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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매자의 제사 (전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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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예배에서 찾을 수 있읍니다. 예배의 역사는 성경의 역사보다 오히려 더 오랩니다.

창세기에는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처음으로 낳은 가인과 아벨이 이미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고 하였읍니다. 성경에서 가인은 농사하는자임으로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 로 드렸다.(창 4:3)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배라고 하기보다는 아주 원시적 형태의 제사였을 것입니다.

노아도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중 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셨다.(창 8:20)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제사를 받으시고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벧엘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고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며(창 12:9) 또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 풀에서 단을 쌓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다고 했습 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자기의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고 할 때에 하나 님이 지시하신 산 모리아에 단을 쌓았으며 또 그 아들 이삭도 장성하여 하나 님께 단을 쌓았습니다.(창 26:25) 야곱은 하나님께 단을 쌓고 제사드리겠다고 서원한 후(창(28:22) 그것을 잊어 버리고 살다가, 뒤늦게 크게 시험을 당한 후에 회개하고 옛날에 서원했 던 그 땅을 은 100개로 사서 거기 하나님의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다고 하였 습니다.(창 33:19) 모세도 광야에 있을 때에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경배하였습니다. 아말렉 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둔 후에 '모세가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 시'라고 하였다'고 했습니다.(출 17:15) 그런 의미에서 성경의 역사는 인간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예배의 역사 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구약성서는 인류가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서 하나님을 어떻게 경배하였으며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를 자세히 설명하여 주고있읍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과 전통이 벧엘과 시내산 단 브엘세 바 실로 그리고 예루살렘에까지 이어져 내려옵니다.

예루살렘에 성전이 건립됨으로 예배제도가 확립되었고 이스라엘의 제사 종교는 그 극치를 이루었읍니다. 물론 그 때의 예배는 어디까지나 제물을 드 리는 제사였습니다. 제사법과 규례는 매우 세밀하고 엄격하고 복잡하였으며 그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최고의 존경과 경외심을 드리려고하는 의식의 표현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경외감의 표현이 한낮 종교의식화 하였을 때, 그것은 타성에 의한 습관적인 반복과 무의미한 형식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 다. 그래서 후대에 이사야 선지같은 분은 이 형식적인 종교의식에 대하여 말 하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 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사 1:11)

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종교의식 자체를 부정한 말씀은 아니지만 종교는 한갖 형식으로 가지고 있고 그들의 실제 생활은 하나님의 뜻과 너무 멀리 떨 어져 있는 것을 규탄한 것입니다.

그들이 예배하러 나오는 발걸음은 '공연히 마당만 밟는 격'이었고 그들이 바친 제물과 분향은 그것을 받으실 분께서 '가증히 여기는 바'였으며 또 그 들이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인 후에 즉시 돌아가서 악을 행하는 것을 볼 때에 견딜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사 1:13) 그것은 종교의 근본 정신은 저버 리고 형식주의로 타락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전도서는 그것을 '우매자의 제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때에 그 예배를 누구에게 드리는 것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앉아 있는 이 곳은 누구의 전이며 우리는 지금 누구 앞에서 찬송과 기도와 말씀과 봉헌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예배는 옛날 구약시대에 행하여졌던 제물을 바 치는 제사예배와, 오늘날의 예배와 같은 말씀중심의 예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의 제사예배는 바벨론 포로 생활중에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먼 이국땅에서 성전이 없었고 제단도 없었고 제사장도 없었으며 제물 마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랜 전통을 지니고 내려오던 제사예배가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전은 잃었지만 회당을 만들어 거기에 모여 율법을 읽고 배웠습니다. 안식일이 되면 회당에 모였고 서기관들은 율법을 강론하였습니 다. 이것이 말씀중심 예배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후대의 히브리서 기자는 유 대인들의 전통적인 제사와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제사를 비교하며 예배의 참 뜻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사예배는 이제 더 이상 드리지 않게 되었고 말씀과 기도 찬양과 봉헌 신령과 진리로써 예배를 드리게되었읍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의 극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러나 제사 행위 그 자체만 가지고 다 되었다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만일 아무런 생각이나 결단없이 '제사를 드렸으니 이제 다 됐다' 하는 것은 아무 런 의미가 없습니다. 단순히 예배에 참석했다고 해서 그것이 의무를 다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공연히 '마당만 밟는' 우매자의 제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배에는 '들음'이 있어야 하고 결심과 순종이 있어야 하며 또 생활의 변화가 따라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사행위와 동시에 말씀 의 선포가 있어야 됩니다.

세례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 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은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7-)

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기들의 제사예배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사건이었습니다. 그 때에 그들 가운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들 중 군인들과 세리들과 종 교지도자들이 요한에게 묻기를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라고 구체적인 지시를 내려 주기를 간청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다음에는 나아가서 어떻게 삶을 결단해야할지, 그리 고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지, 어떻게 새로운 변화를 이루어야할지를 생각해야 하며 그러한 의식의 변화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합니다. 그 때에 세 례요한은 너희 가운데 두벌 옷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하라고 하였읍니다. 그리고 너희 가운데 세금 거두는 자들은 나라가 정한 세 이외에는 더 받아내지 말라고 하였으며 또 너희 가운 데 군인들은 세도가 있다고 사람들을 강포하거나 무소하지 말고 너희들이 받 는 보수를 족한 줄 알고 살라고 명령하였읍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들의 삶이 변화되고 새롭게 되었습니다.

예배에 말씀이 없으면 이러한 변화는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말씀이 없는 습관적 예배는 아무런 유익이 없는 우매자의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거 창하고 성대한 제사행위 보다는 오히려 가까히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더 낫 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이란 순종을 말하며 결단을 의미합니 다. 사울왕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많은 가축들을 전리품으로 얻었습니다. 그 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것을 다 불살라 없애고 가지고 있지 말라고 하였 는데 사울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가축들을 숨겨 놓고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 기 위하여서 그랬노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사보다는 순종을 더 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이 없는 제사는 우매자의 예배일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예배를 드려왔습니까 주일이 되면 오늘 예배를 드렸으니까 내 할 일을 다 했다 하고 안도할 것이 아니라 예배 를 통하여 무언가 달라지고 변화되고 새로와지고 발전해 나가는 구체적인 결 과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말씀을 중심한 예배라고 해도 그 말씀을 들으면서 깨달음이 없다면, 또한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것 역시 우매자의 예배가 아니겠습니까 본문의 말씀에 '너는 하나님 앞에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고 하였읍니 다. 이것은 말로 서원(誓願)하기 전에 각자가 그 마음속에 깨닫고 결심한 바 를 성실한 자세로 지켜 나가라는 권면입니다. 땅에있는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속이거나 불경하게 대할 수 있겠읍니까 잠시 동안이라도 깨닫고 생각했던 것은 반드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의 예배는 구약시대 사람들이 짐승을 잡아 드리는 피의 제 사보다는 휠씬 세련되고 짜임새 있는 예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 이 있는 반면에 경외감은 매우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됩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왔는가 하나님이 여기에 계시다는 경외감과 두려움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가 우리는 땅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심을 알고 있는 것인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깊은 동기를 다 알 고 계심으로 사람에게 만홀(漫忽)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는 하나 님께 예배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경히 여기는 행위는 없었는가 생각 해 봅시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드려야 할 진정한 예배는 어떤 것입니까 성서는 우 리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 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마음의 감사함으로 하나 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던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 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6-)

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찬미의 제사라고 하였습니다. 이 찬미의 제사는 지난 일을 돌이켜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예배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 의 구속의 은총을 깊이 깨닫고 자연스럽게 감사가 우러 나오는 제사입니다.

여러분! 짐승을 잡아 피를 내고 각을 떠서 제단에 불살라 드리는 예배는 원시적인 행위였지만 경건성과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이 있는 예배였습니다.

제물이 되어 피흘려 죽은 가축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느꼈던 것입니다. 예배 자들은 그것을 친히 그 눈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예배도 일단 의식화(儀式化) 되면 그것은 우매자의 제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배와 행 위가 전혀 상관성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당 중심의 말씀예배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말 씀과 멧시지는 귀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경외감을 상실하고 오히려 산만한 예배 두려움과 거룩함이 없는 예배가 되기 쉬웠습니다. 그래 서 사도 바울은 감사와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고 하였습니다. 참 좋 은 예배는 이 모든 요소들을 다 포함하고 있어야 됩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 것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마 23:23) 우리의 예배가 우매자의 예배가 되지 않으려면 감사와 찬미의 예배를 드 려야 합니다. 제물을 드리고 소원을 비는 것보다 더 높은 예배는 감사와 찬 양입니다. 이러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의 삶의 새로 운 변화가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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