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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흔들리지 않는 근거 (행 02:3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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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성령충만, 베드로의 힘있는 설교의 결과가 삼천 명이나 되는 새로운 신자를 불러낸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설교, 즉 베드로를 통하여 맡기신 구원의 복음에 관한 이야기들이 상대방에게 이해되도록 하시는 새 시대를 열렸다는 성령강림의 핵심적인 골자이다.
이것은 스데반의 설교와 비교하면 더욱 확실해진다. 설교 자체로 놓고 보면 스데반의 설교가 더 치밀하고 더 미화되어 있다. 베드로의 설교에서는 그의 가르침에 대한 묘사가 얼마나 멋진가, 또는 얼마나 힘이 있었는가에 대한 묘사가 없다. 스데반의 설교에는 그런 요소들이 많이 나타나 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갈라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행 6:8-10)”
스데반에 대한 설명은 일단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고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다고 한다. 그리고 7장부터 스데반의 설교가 진행된다. 그의 긴 설교가 끝나자 나타나는 반응은 어떠했는가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행 7:54)”
베드로의 설교보다 스데반의 설교가 더 유창하고 미화되어 있었다. 그러면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 돌아왔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그래서 성경은 베드로의 설교의 결과가 아니고 또 스데반의 설교의 결과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가 힘이 있었기 때문에, 성령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삼천 명이나 회심할 수 있었다면 스데반의 은혜와 권능과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설교에는 몇 명이나 회개하여야 하는가 한 명도 회심치 않고 돌만 날라와 죽는다.
회심한 자는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의 마음에 간섭하사 그들을 변화시킨 결과이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마 11:15-19)”
만일 베드로의 설교가 설득에 관한 문제이고 그 설득의 열매를 맺는 이유가 성령충만 때문이라고 한다면 성경 자체의 모순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된다면 복음서 자체만으로도 인간들은 모두 회심했어야 맞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성령님이 오셔서 베드로에게 간섭하여 한 것보다 더 직접적이고 더 원색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같이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슬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진리와 생명에 대하여 인간들은 반감만 갖고 있다. 그래서 같은 진리를 세례 요한이 와서 이야기할 때 그를 미쳤다고 했다.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복음을 안 들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 설교나 스데반의 설교가 다같이 너희가 죄인이다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분노했고 서슬이 퍼래서 이를 갈며 스데반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같은 사건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등장시킨 것은 그 설교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찔리고 회개하더라는 것이다. 그 회개가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싶은 것이 사도행전의 베드로의 설교와 그 반응에 대한 중요한 내용인 것이다. 드디어 사람들이 영생에 대한 주님의 말씀에 정당한 반응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성경 전체에 관한 이야기이다.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온갖 방법으로 이스라엘 속에 개입하신다. 그런데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구약은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로 끝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전하는 자의 실력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마치 소경에 칼라 TV를 보여주는 셈이고 귀머거리에게 좋은 오디오 음악을 들려준 셈이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에서 구원을 얻는다. 이 사건은 우리가 믿기 이전의 문제이다. 해방되었다는 이야기가 상대방이 그것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와 상관없이 선포되었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돌아보셨고 죄에서 꺼내셨다는 선포가 베드로 설교의 가장 중요한 주제였다.
이제 그 말씀을 들은 자들이 이것을 알아듣게 되었다라는 것을 가장 큰 내용으로 한 기록이 본문의 그 반응들인 것이다. 성경적으로 말해서 구원을 허락하시는 일이 시작되었다는 것에 베드로 설교가 서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이 오신 것도 전하는 자의 힘과 능력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실패치 않게 할 간섭으로서 성령님이 오신다는 것이다. 말하는 자의 실력으로가 아니라 듣는 사람이 알아듣도록, 배척하지 못하도록 그 사람의 심령에까지 간섭하는 것으로 성령강림이 서 있는 것이다. 이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사도행전 2장 다음에 하나의 시간을 연결하는데 3장의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사건이다.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행 3:1-10)”
앉은뱅이는 자신이 일어날 것을 구하지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어떤 하나의 기적이 일어나는 데 있어서 상대방의 믿음까지도 요구하고 있지 않고 있는 사건이다. 대상과 관계없이 순전히 베드로와 요한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 이후를 읽어보자.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1-16)”
16절에 그 이름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앉은뱅이의 믿음 때문도 베드로 요한의 믿음 때문도 아니라고 말한다. 12절이 그 증거가 된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우리의 힘으로도 우리의 신앙으로도 아니었다는 말이다. 16절에 있었던 것같이 그 이름이,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즉 이 말은 그 이름을 믿었기 때문에 오는 보답으로가 아니라 그가 친히 하신다는 성경적인 표현이다. 내가 믿었기 때문도 아니고 당사자가 믿었기 때문도 아니고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에 이 일을 그분이 행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믿음이라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행위와 대치되는 용어로 쓰이는 것이다.
성경에서의 행위라는 말은 한다 안 한다가 아니라 하나의 결과에 내가 원인을 제공하는 법칙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가 원인을 만들어서 결과를 얻어내는 것이다. 이 앉은뱅이는 그 자신이 일어날 아무런 조건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 주께서 일으키셨다. 그러므로 그 앞의 설교도 마찬가지이다.
베드로의 설교가 남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어서 그것으로 저들이 믿게 된 것이 아니다. 구원이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 구원하신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는 작업일 뿐이다. 우리로 믿고 구원얻게 하는 것이다. 거기서 믿는 다는 것은 우리가 조건을 제시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구원을 베풀고 계신다.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의 선조 아담이 타락한 그날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실 때 “그러나 여자의 후손으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모든 족속으로 구원을 얻게 하겠다”라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언하시고 약속하신 대로 드디어 그 일을 이루셨고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보니 죄인을 붙잡고 있던 악한 것들이 그 사망의 권세를 붙잡고 있던 심령들을 빼앗기더라는 것이다. 주께서 그의 말씀을 듣는 심령들의 눈을 밝히시고 그 영혼을 불러 일으키사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회개를 만들어 내시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기록이다.
이사야 53장을 보면 우리는 다 각기 제 길로 갔다. 자기 생각에 옳은대로 했다. 빛이 세상에 왔을 때 외면했고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다. 우리는 진리를 외면했고 주를 영접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바로 능력의 사람이 되는 것 이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그 상실된 마음과 죄의 정욕대로 버려 두지 않고 그의 영으로 우리에게 간섭하사 진리로, 영생으로 우리를 간섭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대로 놔 두었더라면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이 돌밖에 던질 줄 몰랐던 우리가 주의 영의 간섭으로 베드로의 설교 앞에 항복하는 일이 생겼다는 것이 베드로 설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 내용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그렇게 자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신다. 이것이 가장 큰 우리의 감사요 기쁨이다. 나를 내 생각대로 놔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감사이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과 베드로의 설교와 그 반응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리고 싶으신 복된 내용이 있는 것이다. 이 감사와 기쁨과 자랑이 오늘 이 말씀을 들은 모든 심령들 위에 흔들리지 않는 근거로, 가장 깊은 자랑으로 자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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