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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창 1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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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3장은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교훈해 줍니다. 아브라함과 조카인 롯은 점점 소유가 많아지면서 함께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양가의 종들이 서로 티격태격 싸우는 것이 잦아지게 되자 큰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롯에게 주거지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13:9을 보면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롯은 소돔과 고모라 지역을 선택했고 아브라함은 살고 있던 곳에 그냥 머물게 되었습니다.

우린 여기서 롯의 선택과 아브라함의 처신이 주는 교훈을 찾아야 합니다.

 1 롯의 선택 그것은 한 마디로 잘못된 선택이었고 성급한 결단이었습니다. 그는 큰아버지인 아브라함이 「너 먼저 선택하라」고 했을 때 일말의 주저도 없이 선뜻 소돔과 고모라 지역을 선택했습니다. 그곳은 훗날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선택이 왜 잘못 되었는가를 찾아 보겠습니다. 1) 눈으로 선택했습니다.

10절을 보면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 보았다”고 했습니다.

눈의 기능은 다양하고 경이적이긴 합니다만 그러나 제한적입니다. 전체를 다 보진 못합니다. 가령 배우자를 선택할 때 눈으로만 결정한다면 그 선택은 위험할 수 밖에 없습니다. 눈은 색깔, 생김, 크기는 볼 수 있지만 인격이나 사상이나 신앙은 볼 수 없습니다.

창세기 6:2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고 했습니다.

신앙도 인격도 제쳐놓고 눈에 드는 여자, 눈으로 보아서 이쁜 여자들을 아내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타락과 범죄의 원인이 되었고 홍수심판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창세기 3:6을 보면 하와가 뱀의 꼬임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눈」이 문제가 됩니다. 눈으로 보고 결단했습니다.

눈이라고 해서 다 눈이 아닙니다. 진리를 보고 주님을 바라보고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좋은 눈입니다.

클라라 스카(MRS. CLARA SCOTT)여사가 1895년에 만든 찬송의 1절 가사가 생각납니다.

“어두운 내 눈 밝히사 진리를 보게 하소서 진리의 열쇠 내게 주사 참 빛을 찾게 하소서 깊으신 뜻을 알고자 엎드려 기다리오니 내 눈을 뜨게 하소서 성령이여” 신령한 눈으로 사물을 보고 세계를 보고 역사를 보고 영원한 세계를 봅시다. 그리고 신령한 눈으로 주님을 바라봅시다.

2) 조건을 선택했습니다.

10절을 보면 롯이 눈으로 보고 선택한 곳의 조건의 열거되어 있습니다. 그 조건이란 물이 온 땅에 넉넉했고, 여호와의 동산이었던 에덴 동산처럼 아름답고 애굽땅 처럼 비옥했습니다. 중동지방에서 물이 넉넉하고 땅이 비옥하고 아름답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조건입니다. 롯은 바로 그 조건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롯은 조건이나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떤 돈 많은 재벌의 총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건강과 장수를 위해 물은 제주도 한라산의 생수를 공수해다가 마셨고, 쌀이나 채소는 직접 무공해 재배로 먹었고, 생선을 남태평양에서 잡은 것을 먹고, 그리고 보신을 위해 가장 좋은 것들을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나 100년도 못살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수, 건강, 행복의 비결은 환경이나 조건이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썩은 물보다는 생수를 마시고, 중금속 오염된 쌀을 먹는 것보다는 무공해 쌀을 먹는 것이 건강과 장수의 조건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행복이나 건강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 맑고, 공기 좋고, 경치 좋기로 친다면 노르웨이나 오스트리아, 스웨덴, 덴마크, 그리고 호주, 뉴질랜드, 미국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 사람들에게 행복한가, 만족한가를 물으면 그들은 고개를 좌우로 흔듭니다. 그리고 후진국보다 자살자 수가 몇 십배 더 많습니다.

롯이 선택했던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 물이 넉넉한 만큼 죄도 넉넉했습니다. 먹거리 볼거리가 많은 것만큼 타락과 범죄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유황불로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돈만 있으면 만사가 형통이라는 사람들과, 환경문제만 해결되면 지상은 낙원이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크나큰 경종을 울려줍니다.

가난한 시골 젊은이가 열심히 공부해서 모 명문대학 법대에 진학했습니다. 그리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그리고 사법고시에 응시하여 3년만에 합격했습니다. 그는 내세울 것 없고 가난한 자기네 집안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장가만은 명문집안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떵떵거리고 세도부리며 살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중매가 들어왔습니다. 돈많은 회장의 손녀 딸이며, 그 재벌 계열회사의 사장의 장녀였습니다.

그녀는 일류대학은 아니지만 대학을 나왔고, 나이는 남자보다 다섯살 위인 노쳐녀였습니다. 얼굴은 살짝 곰보였고, 고등학교 때 입은 교통사고로 턱 밑에 흉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고로 왼쪽 팔이 약간 굽어 있었습니다. 결혼 조건은 네개의 열쇠와 은행 통장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50평 아파트 열쇠, 자동차 열쇠, 별장 열쇠, 금고열쇠 그리고 예금 통장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젊은이에게 더없는 조건과 환경이었습니다만 신부감은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조건을 선택하기로 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가 그녀와 지금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을 것인가 불행해졌을 것인가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보다 조건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보다 조건을 더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입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롯이 선택한 그곳을 가리켜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고 했습니다.

물이 넉넉하고 아름답고 비옥한 그곳이었지만 거기 사는 사람들이 악했기 때문에 불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흔적도 없는 곳이 되고 만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1) 말씀을 순종했습니다.

그는 선택을 자신의 의지나 판단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떠나라면 떠나고, 머물라면 머물고, 바치라면 바쳤습니다.

창세기 12:1-4을 보면 하란을 떠나라는 말씀 한마디에 즉시 고향을 떠났습니다.

창세기 14:20을 보면 즉석에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창세기 22장을 보면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쳤습니다.

그는 눈으로 보고 머리고 생각하고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멋대로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순종했고, 그 뜻을 따라 모든 것을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이 무엇이며, 순종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롯은 자신의 의지와 결정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의 의지와 사고와 결정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고 순종했습니다.

미국 어느 교회에 목사님이 부임했습니다. 그 교회는 3천여 명이 모이는 큰 교회였습니다. 부임 첫 주일예배가 끝나고 나자 할머니 한 분이 찾아와 인사를 하더니 “목사님 수고가 많으시겠습니다. 수천명 교인들의 마음을 다 맞추시려면 얼마나 고생이 많으시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다음 주일 그는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수천명이 넘는 여러분의 비위나 마음을 맞춰주기 위해 이 교회에 부임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저더러 3천여 명의 비위를 낱낱이 맞추라한다면 저는 이 교회를 떠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제 말을 순종하고 따른 다면 저는 생명 다해 일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저를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라고.

하나님께 나를 맞춰가며 삽시다.

롯은 세상조건에 자신을 맞추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었습니다. 이것이 참 믿음이고 순종입니다.

2)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나 조건들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선택했습니다.

이 신앙이 바로 성숙한 신앙입니다. 환경이 나빠지고 조건이 악화되고 난관이 앞을 가로 막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주님으로 선택한 사람은 원망하거나 쓰러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롯과 같은 사람은 조건이 나빠지고 환경이 불리해지면 금방 신앙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떠납니다.

앞에서 얘기했던 젊은이의 결혼 뒷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래 애정없는 결혼이었습니다만 설상가상으로 정권이 바뀌면서 처가집 가운이 기울고, 회사가 부도가 나서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6개월만에 아내와 이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우리의 선택과 목적을 정해야 합니다.

왜 많고 많은 종교 가운데 기독교를 선택했습니까 왜 수만개의 교회 가운데 충신교회를 선택했습니까 그리고 왜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선택했습니까 병을 고쳐준다는 약속 때문입니까 부자가 되게 해 주겠다는 약속 때문입니까 아니면 직업을 주고 직장을 주고 회사를 일으켜 주겠다는 약속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런것들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좋아서 선택한 것입니다.

최고 최상의 신앙은 조건이나 환경 다 빼앗겨도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 그 신앙이라야 하나님의 끝없는 은총과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본문이 그것을 설명해 줍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은 참으로 큰 것이었습니다. 1)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셨습니다.

14절을 보면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혈육인 롯과 환경과 조건이 아브람을 떠난 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눈이 보이는 조건들은 그를 떠났지만 그 조건들을 다스리시고 만드시는 하나님이 그에게 오신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2) 복을 주셨습니다.

15절-17절을 보면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네 자손을 땅의 티끌같게 하리라”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롯에게는 땅을 주신다는 약속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롯의 후손에게는 그 번영을 보장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맞췄던 아브라함은 땅도 받았고, 건강도 받았고, 아들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신령한 축복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러분! 눈에 보이는 조건때문에 흔들리지 맙시다. 환경이 변했다고 원망하지 맙시다. 조건만 바라보고 조건만 따르다가 예수 버리지 맙시다.

조건이나 환경은 사라져도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신 다는 것을 확신합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서남북에 편안한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만 바라보지 맙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봅시다.

 (199

4.

 2. 20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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