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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와 바울 (행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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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책을 손에 들고 펴보면 구약과 신약으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신약을 자세히 상고해 보면 복음서와 바울서신 두 부분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복음서와 바울서신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교훈과 행적과 생애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으나 바울 서신에는 이러한 기사는 전혀 없고 예수님의 부활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부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을 천국의 전파자로서 묘사하고 있고 그의 행적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정말 복음서와 바울서신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지 다시 말하면 복음서의 기자들이 말하는 예수님과 바울이 말하는 예수님이 다른 분인지 우리는 생각해 볼만합니다.

18세기의 자연신론적 합리주의자 라이마르스 (Herman S.

Reimanus:1694-1768)는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에 대해 말하기를 신성 이 없는 인간 예수님임을 말했습니다. 예수님과 기독교는 아무 관계가 없다 고 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서의 모든 기록들은 제자들이 그렇게 알고 믿었던 것을 그 들 나름대로 기록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것은 제자들의 생각이고 신앙이지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거짓말을 했고 자기를 쳤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철저한 합리주의자 파우르스(Heinrich Paulus:1761-1851)는 말하기를 복음서에는 많은 이적이나 초자연적 역사가 있는 이것들은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속여 꾸며낸 일들이라고 했습니 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고의적으로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가 초자 연적인 존재라고 착각을 일으키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거짓말쟁이요 사기쳤다는 말이 됩니다.

일원론적 이상론자인 스트라우스(David Strauss:1808-1874) 헤겔(Hegel) 의 변증법적 역사철학의 방법과 사상을 따라 복음서의 예수님에 대해 말하 기를 제자들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신의 표현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어 있 다는 것 뿐만 아니라 인간은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예수님의 교훈을 상상적이고 신화적인 용어로 묘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신의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따라 살던 많은 인물 중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가 능성을 나타내어 주는 하나의 모범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스트라우스는 또 말하기를 복음서의 모든 기록들은 초자연적이고 신화적인 방법으로 묘사되었는데 이 신화로 인해서 어떤 종교적 이상이 역사 형태로 위장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메시야 대망사상과 예수님의 위엄스런 인격 의 감화가 초대교회로 하여금 이러한 신화를 만들어 내게 했다는 것입니다.

문서설(마가복음 우선설) 을 주장한 홀즈만(H.J.Holtzmann:1832-1910)은 스트라우스와 같이 예수님의 메시야 의식의 발전설을 믿었습니다. 그는 진 화론의 원리를 예수님의 마음데다 적용시켜 말하기를 예수님이 예언 의식으 로부터 시작하여 정신적 진화의 과정을 통해 이럭 저럭 하는 중 어떻게 해 서 메시야 의식에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그의 메시야 개념 은 복음서들의 기록들에 있는 메시야 개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신의 부활과 재림에 관한 예언은 자기의 죽음이 인간사회를 하 나님 나라로 되게 하는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말에 불과했다는 것이며 그 의 죽음은 단지 하나의 본보기가 된다는데 그 가치가 있으며 예수님의 가르 침이 오히려 그의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초자연적이란 비실재적이라는 것으로 이적을 부인하는 레난(Ernst Renan:1823-1892)도 스트라우스나 홀즈만과 같이 메시야 의식의 발전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모방자였으며 그의 영향을 받았 으나 낙관론자였다고 합니다.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백성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자 자신이 유대주의와 화해할 수 없음을 깨닫기 시작하여 유대교의 신 앙을 버리고 하나의 초월주의적인 혁명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는 자가 되고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가 계시를 통하여 지식을 받았다는 것을 믿도록 내어 버려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후 예수님은 점점 더 주위 환경의 희생이 되어간 것입니다. 이제는 백성 들이 그를 하나님이라고 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자신을 하나 님으로 간주하게 되고 싶어졌고 그의 친구들의 사랑에 그만 도취되어 버렸 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은 그것을 믿지 않으면서도 메시야의 역 할까지도 맡게 되었으며 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메시야로서의 죽음을 당하기를 바랬다는 것입니다.

고전 자유주의자 리츨(Albrecht Ritschl:1822-1889) 은 예수님의 신성, 선 재성, 충족론.. 등을 반대하고 예수니의 죽음을 하나의 모범으로 아니고 하 나님께서 인간이 죽을지라도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한 것에 불과하였으며 따라서 인생은 자연을 거스려 살고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하나님과의 화해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인생이 이런 삶을 살 수 있음을 보여준 모범자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20세기 초기의 자유주의자의 거두 할낙(Adolf von Harnack:1851-1930)도 말하기를 자연을 초월해서는 어떤 의미에 있어서도 이적이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실질적으로 이적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신성도 부인하면서 예수님이 단순한 인간이었다는 가정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확실히 예수님은 위대한 종교적 인물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확실히 예수님은 위대한 종교적 인물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인류 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위대한 능력과 사랑을 체험하게 하는 도덕적 감 화를 주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게몽주의 사상과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자들은 마가복음을 근거로 복음서나 바울서신에 나타난 예수님을 한낱 도적적 인물로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바울이 그를 절대화하여 그리스도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 하면서 에수님의 죽음 후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활한 메시야로 믿고 선포하 게 되엇으며 이 신앙을 모든 선재의 개념과 창조적 중보적 관념과 결부시켜 놓았다는 것입니다.

궁켈(Gunkel) 과 같은 종교사학파의 학자는 말하기를 바울이 예수님을 만 나기 전에 이미 그에게 그리스도 관념이 선입관념으로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바울의 이 사상이 구약에는 없는 이상한 다른 종교들, 곧 유대교의 계 시문학에서 나왓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라이젠스타인 (Ritzenstein) 이나 부셋트 (Wilhe-lm Bousset:1865-1919)와 같은 학자들은 바울의 초자연적 예수 관념이 바울 당 시의 이교에서 유래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종교사학파의 견해와는 반대로 쉬바이쳐(A.Schwei-tzer:1875-1965)는 그리스도이신 예수에 대한 바울의 선포가 바울의 특별한 유대적 종 말론적 메시야 관념에 근거해서 기대될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종말론적 드라마에 알 수 없는 분쟁을 일으키는 그의 부 활을 믿는 신앙입니다.(천국과 메사야는 세상 끝과 같이 온다는 사 상:Messias Designatus).

성경의 비신화화를 말하는 불트만(R.Bultmann)은 바울 기독론에 유래를 일 반 종교사, 특히 노스틱주의에서 찾았습니다. 노스틱주의에서는 다른 신비 주의 종교에서보다 훨씬 더 구속이 우주적 드라마로서 묘사되었습니다. 가 장 높은 자의 선재적 아들인 구속자가 無知중에 잠자는 자들에게 참된 지식 을 전하기 위하여 빛의 세계에서 내려와서 그들이 죽을 때에 그들을 사람의 영혼으로 되돌아 오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늘 의 구속자는 적의 세력권 내에 들어와야 했으므로 그 자신 사람의 형태를 입었던 것입니다. 구속자는 깨어난 영혼과 그 자신의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예배하며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구속자는 그가 하늘에서 내려옴 으로 세상 실존의 고난과 궁핍에 예속되게 되었으므로 그 자신이 구원되어 져야만 했고 그가 빛의 세계에 올라갈 수 있게 되기 전에 고난을 받으며 핍 박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성경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 "구속된 구속자"(redeemed redeemer)의 노스 틱 신화는 불트만에게 바울과 요한 기독론의 토대입니다. 라이젠스타인은 노스틱 구원관을 이란의 구속적 신비주의자라고 했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노스틱 구원관의 근본형태가 페루샤 종교에 유래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있어 불트만은 라이젠스타인과 일치합니다.

자유주의, 현대주의 여러 신학자들이 복음서나, 바울서신의 예수님을 도덕 적 인물로 유대 계시문학의 주로, 이교의 교조로,장래의 메시야로, 혹은 구 속된 구속자로 보면서 성경을 파괴하는데 반하여 바울 자신은 예수님을 무 엇이라고 말했는지 생각해 봅시다.

(1) 바울은 자기 자신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 하면서 나의 나 된 것 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 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 이라.."(갈 2:20)고 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바울 자신의 생활의 토대가 된 그리스도를 2,3년 전까지 파레스틴에 살고 계셨던 한 인물, 나사렛 예수 와 동일시 했습니다. 예수의 존재양태 상에 하나의 커다란 예수와 실로 부 활에 의해 생긴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겸비한 생활이 영광의 생활에 대신되 었습니다. 그러나 일관하여 살고 있는 것은 같은 인격이었습니다. 바울서신 에는 "예수"와 "그리스도"사이에 마치 전자가 갈릴리에 살고 계셨던 역사적 인 인물의 이름이며, 후자는 부활한 주님의 이름인 것 같이 구별하는 흔적 은 없습니다. 반대로 "예수"라는 이름이 자유롭게 부활의 주님께 적용되었 으며 또 "주" 라고 하는 모든 칭호 중 최고의 칭호가 고난을 받고 돌아가신 예수님에게 적용되어 있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람이 " 영광의 주"였습니다 (고전 2:8).

그런고로 바울서신에는 역사적 인물 예수와 신적 주 예수 그리스도와 노스 틱주의적 분리의 흔적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몰갠(W.MORGAN)이 바로 지 적한 바와 같이 "양자적 그리스도론"의 흔적도 없스빈다. 어디까지나 바울 의 예수는 복음서의 예수 바로 그분이었습니다.

(2) 본문에 보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기 를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라고 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바울의 예수는 합리주의자들이 말 한대로 자유주의자들이 만든 도덕적인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 본 예수는 이상론자들의 말과같이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 는 가능성을 가진 신화적인 인간도, 진화론의 원리를 따라 에언 의식에서 시작하여 정신적 과정을 지나 우물 주물 하는 중에 메시야 의식에 이르렀따 는 엉터리 메시야도 아닙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직접 대면한 예수님 은 메시야 의식의 발전설을 주장하는 레난의 초월주의적인 혁명가도 종교사 학파의 궁켈이 말한대로의 유대계 시문학의 주도 아닙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직접 만나 뵈온 예수님은 라이젠스타이나 부셋트 같은 학자들의 주장대로 이교의 교조도, 천국과 메시야는 세상 끝과 같이 온다는 (Messias Designatus) 쉬바이쳐의 장래의 메시야도 아닙니다. 다메 섹 도상에서 경험한 바울의 예수는 노스틱주의를 말하는 불트만의 구속된 구속자도, 과학적인 입장에서 바울을 말하는 자들의 말과 같이 바울의 신체 적 입장에서 바울을 말하는 자들의 말과 같이 바울의 신체적 고장(허약)으 로 인한 생리적 현상(고후 12:1-8)도 아닙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예수는 예수를 박해하면서도 그를 구세주 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바울의 심리적 현상도, 정신착란도 정신이상으 로 일어난 영적 환상도 아닙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바울의 예수는 어 떤 기괴한 분이 아니고 땅에서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시던 나사렛 예수바로 그 분이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만나 뵈온 예수는 오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2,000여년 전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서 2,000 여년 전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하나님의아들 예수 그리스 도 바로 그분이었습니다. 돌아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 이었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신 바로 그분이었습니다.

(3) 이 예수를 잘못 알았던 사울은 이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했습니다.

믿는 자를 핍박함이 곧 예수를 핍박함과 같은 진리가 여기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와 믿는 자의 신비적 연합에 관한 진리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고 교회는 그 몸이니 몸이 핍박을 받을 때에는 하늘에 계신 머리되신 분도 원리적으로 핍박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바울의 예수님은 바울에게 핍박을 받으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 섹 도상의 바울의 예수님은 이 핍박자를 회개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를 부 르셨습니다. 평생 그의 사도로 삼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구와 미국은 문명하고 부한 나라들입니다. 지식이 극도로 성한 곳들이빈 다. 잘 먹고 잘 사는 곳입니다. 젊잖은 사람들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이들 이 말하는 예수님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예수님이 아닌 다른 예수 님이 되어 버렸습니다. 얼마나 불행합니까 이와 반면에 우리는 그들보다 조금 무식합니다. 조금 못삽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살아 계셔 서 말씀하시는 다메섹 도상의 부활하신 바울의 예수님입니다. 내 교회가 믿는 예수님은 지금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복음서의 예수님 바로 그분입 니다. 할렐루야! 그런고로 우리는 이 예수님을 잘 뫼시고 믿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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