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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의 이름으로 (골 13: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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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16절과 17절은 그리스도인 삶의 내용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 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우주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저마다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들력에 피고지는 한 떨기 들풀도 존재 이유가 있고 하루를 살다가 죽는 하루살이 곤충도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읽컫는 인간의 존재 이유나 가치나 의미는 거기에 비할 바가 아닌 것입니다.

 철학은 존재(Being)의 의미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성 경적으로 인간의 존재를 규명한다면 그것은 쉽게 풀립니다. "인간은 하나 님에 의해서 존재한다" 는 것이 구약성경 창세기 첫머리인 1장의 선언입니 다. 다시말하면 인간은 저절로 돌출한 존재도 아니고 어느곳으로 부터 유 출된 존재도 아닙니다.

 그리고 원숭이가 진화 되어 사람이 된 것도 아닙니다. 저는 원숭이를 좋 아하지 않는데 이유는 진화론자들이 원숭이를 사람의 조상이라고 우겨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진화론을 공부한 사람들이지만 우리 안에 놀고 있는 원숭이를 바라보면서 "조상님 절받으세요" 라고 인사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왜 존재합니까 내 멋대로 살아선 안됩니다. 존재하게 하신 하나 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뜻을 성경에서 찾게되는 것 입니다. 본문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향 하여 요구하시는 내용이 무엇인가를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 로 그 내용을 살펴 보면서 함께 은헤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풍성한 말씀의 삶입니다.

 16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 했습니다. 교회 를 다니다 보면 때때로 많은 말씀을 듣기 때문에 듣는 귀가 발달하기 마련 입니다. 아마 2-4년만 교회의 물을 먹게 되면 세상말로 풍월을 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너희 속에 풍성하게 거해야 한다" 고 말씀합니 다.

 음식의 맛을 아는 방법은 두가지 입니다. 하나는 넉넉하게 먹는 것으로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맛만 보는 것으로 아는 것입니다. 손끝으로 찍어 먹어도 맛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배을 불릴 수는 없습니 다. 말씀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말씀을 넉넉하게 먹어야 우리의 영혼이 풍성해지고 풍요로워 집니다. 그러나 말씀을 맛만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 다. 그들은 맛을 잘 압니다. 이 교회 저 교회 이목사님 저목사님 잘 가려 냅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은 굶주리고 지쳐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맛만 볼 뿐이지 먹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1) 말씀의 군것질입니다.

이것 저것 이곳 저곳 말씀을 군것질 해 본댔자 그것이 꼴이 되지 못합니다.

2) 내것을 과소 평가하는 것입니다. 내 집에서 만든 조촐한 그 식탁이 풍 성한 식탁이라는 것과 그것을 먹어야 살이 되고 피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3) 말씀의 편식 입니다.

 우리가 골고로 섭취하는 음식물 속에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넉넉한 칼로 리가 들어 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도 주는 대로 골고루 받아 먹으

면 영적 칼로리가 넉넉한 것입니다. 4) 자기도취 현상입니다. 말씀을 맛만 본 사람이 모든 진리의 말씀을 다 안 것 처럼 자기 도취에 빠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해밀턴은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 이 무엇인가에 대해 서 그것은 1) 구원의 힘을 가진 말씀이다. 2) 인간을 성취시키는 말씀이 다. 3) 인간의 생명을 보존해 주는 말씀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안에 풍성히 거한다는 것은 말씀하신 주님을 내 안에 모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에 주님을 모셨다는 증거는 주님처럼 생각하고, 결정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 내 안에 주님은 계 십니까

두번째, 피차 권면하고 가르치는 삶 입니다.

 16절에 보면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라고 했습니다. 교 회는 가르치는 것과 권면하는 것을 힘쓰는 곳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혜 로" 라는 말과 "피차" 라는 말입니다. 제 아무리 훌륭한 교훈이라고 해도 지헤가 부족하면 안됩니다. 어떤 분들은 열심도 있고 신앙도 좋은데 지헤 가 모자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말이지만 지혜롭게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남들이 싫어하고 따돌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 생활 이나 사회 생활에는 지식보다 지혜가 더 필요합니다. 지혜란 지식을 적용 하고 활용하는 능력입니다. 같은 내용이지만 예를 들어 비교해 보겠습니 다.

 식당에 앉아서 A:이봐 아가씨 물가져와 B:여보세요 물좀 주시겠어 요. A:이거봐 연필 가져와 B:미스리 연필 좀 가져다 줄 수 있죠.

어느 누구라도 B의 어법에 감동되고 설득될 것이 뻔합니다. 이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권면이나 교훈도 같은 이치에 속합니다. 아무리 좋은 권면이나 교훈이라고 하더라도 상대방의 속을 뒤집어 놓은 후 하려 한다면 이미 그것 은 수포화 하고 마는 것입니다.

 잠언 31장 10절에서 31절을 보면 어떤 여인이 현숙한 여인이며 값진 여인 이며 멋진 여인이며 매력있는 여인 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26절,27 절을 보면 "입을 열어 지헤를 베풀며 그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하며 그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나니" 라고 했습니다. 역시 멋진 여자, 현숙한 여인의 조건은 입과 혀에 있음을 발견하게 해 줍니다.

 어디 여자 뿐이겠습니까 디모데전서 3장1절에서 10절은 교회의 감독과 집사의 자격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특히 8절에 보면 "단정하고 일구이언 을 하지 아니하고"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말과 권면, 교훈은 교회 생활의 필수 조건입니다. 우리는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라는 교 훈도 주목해야 합니다. "피차" 란 서로간 입니다. 서로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 이유는 서로에게서 배울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권면하고 권면을 받아야 합니다.

 이유는 우린 서로 간에 권면을 받을 만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남의 말 을 듣지 아니하고 남에게 말하기만을 힘쓰는 것은 바른 권면이 아닙니다.

그리고 권면과 비난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권면은 애정 어린 충고이 며, 조언이며, 도움이지만 비난은 악의에 찬 공격 행위인 것입니다. 우 린 하루속히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성격과 비난에 비난에 길들여진 나의 태 도를 고쳐야 합니다.

 세째,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삶입니 다.

16절 하반절을 보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하 므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라고 했습니다. 우린 이 구절 속에서 시, 찬미, 신령한 노래, 감사, 찬양이라는 단어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상의 것들은 그 당시 교회가 에배하는 순서중의 일부였습니다. 구약의 시편을 낭송하고 찬송가를 부르는가 하면 성경을 봉독하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령한 노래를 부르라" 는 말씀입니다. 교회안의 찬송은 모 두가 신령한 노래들입니다. 신령한 노래란 신령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 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노래를 부르려면 태도, 마음가짐, 준비 등 모두가 신령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대중 가수는 자기의 독창적인 창법을 개발하기 위해 목에서 피가 섞 여 나오기까지 연습하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신령한 노래는 그 보다는 나 아야 합니다. 어떤 마라톤 선수는 올림픽 금메달을 겨냥하고 국민학교 때 부터 달음질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신령한 봉사는 그 보다는 더 철저히 준 비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라는 말씀입니 다. "마음에 감사함으로"..... 그렇습니다. 내 속에 감사한 마음이 있 어야 시도 나오고 찬미도 나오고 신령한 노래도 나오는 것입니다.

감사는 여러가지가 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감사" "입에 붙은 감사" 도 있고 "마음에서 부터 우러나오는 감사" 도 있습니다.

 공산당의 성분이 세가지라고 합니다. 첫째는 수박같은 공산당입니다.

빨갛지 않은데 속은 새빨간 공산당을 말합니다. 둘째는 벽돌같은 공산당입 니다. 겉도 속도 빨갛고 단단한 공산당을 말합니다. 이건 진짜 공산당입 니다. 세째는 사과 같은 공산당입니다. 겉은 빨갛지만 속은 하얀 공산당 입니다.

 공산당 성분에 비겨서 좀 안댓습니다만은, 누가 진짜 그리스도인 입니까 겉도 감사, 속도 감사로 가득찬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시대는 불만이 가 득한 시대입니다. 모두가 불만 투성이입니다. 감사의 반대는 불만입니다.

문제는 예수믿고 구원받았다는 사람들 마저도 불만이 많다는 점입니다. 불 만은 마귀가 주는 선물입니다. 뱀이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의 처사에 대 하여 불만을 가지게 함으로 그들을 넘어뜨린 것처럼 오늘도 맨 먼저 성도들 에게 불만의 조건들을 보게하고 알게하고 말하게 합니다.

 밀림에서 뱀이 한번 다른 동물을 잡아 먹기로 점찍고 노려보기 시작하면 꼼짝달싹을 못하고 얼어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 서있게 된다고 합니다. 그 러면 서서히 그 곁으로 다가가 잡아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뱀은 죽은 것은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사탄의 속성입니다. 그 누구라 도 사탄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면 꼼짝 못합니다. 그리고 사탄은 교인을 탐 내고 신자를 탐냅니다. 그리고 사탄의 교사를 받아 불만을 토하기 시작하 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사탄의 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는 하나님이 지키시기 때 문에 사탄이 탐을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론을 찾겠습니다. 17절을 보면 "무엇을 하든지 말이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라고 했습니다. 말을 하든지 일을 하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무엇을 하든지 무슨말을 하든지 예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예 수님은 그때 거기서 그 일을 하셨을 것인가

둘째는 무엇이든지 무슨말이든지 예수님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한 그일 때문에 내가 한 그 말때문에 주님의 이름이 욕되 지 않았는가

세째는 에수님의 이름이 얼마나 크고 능력이 있는지 확신하라는 것입니 다. 유명 화가의 그림이 가치를 받는 것은 작품성과 그의 이름때문 입니 다. 동양화나 서예의 경우는 낙관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얼마나 높고 귀합니까 나를 구원하신 그 이름, 나의 생명이신 이름, 나를 지키시는 이름, 영원하신 그 이름!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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