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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는다는 것은 (히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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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을 가리켜 흔히 X세대라고들 말합니다.

현대 젊은이들의 대명사로 불리우고 있는 이 X세대라는 말은 그 기원이 [그들의 머리속에는 도대체 어떤 생각이 자리잡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의 미에서 수학의 미지수를 의미하는 X를 빌려왔다고 합니다.

혹 어떤 연로하신 분들은 글러먹은 세대이기 때문에 X세대라고 한다고도 말하더군요.

하지만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의 삶을 바라보면 가히 X세대라고 지칭할 만 한 삶을 사고 있다는 느낌을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느끼게 됩니다.

그중에서 상당히 심각한 몇가지 현상들을 살펴보면 첫째로 그들의 행동과 심리가 안정되지 못하고 쉽게 돌변하고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상태에 처해 있다는 점이며, 둘째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확실한 비젼을 가지고 있지 못한 젊은이들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이며, 셋째로 가장 심각한 것은 자신이나 혹은 타인의 삶의 가치와 목표를 정 하지 못하고 세월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등학생들을 한번 살펴 봅시다. 그들은 새벽별보고 등교해서 빨라야 밤 11시가 되어야 자가용 끌고온 부모님이나 혹은 돈주고 대절한 봉고에 몸을 의지하고 집으로 옵니다. 그리고는 쉴새없이 새벽 한,두시 까지 책과 씨름하고 나서야 불안함을 접어둔채 눈을 붙입니다. 그리고 는 또다시 새벽별을 보고 등교를 해야하는 쳇바퀴를 돌리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도대체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냐고 물으면 대답은 한결같이 " 좋은 대학가기 위해서요." 아니면 "부모님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려고 요."입니다.

그러면 다음질문을 해볼까요 "왜 좋은 대학 가려고 그러니" 그 대답은 무엇일까요 "좋은 직장가서 성공하려구요."그러면 마지막 질문을 한번 더 던집니다. "성공해서 뭐할려구" 과연 어떤대답이 나올까요 대부 분 이 질문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왜일까요 자신의 삶에 관한 확실한 가치관과 믿음이 정립되지 못하였기 때문 아닐까요오늘날 대 부분의 고등학생들이 자신이 어떤 미래와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 르면서 그저 남들하니까 등떠밀려 공부에 혹사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 다. 그러니 그들의 머리와 가슴속에 과연 무엇이 들어있는줄 어떻게 알 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단지 오늘의 젊은이들 소위 X세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들의 삶속에서도 너무나도 쉽게 보여 지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저를 놀라게 합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예" "그러면 예수를 믿는다는게 과연 무엇이지요" "글쎄요." 바로 이것이 오늘을 사는 대부분의 그리 스도인들이 갖는 문제점입니다.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도대체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요 마치 밤잠못자고 열심히 공부를 하기는 하는데 도대체 내가 왜 이 공부 를 하는지 조차도 모르고 혹 안다고 하는 것도 단지 좋은 대학 가기 위 해서라는등의 왜곡된 가치와 목적을 가진 오늘날의 고등학생들 처럼.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고, 또 성경읽고, 예배참석하고, 누가 물어보면 예수 믿는다고 말 할 수는 있는데. 당신은 무엇을 어떻게 왜 믿고 있는가 하면 막상 대답이 막히고 혹생각난다하더라도 왠지 모르게 체한 속같이 찜찜한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 아닙니까 때문에 우리는 먼저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를 찾기위해 노력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오늘날 우리의 믿음을 기 복적으로 만들어가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그저 내가 헌금 많이 하고, 열심히 예배참석하고, 열심히 헌신하면 하나님 복 많이 주시겠지 하는 식의 생각이 바로 우리가 믿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잃어버리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진정 [우리가 믿는다는 것]의 올바른 의미는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믿는다]는 것이 과 연 무엇인가를 몇가지 측면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확실한 대상이 있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라는 말씀은 비록 우리가 믿고자하는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라 할 지라도 그것은 확실한 실상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말을 [신뢰]라는 말로 도 표현합니다. 또한 종교적인 표현으로는 [신앙]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어떻게 표현되건간에 헬라어로 [피스티스]라고 읽혀지는 이 단어는 어떤 확실한 대상에대한 절대적인 의뢰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모든 믿음에 는 확실한 믿음의 대상이 일게 마련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제주도 내에 있는 모든 미신이나, 무당들의 [신방]행위를 한데 뭉퉁그려서 무속신앙이라고 표현하곤 합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의지하는 그 귀신이 틀림없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한번에 500만원 천만원을 들여서 [신방]을 차리곤 하는 것 입니다. 만일 그들에게 자신들을 확실히 지켜줄 확실한 대상이 없으면 그들은 결단코 어떤 관심도 그 속에 쏟아붇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친구사이에 형성되어지는 우정과 신뢰도 상대방이 틀림없이 믿을만한 친구라는 확실한 동기가 마련될 때에 비로소 마련되는 것입니 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믿음역시 확실한 대상 하나에 고정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많은 그리 스도인들이 바로 이 확실한 대상이 흔들리기 때문에 아직도 여기서 이소 리 저기서 저소리를 속삭여대면 바람에 갈대가 흔들리듯 속절없이 헤메이 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확실한 믿음의 대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아니라 우리를 지어주시고, 항상 주관하시며, 한없이 용서하 셔서 독생자를 통해 구원의 선물을 베풀어주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뜻 을 성취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죽어주심으로 우리를 죄악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마련해 주신 그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그 어 떤 것도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을 바라다볼 때 과연 우리의 믿음의 대상에서 그분은 제외된 채 재물, 명예, 안락, 지식, 권세등 여러가지들이 대신 그 자리를 메꾸고 있는지요. 결국 이런 여러가지들이 우리 믿음의 유일한 대상이 되셔야 할 그 분의 자리를 강점하고 있기에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수 밖 에 없는 것입니다.

재물 그것이 인간을 능력있게 보이고 또 어떤 때에는 나의 삶을 확실히 책임져 줄 수 있을 것 같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재물도 나의 삶을 확실히 책임져줄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명예, 지식, 권세 그 어떤 것도 우리의 궁극적인 생명과 삶을 책임져 줄 수 있는 대상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직 무소부재하시며 전지전능하시고, 영원불변하 신 하나님과 그 분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모든 삶 즉 이세 상 뿐만 아니라 오는세상에서 까지도 확실히 나의 생명과 삶을 보장해 주시는 유일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아직 내가 체험해 보지 못한 모든 현 상들에대한 변할 수 없는 확고한 기대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에는 우리가 아직까지도 체험해 보지 목한 수 만가지의 현상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그 수 많은 현상들을 당연한 일일것이라는 확고한 기대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은 믿지 못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세상은 많은 혼란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과연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께서 혁혁한 전과를 세우시고 장렬하게 전사하셨다는 사실]을 실제로 당시를 경험해 보지 못한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의 한 오백년쯤 전의 역사도 그 러할찐대 하물며 2,3000전을 살다간 플라톤, 알렉산더 같은 사람들의 역사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실제로 그 시대에 그들을 경험해 보지 못했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존재와 그들 의 삶과 업적을 그대로 믿고 살아갑니다.

실제로 눈에보이는 것을 가지고는 내가 믿는다고 표현 할 수 없습니다.

방금 앞에가는 차를 추돌한 차를 사고현장에서 바라보면서 [이차는 틀림 없이 사고난차임을 나는 확실히 믿어]라고 말하는 바보같은 사람은 없겠 죠 때문에 우리가 믿는 다고 말한다는 것은 비록 지금 내게 눈으로 보 이는 것은 아니지만 틀림없이 그대로 될 것을 기대하는 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는다는 것은 현재나 과거보다는 미래적인 의미가 더욱 강한 말 입니다. 즉 [나는 네가 틀림없이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라든지 [너는 그따위일은 절대로 안할 사람이란 것을 믿어]라는 말들은 결국 미 래적인 성격을 강하게 갖는 말들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의 유일한 대 상이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다시말해서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하 신 모든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인도하심과, 미래의 예언들이 틀림없는 진실임을 확신한다는 뜻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는 바로 나를 위해서 태초이래 지금까지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일을 이루셨 으며, 지금도 나를 이끌어 주고 계시며, 또한 앞으로도 영원까지 나를 위해 성경에 예언해 두신 모든 것을 확실히 이루실 분이라는 사실에 대 한 확고한 신뢰와 기대가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세번째로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그 믿는 것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 하며 어떤 것도 감수하고 전적으로 의뢰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 입니다.

어떤 친구가 빚보증을 서 달라고 왔다는 가정을 해 봅시다. 그 때 "사실 내가 자네를 확실히 믿기는 하네만 그래도 그게 어디 그런가"라고 한다 면 이미 그 속에는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니 나는 자네를 못믿네 하는 것보다 더욱 음흉한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진정 그 친구를 확신한다면 보증을 서 주어야 하겠죠 실제로 우리주변 에서 그렇게 친구를 믿었기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사람들이 적지 않음 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믿는다는 것은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일도 할 수 있고 또 어떤 불이익도 감수 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속에서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믿음을 위하여 그 어떤 고통도 감수했 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찾아보게 됩니다. 지난 설교 때 말씀드린 요셉 이 그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았던 바울, 베드로 그외의 여러 사도들이 그랬으며, 심지는 교회 역사상에 수많은 획을 그었던 믿음의 선진들이 바로 이 믿음을 위해서 모든 고통을 감수 하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바쳤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히브리서 11장의 4절로 6절 그리고 그 이후의 11장 전체가 바로 이렇게 믿음을 위해 자신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하나 님께 전적으로 매달렸던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신 하나님께 서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모든 것을 옳게 이루기 위해 그 어떤 어려움도 견디어 내고 또한 평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겠다는 자기 의지와도 연결 된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이러한 신뢰는 전적인 신뢰여야만 합니다.

미국 어떤 주에 수천에이커가 넘는 수박밭을 경작하는 농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이나 한국이나 서리가 성행하기는 마찬가지였나 봅니 다. 서리꾼들이 와서는 그냥 수박만 몇개를 따가면 괜찮겠는데 이것은 한번 들어오면 상당히 넓은 부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곤 하였던가 봅니 다. 그래서 주인은 한가지 꾀를 냈습니다. 큰 판자에 '이 밭의 수박중 하나에는 독이 들어있습니다. 먹고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책임질 수 없습 니다.'라고 써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세워놓았답니다. 그런데 정작 일은 그 다음날 벌어졌습니다. 다음날 자고 나니까 팻말에 "하나" 라는 글자가 지워지고 "둘"이라고 씌어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농부는 수천에이커에서 나는 모든 수박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전적인 신뢰가 아니라면 결국 그 믿음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그 하나님의 모든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모든 어려움도 감수하되 오직 전적인 신뢰속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 최선은 무엇이 되어도 상관 없습니다. 헌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선 행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재물이 될 수 도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성경읽는일, 기도하는 일 어떤 것이든 상관없는 것입니다. 단 주의해야 할 것은 그것이 어떤 댓가를 바라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해 주신 모든 일들이 너무 감사하여서 그 모 든 일들을 믿는 성도로서 그 감사의 발로로서 이 모든 최선을 오직 전적 으로 신뢰하는 마음으로 수행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밖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은 전혀 반대 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부자가드린 거금의 연보보다는 가 난한 과부가 드린 두렙돈의 연보를 더욱 가치있게 여기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양의 헌신들을 드리냐에 촛점을 맞추시는 것이 아니라, 얼 마나 진정한 마음과 정성으로 그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드렸는가를 더욱 중요하게 평가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는 예수를 믿노라]고 자부하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진정한 믿음의 대상들은 과연 재물이 아니었던가요 아니 면 명예, 부귀, 권세가 아니었습니까 진정 우리의 유일한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를 위 해 아니 그 어느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행해주시고 이루어주시고, 인도 해 주시고 또한 예언해 주셔서 앞으로 반드시 이루어 주실 그 모든 구원과 생명의 사역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 나의 모든 정성 과 중심을 다해 최선을 다하며 어떤 어려움도 감수해 내는 그러한 믿음 을 나의 삶에 채우기 위해 결단합시다. 그리고 돌이킵시다.

 너는 과연 무엇을 믿느냐 그리고 그 믿음을 지키고 이루기 위해 무엇 을 어떻게 행하고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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