고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속히 응답해 주십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예수님이 한탄하셨습니다.(8)
3)셋째,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불의한 재판관은 끈질기게 찾아온 과부의 그 중압감 때문에 들어주었다고 비유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끝까지 참고 견디며 기도하기를 본문 내용에서 원하십니다. 그러면 반듯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를 몇 번 해보고 그만 두어 버립니다. 하지 않게 됩니다. 하지 않으니까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생각대로, 내 방법대로 하니까 일이 꼬이고 되지 않는 것입니다. 끈질기게 낙심하지 않고 줄기차게 내 때에 이루어지지 않아도 내가 믿는 하나님이 더 좋게 이루어 주실 줄 믿고 수요 기도회에, 새벽 기도회에 꾸준히 참석하여 기도하면 반듯이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8)
이런 인내하고 끈기 있게 기도하는 믿음을 보겠느냐 하셨습니다.
바라건대 낙망하지 않고 꾸준히 기도하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Ⅱ.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기도(9-14)

예수님은 이제 두 번째 기도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비유하신 비유로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자세로 기도하여야 할 것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1) 바리새인의 기도(9-12)
10절을 보십시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다른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율법을 엄격히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루 3번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에 기도를 했습니다.(행2:15, 10:10, 3:1) 이들은 소득에 십일조도 꼬박꼬박 받치고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을 했습니다. 또 234조에 해당하는 안식일의 규레를 엄격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당시 악명 높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동족을 배반했습니다. 부당한 세금을 착취하여 사복(私福)을 채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버리고 안식일도 제대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또 도덕적으로 물란 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서서 기도하는 것은 유대인의 정상적인 기도 자세였습니다.(삼상1:26, 왕상8:22, 마6:5) 이렇게 서서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불의,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했습니다. 토색(rubbers)이란 사기를 쳐서 남의 돈을 빼앗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죄를 짖지 않은 것을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에 빠지지 않은 것을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잘나서 죄를 짓지 않은 것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세리와 비교하며 세리와 같은 죄를 짓지 않은 것을 감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12절을 보십시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에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며 남들은 한번도 하지 않는 금식을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한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내려오는 말에 ① 이방인으로 지음 받지 않았음을 ② 하류인이 아닌 것을 ③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했다고 합니다. 바리새인의 기도 내용을 보면 그가 하나님께 구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자기의 의로움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고 스스로 의롭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의 기도에 아주 진절머리 난다고 하셨습니다.
다같이 이사야 1:12-15절을 읽겠습니다.
“이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1:14,15)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의(義)에 기초한 기도는 받으시지 않습니다.

2)세리의 기도(13-14)
13절을 보십시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또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했습니다. 기도할 때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은 정상적인 기도자의 자세인데(시40:12, 123:1, 스9:6, 요11:41)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처다 볼 수도 없는 비천한 자임을 알고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쳤습니다. 가슴을 쳤다는 것은 자기 죄를 통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는 자기의 죄를 자백했습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죄인임을 시인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자입니다.
그가 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긍휼을 베풀어주시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형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긍휼이 여겨 주실 것을 믿고 구했습니다.
벵겔(Bengel)은 말하기를 그는 감히 “하나님”과 “나”를 바로 연결 하지 못하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만 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남의 죄를 생각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참다운 참회자의 기도였습니다.(사25:11, 40:12, 스9:6, 단9:8, 딛1:15)

그러면 이 두 사람 중 누구의 기도가 예수님은 의롭다고 하셨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나님은 자기의 죄를 눈물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한 세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죄인 중에 죄인인 세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세리는 사죄의 은총을 덧입고 기쁨이 충만하여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고 충성하다 보면 바리새인과 같이 의로운 심정이 들기 쉽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교만한 마음이 생겨서 그것이 자기의 의가 됩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비천한 죄인인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본질상 진노의 자식일 수밖에 없는 자임을 깊이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의가 사리고 죄인의 심정으로 주님의 긍휼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199

5.

3. 1

9. 주일 낮 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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