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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예배 (골 03: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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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새 생명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생명은 악한 본성을 계속적으로 벗어버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동된 덕성들을 새로이 갈아 입음으로써 드러나게 됩니다.
이 과정은 지역 교회 내에서 진행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성화가 같은 교우들의 협조로 이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다른 방법을 쓰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좀 유감된 일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사들이 다른 사람들(흔히 달갑지 않은 교우들!)을 통하지 않고 우리들에게 집접 내렸으면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남들의 신세를 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화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집합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의도적으로 계획하셨습니다. 그래서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다른 교인들과 함께 그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들을 도우셔서 그의 계획을 잘 이해하게 하시고 어렵지만 불가피한 겸손의 루울 속에서 이에 순종케 하시기를 빕니다.

집단적 예배

집단적 예배에는 설교, 나누기(교제), 찬송의 세 가지 활동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3:16)
이 세 가지 형태의 예배 내용은 반드시 주일 예배 때에 포함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교회 생활 속에서 골고루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중(週中)에 있는 교회 활동 속에 이러한 상이한 예배의 측면들을 반영시키고 기도까지 포함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해야 한다는 권면입니다. 말씀을 읽고 선포하고 설명하고 적용하는 일은 예배의 기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선포는 종교개혁으로 회복이 되어 예배에서 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복음주의 교회들에서는 설교는 소홀히 다루고 예찬(찬미)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참된 예배가 아닙니다. 신령한 계시인 그리스도의 말씀이 없이는 진정한 영적 생활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1:27)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미 지적한 대로(1:24-28)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임재는 어떤 신비적인 체험이 아닌 성경적인 가르침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신실하게 강해하면 그 메시지를 감동시키시는 성령의 활동에 의해서 신자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성품이 서서히 형성됩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4:19).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 가운데서 모든 신령한 풍성함을 펼쳐 보이며 참된 예배를 드리도록 성도들을 감동시키고 신자들의 진정한 삶을 성장시키는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함께 모일 때에 말씀이 중심을 차지하지 않으면 예배는 의미가 없고 뜻도 통하지 않으며 영적 성격을 띨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가지고 나오는 것보다 언제나 항상 더 중요합니다.
오늘날 설교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습니다. 설교의 내용이 빈약해서 받는 비판은 지당합니다. 그렇지만 설교는 토론이나 친교의 시간으로 대치될 수 없습니다. 토의나 친교는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활동들이 인기가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엄숙하게 선포하는 일을 재외시켜서는 안됩니다.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3:16).
▥이 말씀은 자유롭고 자발적인 관계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성경공부, 상호간의 격려나 충고 그리고 신앙체험들을 나누는 일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개인적이고 실제적인 적용력이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설교 말씀은 모호하거나 이론적이서는 안됩니다. 설교는 생활에 실제적인 연관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생활을 밝혀주는 빛이라야 하기 때문에 옳고 그른 것을 가르치고, 믿음의 길로 교훈하며, 잘못을 바로 잡아서 회개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 본문에서 가르침과 바로잡는 일이 목사들의 전유권이 아님을 유의해야 합니다. 이것들은 모든 회중들의 의무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개인적으로 우리 형제들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잘못 가는 길을 알려주고 각자를 세우는 일에 동역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독립된 ‘목회자주의’의 개념을 물리친다는 것은 우리 형제들에 대한 책임을 우리가 맡는다는 뜻입니다. 이 책임에는 교회의 불가피한 의무인 징계의 임무까지 포함됩니다. 교회에서 보면 결정권이 있는 문제에서는 민주주의 방법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책임을 맡는 일에 직면하면 열심은 식어버리고, 어려운 일들을 남들에게만 돌리며, 교회의 질서를 회복시키는 공동의 사역에서는 발을 빼고 마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이것이 참된 민주주의입니다. 하나님이 각자가 맡는 사역을 위해 청원하는 자들에게 후하게 주시는 지혜로 우리들의 소임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이행토록 합시다.
▥예배의 세 번재 요소는 찬송입니다. 바울은 이 점을 강조키 위해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라고 삼중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교회예배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자발적인 응답이 솟아나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말씀은 격려와 견책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가슴 속에서 찬송이 터져 나오게 합니다. 찬송은 찬양, 감사, 겸비, 회개, 믿음, 소망 등의 전체적인 감정들을 포괄하는 총합적인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가슴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임재는 예배의 특수언어에 해당되는 찬송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신실히 설교를 통해 전달되면 정신과 양심뿐만 아니라 가슴에도 와닿게 됩니다. 참된 설교라면 청중의 마음을 부통의 자세로 냉담하게 얼려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설교의 말씀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면 그것은 자연히 찬송으로 응답될 것입니다.
성경의 시편들은 찬송으로 부르기 위해서 작시된 것들입니다. 시편들은 지금도 잘 표현한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동일한 느낌들을 표현한 찬송들이 교회의 전통으로 각 시대마다 전수되어 왔습니다.
마지막 ‘신령한 노래’라는 말은 아마 앞에 나온 ‘시와 찬미’를 요약한 것일 듯합니다. ‘신령하다’의 형용사는 성령의 감동으로 지어서 하나님께 바치는 찬송들이 일반 노래들과 다르다는 점을 구별시켜 줍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 마음으로 은혜를 머금고 노래하라’(영문성경 AV번역)고 강조하였습니다. 우리 입술의 노래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체험하여 경이로 가득 찬 우리 마음의 노래와 버금가야 합니다. 찬송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은혜에 대해 성령께서 직접 감동하신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설교로 전하고 교제를 나누면 자연히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이 세 가지 요소들이 드러날 때 교회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게 됩니다.(요4:23)

매일의 예배

집합적인 교회의 예배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항구적인 예배의 한 순간에 불과합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로 예배에 대한 우리들의 비젼을 넓혀 줍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3:17)
이 한 문장 속에 참된 예배의 의미가 집약되어 있습니다. 경건한 문구들도 아니고 감상적이거나 신비적인 말들도 아닙니다! 장황한 교훈이 실린 것도 아니고 헌신용 핸드북이 들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은 비약적이거나 선풍적인 내용 대신에 삶 전체를 혁신시키고 삶에 목적과 의미와 품위와 거룩한 위대성을 부여해 주는 간명하고 포괄적인 명령을 싣고 있습니다.
참 예배는 지성주의도, 감상주의도, 추상적 이론도, 자질구레한 루울의 카달로구도 아닙니다. 참 예배는 우리들의 일상 생활을 형성하는 모든 행위와 말과 생각들을 재훈련시켜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영적 예배는 매 순간의 생활 속에서 드러납니다. 다시 말해서 참 예배는 주중(週中)에 있는 특별 성회나 어떤 특정된 장소나 혹은 몇마디의 경건한 언행에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영적 예배는 칠일 중에 하루를 주께 바치고 수입에서 십분의 일을 떼어 교회에 바치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모든 노력, 생각, 말, 시간, 재물을 온전히 헌상하므로써 표현됩니다. 이러한 예배에는 노동과 수면, 건강과 음식, 젊었을 때와 늙었을 때, 천부적 자질과 분투, 기쁨과 슬픔 등이 다 헌신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 생애에 들어오셔서 모든 것의 중심이 되시고 자기 삶의 근원과 목표가 되는 것이 참 예배입니다.
그리스인은 고용주를 위해 일할 때 그는 자신의 노통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자신이 고용주가 되어 피고용인을 부릴 때에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세로 임합니다. 또 이웃에게 이야기를 할 때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믿고, 잠을 자거나 쉴 때에는 하나님이 새 힘을 회복시켜 주신다고 확신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또한 허약자나 가난한 자를 도우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봅니다. 그리고 공부를 하여도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나 어떤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돈, 명성, 정치, 스포츠, 음악 등에 특별한 관심과 욕구를 느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의 온 생애를 채워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실망과 실패, 불만과 반역, 모욕과 권태, 수면 부족과 궁핍을 감사의 찬송으로 변환시켜 줍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는 집단적이든 개인적이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에 대한 넘쳐 흐르는 감사와 기쁨의 응답이어야 합니다. 그럼 교회나 직장에서, 학교나 가계에서, 또는 부엌이나 의자에서 드리는 우리들의 예배가 이같은 감사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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