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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할 때는? (요 04: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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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추수 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추수감사주일을 오늘로 지키는 것은 마지막이 되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이 추수감사는 우리의 감정과는 거리가 먼 외국의 절기에 맞춘 것이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면 이 감사절 일자를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인 추석 가까운 주일로 변경하여 지키도록 총회에서 결정을 보았으면 좋겠다.

 추수에 관한 메시지를 준비하면서 사마리아 여인의 사건을 본문으로 택한다는 것은 불가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추수에 관한 말씀을 하셨으므로 이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이 말씀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그 녀의 마음 속에 벌써 메시야가 왔다고 하는 봄 소식이 전해 진 것을 말하고 있다. 몇차례의 대화가 오가는 동안 이 여인의 마음 속에 믿음이 성장하게 되었다. 예수님께 대하여 평범한 유대인으로 알고 있다가, 대화를 계속하여 보니 선지자인 줄로 알았다. 나중에 그는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이 다름이 아니라 메시야라고 하는 것을 그의 입으로 직접 듣고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서 동네로 들어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한 " 이 사람을 보라 !" 증거하므로 사마리아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본문은 이렇게 사마리아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 오는 모습을 보고 하신 말씀이다.

 모든 알곡들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것을 보면서 " 아 이제 알곡들이 영글었구나 ...." 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회개하고 돌아 오는 이 사람들에게서 영적이 추수기를 미리 바라보고 계신 것이었다.

 I. 추수 때는 큰 기쁨의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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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때의 농부들을 보라. 볏단을 가슴에 한 아름 안은 농부들의 얼굴에는 수심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들의 얼굴에서 지난 날의 고통과 슬픔은 모두 사라지고 기쁨만이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아직은 추수하지 않은 곡식들이 낫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여도 추수하는 사람이나 그것을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나 모두 같은 기쁨이 있다.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 오는 해방자들의 모습을 추수 때의 기쁨에다 비유한 말씀이 있다.

 시 126:6 을 보라.

 "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 오리라."

이 말씀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온 이후 거룩한 성일에 하나님의 집에 올라 가면서 그 입에 웃음이 가득하고 저들의 혀에 기쁨과 찬양과 감사가 넘치는 것을 보여 주는 말씀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초림에 관하여 벌써 추수하는 즐거움에 비유하여 말하 였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자들의 기쁨과 같이 즐거워 하리니......." (사9:1)라고 하셨다. 이 말은 예수의 탄생/ 즉 메시야의 탄생으로 말미암는 풍성한 영적인 기쁨을, 추수하는 즐거움에다가 비교한 것이다. 이 말을 자세히 생각하여 보면 신약시대의 복음 운동을 추수하는 일에 비교한 것이 되는데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은 이미 추수기가 시작 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II. 추수때는 열매를 수확하는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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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4:35에는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고 하셨다.

같은 구절의 처음에 보면 "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였느냐 " 하는 말씀이 있다. 또 이 말씀의 전후 문맥을 보면 밭이 희어져 추수하게 된 것이란 오곡백과의 추수거리가 아니라 다른 것임을 쉽게 분별할 수 있는 줄 안다.

 여러분, 이 다른 것이란 무엇이겠는가 4:39-42 절을 자세히 보기 바란다.

 39절/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 인이 .....

40절/ 사마리아 인들이 .......

41절/ 믿는 자가 더욱 많아 .......

42절/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라......

 이로 보건대 허다한 사람들이 사마리아 여인의 전도를 듣고서 예수님에게로 나아 오는 것을 예수님이 바라 보신 것이 틀림이 없다. 그것은 추수할 때에 풍성한 열매들에 비교할 만한 것이었다.

 결코 잎만 무성한 것이 아니다.

잎이 나고 성장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법 물이 나고 열매가 영글어 속이 꽉꽉 들어 찬 경우를 의미한다. 겉 껍질만이 아니라 속 알맹이가 제법 탐스럽게 자리하고 있는 모습을 의미한다. 성도들이 이렇게 아름답고 탐스럽게 영글어 추수 때의 알곡 같은 때가 언제인가 1) 고백하는 신앙이 있을 때이다.

 헬라말에 있어서 감사를 나타내는 단어가 여러가지 있다.

유카리스트 .... 좋으신 은혜 카리스 .... 기쁨이나 즐거움을 주는 것 친절 애호 은혜 윗 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베푸는 친절을 말한다.

안도몰로게오마이 .... 적당한 것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다. 찬양하다. 칭송하다.

엥조몰로게오 ..... 동의하다. 고백하다. 인정하다.

히브리어에 있어서 야다라는 말은 본래 던지다는 뜻이다. 이 말이 보이다 지적 하다 고백하다

감사를 나타낼 때에 사람들은 자연 스럽게 고백하게 된다. " 제가 그 분에게 은혜를 많이 입었어요. 정말 고마운 분이지요."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 이 고백이라는 것은 정말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여인은 사마리아 본 동네로 들어 가서 증거하였다.

 2) 자립하는 신앙이다.

 예수님에게 나아 오는 많은 사람들을 볼 때에 그것은 추수할 곡식들이 풍성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어떠한 사람들인가 본문 41-42 절을 유의하여 보기바란다.

 "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이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자립하는 신앙이란 그의 요구하는 것이 육체적인 것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영적인 것에로 발전된 것을 말한다. 외면적인 것에서 내면적인 것에로의 발전을 의미한다.

형식적인 것에서 본질적인 것으로의 발전을 의미한다.

이적이나 기사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는 삶을 말한다.

 마 8 장에 보면 백부장이 자기의 하인을 고쳐달라고 하는 기사가 나온다.

이 사람의 믿음이 어떠한 것인가 주님께서 " 내 집에 오는 것을 감당할 수 없으니 말씀만 하십시요. 그러면 내 종이 나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믿음에 관하여 칭찬하셨다. 이스라엘 중에서 아무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3) 무거운 겸손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자연계의 알곡이란 알이 차면 하늘을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숙인다.

벼 이삭, 조, 수수. 콩이며 팥 ...... 사과 배 등의 여러가지 과일 등 ......어느 것 하나 고개를 숙이지 아니하는 것이 없다. 영계에 속하여 사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속이 차면 겸손한다. 더구나 부동하는 영적인 진리, 내세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세상에 있는 것이 어떠한 변수로 작용하여도 흔들릴 수 없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여러분 사도 바울을 잘 아시지요 이 사람이 얼마나 교만에 가득찬 사람인가

a) 고후 11:5, 12:11 ... 지극히 큰 사도들 보다 부족한이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

b) 고전 15:8,9,15:10 .... 사도라 칭함을 받지 못할 자라고 하였다.

c) 엡 3:8, 고전 15:8 .... 성도 중에 작은 자, 만삭이 되지 못하여 난 자 d) 딤전 1:15, 고전 1:27-31 ... 죄인 중에 괴수니라.

 무게 있는 겸손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이다.

 III. 추수 때는 심판의 때이다.

.+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러 보내었노니 ....

이 두 문장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추수라는 것은 알곡과 죽정이를 갈라내는 시기이다.

그동안 주님은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내어버려 두었다.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까지 뽑힐까하여 버려 둔 기다림이다. 그러나 이제는 가라지는 쓸모가 없게 되었다. 길 바닥에 버려 두거나 아니면 따로 몽아다가 불에 던져 버린다.

 불 속에 던져 지는 것은 쭉정이 뿐이 아니다.

요한 15 장에서 우리는 포도 나무의 비유를 본다. 거기 6 절을 보면 사람들이 모아다가 불 속에 던져 사르는 것이 있다.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고 열매가 없는 것은 더 이상 놓아 둘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두가지 중요한 문제가 생겼다.

 하나는 <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지 않을 때 > 에 이러한 결과가 생긴다는 것이다.

다른 또 하나는 <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 이러한 결과가 생긴다는 것이다.

 성도들이 불속에 던져 지지 아니하려 하면 / 영원한 심판에 던져지지 아니하려 하면 1) 그리스도에게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15:7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고,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

나무는 먼저 뿌리로 부터 진액을 빨아 올려야 한다. ( 말씀연구와 묵상 ) 그 후로 잎의 요소들이 전체에 전달된다. ( 소원과 간구 )

2) 이제는 자연적으로 열매 맺는 일만 남았다. ( 성도들의 옳은 행실 )

마 13:39 에 보니 추수 때는 세상 끝 날이라고 하였다. 세례 요한은 우리 주님의 길을 예비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하였다. 요한이 이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면서 무엇을 말하였는가

"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 마 3:10

오늘 우리들의 눈 앞에는 풍성한 곡식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기다린 결과인가 그동안 이 열매를 맺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애태움을 가졌는가

결 론

1. 내면적인 신앙보다는 고백하는 신앙을 가지자.

 2. 의존적인 신앙보다는 자립적인 신앙을 가지자.

 3. 잎만 무성한 신자보다는 열매맺는 신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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