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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것 까지도 (고후 12: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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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요 누구에게 묻든지 [그것은 사랑입니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을 사랑이 될 수 있도록 승화시키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과연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천차만별의 대답이 나오리라 생각 됩니다.

그렇다면 진정 사랑을 사랑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 은 다름이 아니라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입니다.

아무리 많은 자선과 긍휼을 베푼다 해도 그 자선과 긍휼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면 결단코 그것을 사랑의 발로라 고 말하지 못합니다. 오직 그것은 자신의 이름과 명예를 높이기 위한 자 신을 과시하기 위한 자기만족의 한 수단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자신을 있게해준 모든 이들에 대한 감사가 넘쳐 진정 주위의 자신보다 못된 형편에 있는 이들과 자신의 것을 함께 나누는 이것이 바로 참 사랑이 아닌가 합니다.

흔히 내리사랑이라는 말들을 합니다.

때문에 세상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은 부모님의 사랑이라 고들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부모님의 사랑이 아름다운 것일까요 그것 은 다름아니라 무엇인가를 받기로 전제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 니, 한발 더 나아가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베푸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전도사로서 시무하던 서울의 어떤교회에서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 을 던진적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가장 중요하다고 생 각되는 순간을 한가지만 말해보자] 많은 대답중에 저는 이 대답이 아직까 지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주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학생이었는데 [예! 그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똑하고 떨어지는 순간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머니 뱃속에서 떨어지는 순간 부잣집으로 떨어졌으면 호강되게 잘 살 수 있었을 것을 가난한집으로 떨어져서 지금 이렇게 고생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자조섞인 대답이었습니 다.

만약 그 부모님이 그의 대답을 들었더라면 얼마나 가슴아팠겠습니까.

저는 그에게 참된 행복은 부잣집에서 태어났느냐, 가난한집에서 태어났느 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얼마나 만족하고, 감사 하며 살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어떤 환경을 가지고 있 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환경속에서 어떤 마음자세로 살아가고 있 는가가 더욱 중요하다는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여러종류의 사람을들 경험해가며 살아갑니다. 어떤이들 은 많은 것을 누리면서도 그것에 만족하거나 감사하지 못하고 사는가하면, 어떤이들은 아주 적은 것만을 누리면서도 그 속에서 감사하고, 오히려 베 푸는 사람들을 찾아보게 됩니다.

과연 어떤 삶이 진정 행복한 삶입니까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잠언 17장1절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 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말씀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작은 일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큰 일에 감사 할 수 있는 것이 요, 어렵고 힘든 가운데서도 감사하며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 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속에서 우리는 어려움과 고통까지 도 하나님께 감사로 승화시키는 사도 바울의 믿음을 바라보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의 교우들에게 권면한대로 자신도 항상 감 사하는 삶을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감사는 자신의 처지를 뛰어넘 은 감사였습니다.

사실 알고보면 사도바울이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드리는 것은 매우 당 연 한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는 대단한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때 문에 유대인들중 몇몇에게만 주어지는 로마제국의 시민권을 소유한 사람이 었습니다. 뿐만아니라 당대 최고의 랍비로 인정받던 랍비 가말리엘의 문 하에서 공부를한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또한 종교적으로는 바리새파에 속하여 이스라엘의 종교와 정신문화를 주도한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더우기 이러한 조건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다시한번 체험하고 지금까지의 잘못된 길을 벗어나서 참된 회개와 구원의 길오 접어들었으며, 많은 성도들에게 사도의 칭호를 받을 수 있었으며, 오 늘에 이르기까지도 기독교사에 가장 위대한 인물로 인정받고 신약성경에도 전체 27권중 자그마치 열세권에 이르는 책을 남기는 모든이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그런 사람으로서 어찌보면 감사도 한없는 감사를 드려야만 한사람 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당연할것 같아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내면을 살펴보면 그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많은 어려 움을 가지고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첫째로 바울이 많은 성도들에게는 사도로서 추앙을 받고있었으나 당시 교계의 지도자들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로 부터는 사도로 인정받지 못한 그 런 상태였습니다. 때문에 바울이 전도하러 가는 곳마다 항상 바울의 사도 권에관한 분쟁이 항상 따라다녔습니다.

즉 바울을 따라다니며 바울은 사도가 아니며 스스로 사도라고 칭하는 것은 교만함에서 나온 잘못이라고 헐뜯고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더우 기 예수님의 제자들도 자신들보다 사도바울의 명성이 더욱 올라감에 따라 바울이 사도라고 스스로 칭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도들이 점 점 많아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사도바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봅시다. 나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땅끝까지 전파하기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죽을 고생을 하는데 가는곳마다 따라다니며, 그 일 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사람들중의 상당수가 바로 그 일을 도와야 할 한편이라고 한다면 과연 나의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고통을 사도 바울은 항상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땅끝까지 전파하기 위해 받는 고통은 실로 눈물겨운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고백하는대로 예수의 이름을 전파하다가 그저 숨만 끊어지지 않을 많큼 때리는 사십에 한대 감한 매를 여러차례 맞아야 했으며, 수없는 재판과 투옥생활의 연속이었으며, 진정 예수를 전하다가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아까와 하지 않는 그런 각 오를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야만 하는 힘겨움이 항상 그의 어깨를 짓눌렀습 니다.

두번째로 바울에게는 자신을 위한 가장 간절한 기도제목이 하나있었습 니다. 바울은 그 기도제목을 위해 세번이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세번 의 기도라는 것은 우리가 새벽기도회 삼일간 나와서 매일처럼 동일한 기도 제목으로 기도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마치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두고 겟세마네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신 예수 그리스 도의 간절한 간구와 같이 자신의 전생애를 거는 그러한 기도였습니다. 그 러나 하나님께서는 [네 은혜가 이미 네게 족하다]고 간단히 일축해 버리고 마셨습니다.

실로 이 문제는 바울에게있어서 전도자의 역할 수행을 가로막는 커다 란 걸림돌이었습니다.

바울이 가지고 있던 이 육체의 가시는 악성 간질이었던 것으로 대부분 의 학자들이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 하다가 단위에서도 발작을 일으키곤 했던 것 같습니다. 때문에 갈라디아 서 4장 13절로 14절의 말씀을 보면,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 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라 고 갈다디아교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있는 모습을 찾아보게 됩니 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다가 단위에서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자신을 바라보며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때마다 일언 지하에 거절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봅시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 있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자신을 따라다니며 일을 훼방하는 자들 까지도, 또한 자 신의 목숨을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드려야하는 온갖 고생도,또한 하나님을 위해 그 고생을 하는데도 자신의 병을 고쳐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응답에 까지도 감사로 영광돌릴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바라봅시다. 과연 우리는 어디까지 하나님께 감사로 영광돌리고 있습니까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지난 한해동안 우리의 삶을 돌아보건대 어느하나 하나님의 인도함이 없었던 일이 있었습니까 평소 우리가 느끼 지 못했을 뿐이지 한 순간, 한 순간 하나님의 놀하운 은총과 보호하심이 우리를 떠난적이 없음을 깨닫고 깜짝놀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받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고 감사하는일에는 너무도 인색했음을 솔직히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니 그것이 감사해야 할 것인지 조차도 깨닫지 못하고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실로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주실 가장 큰 은혜와 사랑을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죄악중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영혼을 위해 당신의 외 아들을 아낌없이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새 생명과 새 삶 을 받아 누리게 해 주셨습니다. 세상 어떤 것이 과연 이 새 생명과 비길 만한 가치가 있겠습니까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즐겨읽는 수정교회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목 사님의 글중에 [더 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라는 책이 있습니다. 죽을 수 밖에 멋는 아무 쓸모없는 나를 택하셔서 새 삶을 허락하시고 영원한 생명과 참사랑을 누리게 하여주신 그것보다 더 큰 은혜를 과연 어디서 찾겠습니까 거기에서 머물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우 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일 수록 더욱 흔하게 만드셔서 우리가 쓰기에 모자 라지 않도록 풍족하게, 쓰고 넘치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또 감사하지 못하였을 수도 있을 것입니 다.

물이 그렇습니다. 공기가 그렇 습니다. 우리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땅이 또한 그래왔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물을 주신 하나님께, 또 공 기를 주신 하나님께, 불을 주신 하나님께, 그리고 이 땅을 창조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고 살아왔음을 솔직히 고백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 다.

우리의 주위를 돌아봅시다. 크고 작은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또한 몸을 상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이렇게 하나님께 나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바로 이순간 우리가 숨을 쉬고, 하나님께 나아와 머리숙여 경배드리고 있다는 바로 이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요, 우리의 감사제목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혹시 김귀동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분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이 름을 모른다면 충청북도 음성에 있는 꽃동네에 대해서는 많이 아실 것입니 다. 오늘의 꽃동네를 있게 만든 김귀동 노인은 얼마전 하나님 품에 안겼 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남기 유명한 말은 아직도 꽃동네를 들어가는 가장 앞쪽에 커다란 돌에 새겨져 그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습니 다. [구걸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은총입니 다!] 자신이 구걸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하나님께 감 사하며 정신박약 노인으로서 자신보다도 더욱 어려운, 움직일 수 조차도 없는 노인들을 모아 구걸하여 모은 밥으로 먹여 살리던 그 분의 감사야 말 로 우리가 지금까지 얼마나 감사에 인색했는가를 돌아보게 합니다.

뇌성마비의 몸으로, 남이 알아보기도 힘들정도로 어지럽게 쓰는 한자 의 글씨를 위해 몇분을 허비해야 하는 그 몸으로 참 감사의 찬양시를 하나 님께드리는 송명희 시인은 우리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 강있지 않으나,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남에게 없는 것을 주셨으니, 나 남이 못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받지 못한 사랑 받았 으니..... 참 병신이 누구입니까 남에게 병신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저입 니까 그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남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도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고, 찾지못하고,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는 그들이 바로 참 병신입니다.] 맞습니다. 자신의 부족함 까지도 감사의 제목으로 삼는 그 믿음 속에 하나님의 참사랑이 살아 숨쉴 수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세어 봅시다. 아마도 하 늘을 두루마리로 삼고 바다를 먹물 삼는다 하여도 그 은혜와 사랑을 다 적 지 못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 그것 까지도 하나님께 감사로 영광돌 리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벼농사가 우리 농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11월 셋째주 가 추수감사주일이라는 것은 일견 잘못된 것으로 보이기 쉽습니다. 혹시 미국이 그렇게 하니까 무화 사대주의 혹은 종교사대주의적인 발상이 그렇 게 만들었나 생각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청교도들의 그 진실된 감사가 살아 숨쉬고 있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영국 성공회로 부터 종교의 자유를 찾아 화란으로, 화란에서 포르투칼 로, 포르투칼에서 미지의 신대륙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은 미지의 땅에 도착 하자 마자 교회부터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인디언, 질병, 그리고 식 량난과 싸우는 삼중고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인디언의 습격이 있을 때 마 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그 어려운 와중에서 처음으로 얻은 옥수수열 매, 그것도 다음해 씨앗용으로 남겨 놓고나면 먹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그 첫소산을 하나님앞에 참 감사와 정성으로 바친 날이 바로 11월 셋째주일이 었습니다.

때문에 어려운 가운데 그 어려움까지도 감사했던 청교도들의 신앙을 계승하기 위해 지금까지도 우리의 실정과는 다소 다른 추수감사절을 지키 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추수감사절의 의미는 우리가 지금 이시간 처해 있는 상황 그 자체를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지금 나의 모습 이대로 감사를 드립시다. 내게 있는 어렴움 그것 까지도, 내게임한 고통 그것까지도 모두 하나님앞에 감사드리는 믿음 의 성도들이 됩시다.

오늘 이시간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종을 이 자리에 세우셨습니다. 나 약하고 부족한 사람입니다. 연륜도 짧고 경험도 없는 목사입니다. 제주 노회 담임목사로서는 가장 늦게 안수받았고 또한 나이도 가장 적은 사람입 니다. 때문에 과연 제가 이 무거운 중책을 이끌어 나아갈 수 있을까 하 는 두려움이 앞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바로 그 부족함 까지도 이시간 감사를 드립니다.

그 연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더욱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을 것이요, 나이도 어리기에 더욱 열심으로 뛸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약한 자를 통하여 더욱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고 영광받으시기 때문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범사에 감사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일에 감 사하는 자를 통해,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그것 까지도 감사하는 자를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시려 지금도 모든 준비를 해 놓으시고 기다리고 계십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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