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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는 우리의 평화 (엡 0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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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의 어떤 수도원에서 신부복을 입은 낯선 구도자 한사람이 찾아와서 수도 원의 문을 두드렸습니다.그러자 수도원을 지키고 있던 사람이 나가서 물었습니다.

"누구를 찾자십니까" 낯선 구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저는 평화를 찾습니다 바 로 이 구도자의 이름이 <신곡>을 지은 단테라는 사람입니다.평화를 찾습니다 라는 이 한마디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대단히 크고도 중요한 것입니다.진정한 평화는 우리 모두가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나 우리 모두가 평화롭게 살고 있지는 않습 니다.

 우리 안에 평화가 깨어진 근본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은 그 원인이 죄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평화가 깨어진 것은 죄의 결과입니다.허물과 죄로 죽어서 세상풍습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마귀의 종으로 살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 었던 결과 우리는 평화가 깨어진 세상에서 살수 밖에 없었습니다.본문의 에베소교인 들도 그 평화가 깨어진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소 외라는 것이었이었습니다.그들은 소외된 세상에서 살았고 소외된 인류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두가지 종류의 소외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첫째는 하나님으로 부터 의 소외이며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으로부터의 소외였습니다.11절 말씀에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레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은 자들이라"

이방인들을 향한 유대인들의 소외는 매우 철저한 것이었습니다.주석학자 윌리 암 바클레이는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을 매우 경멸하였다.유대인들은 하나님게서 이방인들을 지옥불의 연 료로 사용하기 위하여 창조하였다고 말하였다.또한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 든 모든 민족들 가운데 오직 이스라엘만 사랑한다고 믿고 있었다.심지어는 이방 인 산모가 산고로 고통받을 때 그녀를 도와주는 것도 율법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였 다.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다른 이방인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게서 오시기전까지는 이방인들은 유대인에게 경멸의 대상이었다.그들 사이 의 장벽은 절대적인 것이었다.만일 유대인 청년이 이방인 처녀와 결혼 하거나 또는 유대인 처녀가 이방인 총각과 결혼하면 그 유대인 청년 또는 처녀의 장례식이 치뤄 졌다.이방인과의 그러한 교제는 죽음과 같은 것이었다.

 유대인과 이방인은 결코 만날수 없는 중간에 막힌 담으로 인해 철저히 막혀있 었고 말 그대로 원수 지간에 있었습니다.본문 14절에 보면은 중간에 막힌 담을 그리 스도께서 허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중간에 막힌 담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방인 의 뜰을 1

막아놓은 벽이었습니다.헤롯이 예루살렘에 세운 성전은 높은 지역에 장엄하게 세워 져 있었습니다.성전 둘레에는 제사장들의 뜰이 있었고 뜰 동편에 유대인들의 뜰이 그리고 조금 더 가서 여인들의 뜰이 있었습니다.이 세 뜰은 모두 동일한 높이에 있 는 뜰이었습니다.여기에서부터 다섯계단 내려오면 벽이 하나있고 벽의 다른 한쪽으 로 다시 열네계단을 내려가면 다른 벽이 또 하나가 있는데 그 너머가 바로 이방인들 의 바깥뜰이었습니다.높이가

1.5미터 가량의 돌로 쌓은 이 벽에는 헬라어와 라틴어 로 곳곳에 이렇게 씌여 있었습니다. "이 벽을 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그렇습니다.예수 그리스도,그는 우리의 화평이,평화가 되신 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 라는 사실을 말입니다.본문은 모두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소외된 인류,즉 한때 우리의 모습이었던 것에 대한 묘사이고(11-12) 화평케 하시는 그리스도,즉 예수 그리스도게서 행하신 일에 대한 묘사이고 (13-18)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즉 신분의 변화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이 살아가 는 새로운 삶의 방법,성도의 삶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터 소외되었 었던 에베소교인들의 상태가 본문 12절에서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그들은 그때에

그리스도 밖에 있었습니다.우리는 에베소서 1장에서 그리스도안에서의 영적인 축 복이 얼마나 크고 대단한 것들인가 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2장 전반부에서도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셨고 일으키셨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신다고 약속하여 주신 것입니다.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그에게 기다리는 것은 영원한 형벌,지옥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나라 밖의 사람이었습니다.여기에서 이스라엘 나라라함은 유대인들의 편 협한 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 즉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뜻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의 나라 밖의 사람이라.하나님 과 관계없고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이들은 영적인 고아였던 것입 니다.

 언약의 약속들에 대하여 외인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우리의 기독교는 약속 의 종교입니다.언약의 종교가 우리 기독교입니다.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고 진실하 여 반드시 지켜지는 약속입니다.우리들은 약속을 하고서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약속입니다.성취되 는 약속이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그런데 불행히도 그 약속에서 소외되었던 것입 니다.

2

그래서 그때에(그리스도를 알지 못할 때,영접하지 못하고,하나님을 믿기 전에,그 때에)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우 리의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입니다.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열매가 되시면서 우리 에게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시편 30편에서는 바로 이 소망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 습니다.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찌어다(왜냐하면)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 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바로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비록 가난하여도 소망 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그러나 아무리 부요해도 소망이 없는 사람은 가 장 불쌍한 사람입니다.내세에 대한 소망이 있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아니하 나 내세에 소망이 없는 사람은 죽음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인 것입니다.우리가 모 두 그때에는 과거에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할 때는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13절을 보십시요.여기에서도 그러나 라는 단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라는 접속사는 새아침을 밝히는 나팔소리와도 같이 우리에게 뭔 가 새로운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이제는이라는 말은 때가 찬 경륜을 뜻하 는 말씀으로 바야흐로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긴장감과 기대감을 갖게 하는 접속사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우리도 전에는 하나님과 멀리 있었고 서로서로도 멀리 있었습니다.마치 유대인 들과 이방인들이 멀리 있었던 것과도 같이 우리도 서로서로 멀리 있었습니다.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는 가까와 졌습니다.하나님과 가 까와졌고 모든 장벽을 허물고 막힌 담을 헐고서 우리의 공동체는 가까와 졌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의 삶의 스타일인 것입니다.즉 화평 케하는 삶입니다.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데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그는 본문 16절 후반부에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 니다.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단절 때문에 그리고 우리사 이에 평화가 깨어지고 우리 사이에 있는 원수된 관계들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를 흘 리시면서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습니다.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그러므로,19절의 그러므로도 대단히 중요한 접속사입니다.본문의 세부분은 모 두 세가지의 접속사로 시작되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12절에 그때에라는 접속사입니다.그때에는 그리스도밖에 있었고 이스라엘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 밖의 백성이었으며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서 외인이었고 세상에서 소 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13절에 그러나 이제는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의 피로 가가와 졌습니다.화평이신 그리스도가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으며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우리 둘이 (결코 만날 수 없었던 것처럼 여겨졌던 유대인 과 이방인이)한 성령안에서 하나님 아버지 나아갈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19절에 그러므로 이하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삶 의 모습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동일한 시민이며 하나님의 권속입니다.우리는 모두 한 가족입니다.사도들과 선자자들의 터위에 세움을 입은 한 식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돌이 되셔서 우리는 건물마다 서로 연결되어 주의 성전이 되어가는 지체들입니다."마지막 22절을 보십시요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의 공동체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의 공동체,즉 우리의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입니다.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 로 연결된,그리고 함께 지어져가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의 지체인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에베소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화해와 평화의 말씀입니다.하나님께서 에베소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제시하는 새로운 사회는 화해와 일치의 공동체인 것입니다.하나님과 서로에게 소외되었던 우리를 위해 즉 화해와 일 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그리스도의 복음은 화해 와 평화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안에 존재하는 소외가 있음을 우리는 부인하지 못합니다.우리 안에 존재하는 불일치와 불화를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마치 유대인과 이방인이 상종하 지 않았던 것 같은 분열과 분리가 우리안에 있음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우리는 이렇게 연약한 존재들입니다.우리는 오만과 편견에 싸여서 용서할 줄도 모르고 내가 제일인양 교만속에서 살고 있음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바로 우리가 이렇게 연약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원수된것 을 소멸하신 것입니다.우리의 연약함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 다.우리는 결코 나의 의를 가지고 화해의 복음을 실현할 수 가 없습니다.

4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으로 만이 우리는 평화의 복음을 실현할 수 가 있는 것입니다.우리의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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