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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출 03:7-8, 눅 10: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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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우리들이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설교자들이 자주 설교를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자주 들은 설교의 내용은 "예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지나치게 들떠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상태에서의 신앙생활 보다는 차분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신앙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또한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열심을 내어 교회에 헌금하고 봉사하고 교회의 직임을 맡아서 이것저것 여러가지 행사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순종하는 일이다"라는 내용의 설교를 우리들이 자주 들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설교자들은 때때로 마르다와 마리아를 대립시켜서 마르다가 하는 일 보다는 마리아가 하는 일을 찬양하는 설교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자기집으로 영접하여 접대하는 소위 「이웃봉사」 (디아코니아, Diakonia)에 열중하고 있는 마르다 보다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르다와 같은 바깥 활동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서 「주임의 말슴,(로고스)에 경청하는 마리아를 찬양하는 것이 설교자들의 일반적인 경향입니다.

이같은-마리아를 찬양하는-경향으로 설교자들이 설교를 하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 사이에 개입하셔서 봉사(디아코니아)에 분주하고 있는 마르다 보다는 말씀(로고스)에만 열중하고 있는 마리아를 오히려 두둔하신 듯한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41-42)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41-43)을 몇일 전에 출판된 「표준새번역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마르다에게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있다. 그러나 필요한 일은 하나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그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를 불러일으킨 말씀이 42절 "그러나 필요한 일은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일을 택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때문에 마르다 보다는 마리아를 예수님께서 두둔하신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의 관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본문이 과연 이와같이 "말씀을 듣는 일"이 봉사활동을 하는것 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고, 우리에게 오직 필요한 것은 단지 말씀을 듣는 것, 그것 "한가지 뿐"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말씀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만약에 우리의 본문이 이웃봉사하는 일이 필요가 없고 단 한가지 오직 필요한 것은, 말씀을 듣는 것, 그것 한가지 뿐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라면, 오늘 우리의 본문 바로 앞부분에 있는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 (눅10:25-37)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읽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또 대두됩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전하는 메시지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들도 세상에 나가서 선한 사마리아인 처럼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비유입니다.

이렇게 누가가 이웃사랑, 이웃봉사를 강조하는 예수님의 비유말씀 바로 다음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쓰면서 이웃 봉사를 무시하고 오직 말씀을 경청하는것, 오직 필요한 것은 오직 그것 한가지뿐이라는 내용을 담은 말씀을 어떻게 쓸 수 있었겠는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결론적인 생각은, 누가는 결코「이웃사랑」과 「말씀경청」을 대립시키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누가는 봉사가 중요하냐 말씀이 중요하냐 둘중의 어느 하나를 중요시하거나 어느 하나를 무시하거나, 어느 하나를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의 본문을 읽을때, 예수님께서 활동적이고 서서 움직이면서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을 지닌 마르다 보다는 조용하게 앉아서 말씀을 경청하고 말씀 명상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을 지닌 마리아를 더 좋아하시고, 그를 두둔하신 것으로, 그렇게 본문을 읽는다면, 아마도 본문의 의도를 왜곡시킬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본문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특히 41절과 42절에 있는 말씀 "많은 일"이 아니라,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뿐"이라는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필요한 일은 오직 하나뿐"이라고 하셨는데, 그 "한가지"가 무엇인가하는 것을 우리가 밝혀야 할 내용입니다.

우리가 성경본문(Text)을 이해하려고 할 때, 그 본문이 쓰여진 상황(Context)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본문의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9장에서 수난예고를 하셨습니다.(9:22이하, 9:44) 예수님의 선교활동은 이제 그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눅 9:22에서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야 하리라"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 하시고, 그가 수난받으시고 십자가 처형당할 장소가 예루살렘이라는 것을 모세와 엘리야의 입을 빌려 알리셨습니다.(눅9:31)
오늘 본문의 상황은 바로 십자가를 향해 예루살렘 상경길에 오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장한 심정으로 이 길을 가십니다. 이 비장한 길을 걷는 예수님의 인간적 고뇌와 갈등, 고독은 절정에 달한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 고통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가시는 도중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들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할"(눅9:22)일을 눈 앞에 둔 이 예수님을 위한 일은 무엇인가 그같은 주님을 위해서 해야할 봉사는 무엇일까 하는 것이 오늘 설교의 주제가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처한 절박한 상황, 그의 갈등과 고뇌 중대한 결단을 해야하는 기로에 서있다는 사실을 감히 이해하고 거기에 적합한 봉사를 하는 일입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그 길을 향해 가시는 주님,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 가운데서 비장한 결단을 해야하는 주님을 위해 필요한 일은 이것저것!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 그런 일이 아니라 "오직 한가지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하나가 무엇입니까 그 하나는, 비장한 결단앞에 서 계시는 주님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듣는것" 그 일입니다. 마리아처럼 주의 발앞에 앉아서 그의 말씀을 듣는것(눅10:39)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특히 고뇌하고 있는 자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의 고뇌와 고통에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남을 받아들이고, 수용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처럼 상대방을 존경하고, 인격을 존중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듣는 일은 상대방의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수용하고 용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본회퍼 목사님은 듣는 섬김이 큰 섬김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고통을 들으셨습니다.(출3: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고통을 들으심은 이스라엘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고통에 연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고통과 신음소리와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이스라엘과 언약하신 것을 기억하시고 모세를 애굽 땅에 보내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대 역사를 이룩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주위에는 고통받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진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자, 생을 바로 살기 위하여 고뇌하느자, 신앙적인 갈등으로 인하여 몸부림치는자, 육체적 정신적인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는자, 자녀들의 문제로 인하여 사업으로 인하여, 경제적인 궁핍으로 인하여 고통받는 자들은 우리 주위에 너무 많습니다. 이들의 고통소리, 이들의 신음소리,이들의 한숨소리가 하늘에 사무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통가운데 있는 자를 위한 최대의 봉사는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그들의 고난을 이해하고, 들어주고 수용하고, 그의 아픔이 나 자신의 아픔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많은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많은 교훈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조적이고 논리적인 수다한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욥의 세 친구와 같은 논리적이고, 교훈적이고, 탄약형식의 교조적인 말은, 고통 가운데 있는 자에게 무익한 것입니다. 고난중에 있는자, 도는 비장한 결단 앞에서 번민하며 갈등하는 자를 위한 참으로 필요한 일은, 단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그이 고난과 고뇌에 동참하는것, 그 한가지만이 최선입니다.

이같은 것은 우리의 목회에서도 쉽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근심과 고난중에 있는 교우를 목회자가 심방할 때나 교우들과 상담할 때, 목회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과 최대의 일은 참으로 필요한 것은, 고난중에 있는 교우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가 당한 고난의 형편을 말하는 것을 마리아처럼 그의 앞에서 진지하게 듣고, 그의 고난에 마음으로 알며, 동참하며, 기도하는 일입니다. 욥의 친구들처럼, 죄를 질책하고 훈계하고 교훈하는 일이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목회에서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위에 심령이 상한자, 고통 가운데서 몸부림치는자, 한맺힌 자들의 부르짖음과 넉두리가 많습니다. 그들을 위한 최선의 봉사, 참으로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동참하는 일입니다. 말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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