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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 (행 0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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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평면적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그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땅끝까지 이르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것이 전달되는 곳에서마다 놀라운 기적과 변화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살아 그 복음을 전하는 자들과 동행하시며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단순히 사도들만의 행전이 아니라, 사실은 "성령님의 행전"이요, "그리스도의 행전"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일한 복음을 전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하는 사람에 따라 그 결과가 상이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바로 복음을 전하는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친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놀라운 기적을 일으켰던 베드로와 요한을 발견하게 됩니다.

Ⅰ.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1. 그는 생득적인 불구자였습니다.(2절)
1) 본문 2절의 말씀을 보면, 이 거지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였습니 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날때부터 불구자로 태어나는 자는 그 부모의 죄 때문이거나 혹은, 그 본인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요9:2)
사실, 모든 인생은 날 때부터 원죄를 안고 세상에 태어나는 영적 불구자입니다. 그러므로 이 불구를 고침받기 전에는 참된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2) 특히 요한 칼빈(John Calvin)은 "인생은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타락한 자(Total Depravity)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전적부패한 인생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고, 하나님을 만족 스럽게 해들릴 만한 선을 행할 수 없는 무능한 인생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3장 10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3) 과연 모든 인생은 날 때부터 불구자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죄악 중에 출생하여, 죄의 독소로 깊이 중독된 불구자로 이 세상을 살되, 고난과 슬픔 속에 살다가 영원한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가련한 존재들 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가련한 불구자가 어떻게 고침받게 되었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2. 그는 남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였습니다.
1) 사지백체가 있었으나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자였습니다. 앉은뱅이도 정도 나름이겠지만, 미문 앞에 앉은 앉은뱅이는 스스로는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자로서, 항상 남의 도움 속에 살아가며 남의 짐만 되는 자였습니다.
2) 영적으로 생각해 볼 때, 그는 신앙의 이론과 체계가 있고 논리와 주장은 있으나, 전혀 행함이 없는 "무능한 신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오늘날 이런 신자들 때문에 전도의 문이 막히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들이 많은 것입니다.
과연 지금 나는 이런 상태에 있지 않습니까

3. 그는 성전 미문밖에서 썩을 것을 구걸하는 자였습니다.
1) 항상 성전 문 앞에 머무는 자였습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면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자"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10개의 문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미문은, 청동과 보석으로 꾸민 아름다운 문이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성전에 나오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성전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자였습니다.
2) 영적인 면에서 생각해 볼 때, 습관적으로 교회는 출석하지만 신령한 일을 전혀 행하지 못하는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감사 감격하는 찬송이 없고, 영혼 속에서 터져나오는 기도가 없고, 아직도 응답받는 기도를 드려보지 못한 성도입니다. 구속의 사랑을 느껴보지 못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축복과 기적을 전혀 알지 못하는 신자를 의미한다 하겠습니다.
3) 또한 그는 물질의 노예가 된 자였습니다. 그가 성전에 오는 목적은 구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육신 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불구가 된 자입니다. 그 심령이 일만악의 뿌리가 되는 돈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한 자입니다. 돈독이 올라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는, 돈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황금에 눈이 어두운 자입니다. 성전에 나와서도 오직 썩을 물질만을 구하는 인생입니다.
과연 우리들은 바로 이런 신자는 아니었던가요 깊이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2. 그러면 베드로와 요한은 이 앉은뱅이를 어떻게 고쳤습니까
1) 본문 4절에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라고 했습니다. "주목한다"는 말은, 헬라어로 "이테싸스"라 하는데, 이것은 "자세히 보는 것, 정신을 차리고 보는 것, 깊은 관심을 갖고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2) 성전에 오르고 내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심코 지나쳐 버렸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무심코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더러는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보는 순간,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자신의 선행을 과시 하기 위하여 몇 푼의 돈을 던져주고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앉은뱅이를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자세히 "주목했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주의깊게 관찰하는 행동, 즉 "그의 근본적인 요구가 무엇인가를 꿰뚫어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주목했다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지나쳐 버릴 수밖에 없는, 그 근본적인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위대한 축복과 기적은 바로 이렇게 핵심을 통찰하고 문제를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3) 주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버림받은 자, 아무 쓸모없고 소망없는 자들에 대해 깊은 관심과 이해와 사랑을 쏟아 부어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많은 자, 불구된자, 잃어버린 자, 영원히 멸망받을 자,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이 진리를 외면하고, 세상적인 출세와 높은 지위와 명예와 권세만을 주목하고, 세상의 물질만을 추구하는 자들로 점점 메워져 가고 있ㅅ브니다. 그곳에서는 참된 기적과 축복이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깊은 관심을 쏟고 모든 사람들이 다 외면하는 쓸모없는 자들에게 사랑과 애정을 쏟고, 땀과 눈물을 쏟는 삶을 살아야 되겠습니다.
저들의 궁극적 필요와 요구가 무엇인가를 꿰뚫어 보면서, 그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매어 달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주었습니다.(6절)
1) 본문 6절 말씀에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앉은뱅애는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금과 은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금과 은은 커녕 동전 한 푼 없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돈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착각속에 빠질 때가 만습니다. 그러나, 문제 해결의 비결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 삶에 있어서도 돈보다 더 절실하고 더 근본적이며,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축복의 열쇠입니다. 인생의 영원한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시금석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여 받고 믿고 순종하면 영원한 행복이며, 거절하고 불순종하면 영원한 지옥형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주인이시며, 모든 인생의 불행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3)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름은 전 인격을 대표합니다. 때로는 현재적인 활동을 의미하기도 하며, 약속의 진실성을 보증하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으로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구원의 역사를 계속하십니다.
성도는 그 이름으로 모든 구원의 축복을 받고(행4:12), 그 이름으로 죄씻음 을 얻고(눅24:47), 그 이름으로 구원과 건강도 얻고(행4:10), 그 이름으로 불가능을 해결하며(요14:13), 악한 사탄도 정복하며 해결해 나가는 것입니다(막16:17). 그러므로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여 세상을 이겨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의심 없는 믿음으로 잡아 일으켰습니다.(7절)
1) 본문 7절 말씀에, 그들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한 후에,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친히 일으키시리라"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감히 일으킬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쌍한 이 앉은뱅이를 일으키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고로 잡아 일으켰던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는 확신과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일하지 아니하십니다.
특히 "오른손을 잡아"라는 헬라어는 "피아시스"라는 말로서, "힘을 꽉 주어 잡는다"는 뜻이요, "그의 전 인격을 사로 잡아 일으킨다"는 뜻입니다. 손톱만한 의심이나 염려나 불안도 없이 반석과 같은 믿음으로 잡아 일으킨 것입니다. 이런 큰 확신과 의심없는 믿음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3) 의심과 열며는 우리의 생각을 쪼개고, 사상을 갈라놓으며, 불안을 몰아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1장 6절 말씀에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치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
믿음과 확신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놀라운 축복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확신으로 전진 하십시오! 매일 매일이 기적으로 가득한 축복의 날이 될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대한 큰 믿음과 확신으로 전진하시면서 놀라운 축복 받으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통해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 앉은 40세의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을 살펴 보았습니다. 저들에게는 금과 은이 없었고, 더욱이 앉은뱅이를 고칠 수 있는 의사로서의 기술이나 지식이 전혀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마음 속엔 버림 받은 타고난 불구자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섬세한 정성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문제를 능히 해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충만했습니다. 모든 불가능도 가능케 하는 의심없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이 사랑과 믿음과 생명의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세계 복음화의 일익을 담당하는 능력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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