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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삶(2) (호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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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석 < 2절 > 호세아를 통한 야훼의 말씀의 시작. 이는 2절 후반부에서 9절에 이르는 문 학적 단위의 표제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호세아가 가지는 독특한 예언자 적 사명에 대하여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예언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 아 그 말씀을 제 3자에게 전달하는 메신저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주로 "야훼께서 …에게 ([엘]) 말씀하시되… "라는 메신저적인 형식 문구를 사용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을 통하여"라는 전치사 를 사용하여 "호세아를 통하여 ([브호세아])"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호세아와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 memorabile 가 호세아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에서"...통하여" 라고 말하는 것은 호세아가 야훼의 도구임을 말하는 동시에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 전체는 야훼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케리그마를 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호세아로 하여금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게 하기보다는 긴 시간 에 걸친 그의 행위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야훼의 심판의 의지 를 표명하는 것이다.

 2절 후반부에는 호세아에게 주어진 첫번째 하나님의 명령이 나타난다. 호세아로 하여금 음란한 여자와 결혼하고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취하라"는 동사가 동시에 두개의 동격인 목적 어들을 갖는 점이다. 즉 음란한 아내와 음란한 자식들은 서로 동격으로 호세아가 취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법적인 문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야기시킨다:음란한 여자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직업적 인 창녀를 말하는 것일까 음란한 자식들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어머니가 창녀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태어난 자식들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들도 음란한 일을 하였다는 말일까 구약의 다른 부분에서는 직업적인 창녀를 의미하는 단어로 [이솨 조나] 를 사용하고 있다 (수 2:1; 삿 11:1 등을 참조하라). 따라서 여기에서 사 용된 복수형의 "음란한 아내 ([에쉐트 즈느님])"가 단순히 직업적인 창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의미를 좀 더 정확하게 알기 위하여서는 호세아 4:12과 5:4에 사용된 "음란한 영 ([루아흐 즈누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음란한 영이란 의미는 여호와를 떠나 타락한 사람들의 영을 말한다고 할 때 음란한 아내란 의미도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여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당시 이스라엘에는 생산의 능력을 부여받기 위하여 바알에게 바치 는 성적 제의 sexual cult 가 성행하고 있었다는 것은 많은 학자들에 의 하여 증명되어졌다. 이 제의에서 이스라엘의 여자들은 결혼을 하기 전에 바알 신전에서 남창들과의 성적 관계를 통하여 생산의 능력을 부여받는다 고 생각하였고 남자들도 거룩한 창녀들과 성적 관계를 가졌던 것이다. 따라서 음란한 아내인 고멜은 하나님을 따르지 아니하고 바알에게 그 몸을 바친 모든 이스라엘의 여자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음란한 자식이라고 말한 것에 대하여서도 그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여준다. 본문은 호세아의 자식들이 아버지를 모르는 자식임을 말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호세아에 의하여 태어났음을 암시하여 주고 있다. 그들도 역시 온 이스라엘이 바알 신전에서 행하여지는 성적 제의에 참여하여 하나님을 떠난 자들인 것이다.

 결국 호세아의 결혼은 하나님과의 계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바알을 섬기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배반을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스 라엘 땅 즉 온 나라가 야훼로부터 멀리 떠나 심히 행음하고 있음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그 남편으로 섬기는 자들이 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바알도 함께 섬기는 종교적 혼합주의에 빠져 음란한 행위를 하는 자들인 것이다.

 < 3절 > 2절 후반에 나타난 하나님의 결혼 명령에 대한 호세아의 순종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명령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언자는 그 명령의 내용이 무엇이 든지, 그가 그것을 원하는 것이든 혹은 그렇지 않든, 하나님의 명령에 순 종해야 한다. 이것이 예언자의 사명이다. 이 사명이 온전히 완성되어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선포되어지는 것이다 (요나의 불순종을 기억해 보라). 고멜과 디블라임이란 이름들은 호세아서 외에서는 발견되어지지 않는다. 고멜이란 아마도 [그말야후]의 짧은 형태로서 "야훼께서 우리 가족들을 완성시키셨다"라는 뜻을 의미한다 (Hans Wolff, Hosea, 16-17을 보라). 그러나 그러한 의미가 있다고 하여 이름의 상징적 가치를 찾 고자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다만 고멜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의 지를 호세아를 통하여 전할 수 있는 적합한 인물이라는 점이 고려되어져야 만 할 것이다.

 < 4절 > 야훼의 두번째 명령이 시작된다. 이 이름을 짓는 명령은 다음에 연속하여 나오는 두 가지의 명령과 같은 명령으로 나타나며 이 명령들은 야훼로부터 주어지는 예언자적 메시지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 은 이름을 지음 받은 이의 이름 지은 자에 대한 종속적 의미를 내포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그 피조물들의 이름을 짓는 일이나 아담이 동물 들의 이름을 짓는 것을 보라. 더욱이 본문에서와 같이 이름이 예언의 메 시지를 내포하고 있는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이름을 지은 하나님이 그 메 시지의 성취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구약에서 종종 발견된다. 이사야의 아이들의 이름이나 (사 7:3; 8:3-4) 임마누엘이라는 이름 등이 (사 7:14) 그런 경우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주어진 첫째 아들 이즈르엘이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다른 두 아이들의 이름과 같이 그 의미를 이 름의 뜻에서 살펴보면 "하나님이 씨앗을 뿌리신다"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 뜻은 풍요를 의미하는 긍정적인 면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4절 후반부와 5절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멸망과는 서로 반대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서 이 본문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적합하지 않다. 오히려 역사적인 사건이 발 생한 지역의 이름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이즈르엘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고원 지대 사이에 있는 비옥한 평지를 말하기도 하고 요단강에 이르는 나 르 얄루드 Nahr Jalud 계곡에 근접해 있는 고원 지대의 동편 가에 위치한 현재 제린 Zerin 으로 알려져 있는 도시일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이즈르 엘은 오므리 왕조에 의하여 사마리아 다음가는 왕의 도시로 세워졌다 (왕 상 18:45-46; 21:23). 여기에서 이세벨은 아합 왕을 위하여 나봇을 죽이 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았고 그에 대한 피의 대가로 이세벨이 죽게 되었고 오므리 왕조의 마지막 왕 요람은 예후에게 시해되었다 (왕상 21:17-26; 왕 하 9:17-37). 이로 인하여 오므리 왕조는 멸망하고 예후 왕조에게 그 왕 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은 이즈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는다는 다음 구절 과 관련을 맺는다. 그렇다면 예후가 요람 왕을 이즈르엘에서 죽인 것에 대한 대가를 예후의 집안의 멸망에서 찾는다는 말인가 한스 볼프가 말했 듯이 정치적인 남용에 대한 대가인가 우리는 신명기 사가의 역사 이해를 좀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명기 사가에 의하면 예후가 오므리 왕조를 멸망시킨 것은 단순히 그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기보 다는 바알을 섬기는 오므리 왕조를 멸망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근거한 다 (왕상 19:16-18; 왕하 10:17). 오므리 왕조의 멸망은 그가 단순히 나 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알과 같은 우 상을 숭배하였기 때문이었다 (왕상 21:25-26). 이렇게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도록 예후에게 그 왕권을 허락하였건만 그 왕조 또한 오므리 왕조와 다를 바 없었다. 처음 예후는 바알의 신당을 부수고 그 제사장들을 부수 어 하나님을 잘 섬기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 후 여호아하스의 시대를 거쳐 (왕하 13:1-2) 여로보암 2 세 시대에 이르러 바알을 섬기는 혼합주의는 오므리 왕조가 이즈르엘에서 멸망하였던 것과 같이 예후 왕조 가 멸망하는 길을 재촉하였던 것이다. 예후가 오므리 왕조를 이즈르엘에 서 멸망시켰던 것과 같이 같은 죄로 인하여 예후 왕조도 멸망하게 될 것이 라는 종교적 의미를 결코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2절 후반부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범죄와도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 5절 > "그 날에"라는 말은 본문에서 어떤 정확한 날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의미로서는 "앞으로 언젠가"라는 말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4절에서 언급한 "곧 (오드 므아트)"와 직접 관련이 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곧" 이르게 될 "이스라엘의 집" (5절에서는 같은 의미로 이스라엘이라고만 표현하고 있음)이 멸망할 날에 이스라엘의 화살을 이즈르엘에서 꺽어버리시겠다는 말이다. 즉 이스라엘의 모든군사적인 힘과 싸울 만한 능력을 야훼께서 직접 파괴하겠다는 뜻이다. 구약에서 화살은 일반적으로 군사적인 능력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언어로 사용되어졌다 (창 49:24; 삼하 1:18; 왕하 13:15-16 등등).

 여기에서 이즈르엘은 단순한 도시의 이름이라기보다는 역사적인 전쟁터를 의미하는 것 같다 (삿 4-5; 6-8장 등의 전쟁을 보라). 따라서 많은 이스 라엘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이곳에서 파괴된다는 것은 전쟁을 암시하고 마침내 나라가 멸망하게 된다. 이에 대한 역사적인 실현은 시리아-에브라임의 동맹 이후 시리아가 먼저 멸망하고 마침내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와의 전쟁에서 733년 나라가 멸망하고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지게 되는 사건에서 성취되어진다.

 6절:둘째 자녀를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은 좀더 구체적이고 강하게 나타난 다. 이즈르엘을 통하여서는 이스라엘의 왕조와 왕권에 대한 심판이 나오 지만 이제는 이스라엘의 온 집, 즉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심판이 선포되어 진다. 딸의 이름 [로루하마]는 부정적 개념을 가진 이름이다. 동사 [루하마]는 히브리어 푸알형 (Pual)으로 어려운 지경에 빠진 자녀에 대한 부모의 사랑과 자비를 의미하는 말로 그 어근은 어머니의 모태에서 출발한다. 이 말이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성의 문제로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자비로 이해되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부정을 나타내는 [로] 가 첨가되어 이 이름을 그대로 번역하면 "그녀는 자비를 찾을 수 없다"이지만 어떤 특정한 인물을 가리키는 보다는 일반적으로 "자비가 없다"라는 말로 번역되어진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비를 더 이상 기대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야훼는 더 이상 이스라엘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아니 앞으로 당분간 이스라엘의 왕조가 끊어지고 나라가 멸망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자비가 아직도 기대되어지지만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자비를 그들은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까지 주어지던 하나님의 자비조차도 이제는 야훼가 빼앗아 갈 것이다. 심판의 수위가 높아진 것이다.

 < 7절 > 문제는 현재 마지막 형태에서의 유다의 구원 사건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라는 점이다. 만약에 5절과의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면 유다의 구원의 사건은 이스라엘의 멸망과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 다. 즉 기원전 722년 앗시리아에 의한 이스라엘의 멸망에서부터 유다는 파괴되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호세아의 언어를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 (2:20을 보라). 전쟁을 상징하는 활이나 창과 같은 무기에 의하여서도 아니고 말 이나 마병들과 같은 전사들에 의하여서도 아니다. 즉 인간의 어떤 무기나 능력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야훼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기에 그들은 그 런 전쟁 가운데서도 구원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사야의 예언을 기억한다. 그는 당시 유다의 왕 아하스에게 앗시리아에게 서도 혹은 시리아-에브라임 동맹군에 의하여서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의 지하고 그의 구원을 기다리라고 하였다. 동시에 하나님에 의한 유다의 구 원은 살아남은 유다로 하여금 그들의 능력이나 지혜로 유다가 살아남은 것 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임을 깨닫게 함인 것이다.

 < 8절 > 여기에서는 아이의 태어남에 대한 전형적인 문구를 사용하고 있다. 다만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가 태어나는 때에는 기간의 명시가 없는 반면 둘째 와 셋째 사이에는 둘째 아이가 젖을 뗄 때란 기간이 명시되어 있다. 이스 라엘을 포함한 고대 근동에서는 젖을 뗄 때가 약 3살 때의 경으로 보고 있 다. 이 때가 바로 어머니의 절대적 보호가 없이도 떨어져 살 수 있는 나 이인 것이다 (삼상 1:23). 왜 호세아가 이 기간을 명시하고 있을까 그 것은 셋째 아이가 갖는 심판의 의미와 관련이 있다. 즉 야훼께서는 내 백 성이 아니라고 선언을 하기 전 그래도 이 기간 동안 기다리고 있었음을 말 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인내심은 최후의 심판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 아닐까

< 9절 > 셋째 아이의 이름 역시 둘째 아이와 같이 [로암미]라는 부정적인 이름을 가진다. 그 뜻은 "나의 백성이 아니다"이다. 그 이름을 짓게 되 는 이유는 너희는 나의 백성이 아니며 그리고 나는 너희의 것 (너희의 야 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논의해야 할 단어는 "너희의 것"이라고 번역한 [예흐예]이다. 이것은 출 3;14에서 모세에게 계시하신 하나 님의 이름 "나는 곧 나다" ([예흐예 아쉐르 예흐예])와 동일하다. 그리고 출애굽기 본문에서는 곧 [야훼]로 연결되어 말해진다. 이는 곧 야훼와 동일한 의미의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1인칭의 표현 "나다"인 것이다. 또한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며 나는 너희 야훼가 아니다"라는 문구는 시내산 계약에서 종종 발견되는 문구이다 (출 6:7; 레26:12). 시내산 계약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지키면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바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호세아는 이러한 시내산 계약 전승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 종교를 섬김으로 그 계약이 깨어졌기에 더 이상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가족적 관계가 깨어진 것이다. 이러한 관계 단절은 이스라엘에게는 심판이요 최후의 파멸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어지고 계약을 맺어 생겨난 백성인데 이제 그 관계가 깨어진 것은 더 이상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하나님의 자비가 사라진 것만이 아니라 이제는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남편과 아내가 이혼한 것과 같은 상태인 것이다.6. 메시지 1:2-9은 무엇보다도 상징적으로 호세아의 결혼과 자녀들의 이름을 통하여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한 말씀을 전달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편적인 바알적 종교 행위에 연루된 그의 아내 고멜을 맞아 들였다. 고멜은 당시 하나님 과의 계약적인 법을 떠나 바알에게 예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형적 형 태이다. 그들은 야훼 하나님과 바알을 동시에 섬기고 남편 된 하나님을 두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남편으로 맞아들이는 종교적 간음 행위를 서 슴지 않고 행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계약의 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었기에 호세아를 통하여 그들의 행위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신 것 이다. 왕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풍요로운 생산을 이스라엘을 애 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로부터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싫어 하시는 우상 바알에게서 그들의 삶의 풍요를 얻고자 하였고 도움을 구하였 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그들의 조상이 맺었던 시내산 계약의 율법을 어기 었던 것이다.

 율법을 어긴 후에 발생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심판이다. 하나님 은 호세아의 아이들의 이름들을 통하여 심판의 정도를 단계적으로 높여 가 고 있다. 우상 숭배를 주도한 예후 왕조의 이즈르엘에서의 파멸에서 시작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자비를 거두심 (로루하마), 그리고 마침내는 계약 파기의 선언과 더 이상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지 않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엄청난 파멸의 심판의 선포인 것 이다. 그러나 호세아의 메시지가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심 판의 선포 이후 회복과 구원의 선포가 곧 이어 나타난다. 즉 이즈르엘에 서의 나라의 회복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넘치고 다시 계약이 성립되는 되는 복음이 연결되어 있다 (1:10-2:1).

 따라서 1:2-9은 이스라엘의 죄악과 심판을 이야기함으로 그들이 왜 다시 창조되어지고 회복되어져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은 따라서 호세아서 전체의 서론적인 역할을 한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한스 볼프가 지적한 바와 같이 신약에서의 그리스도의 사건과 연결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결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이 단순히 사랑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죄인들과 함께 죄인으로 법에 의하여 심판을 받았다는 점과 함께 심판과 사랑의 개념이 관련되어 있다는 말이다. 우리의 심판이 사랑한다는 말로 해결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가지 더 우리가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호세아의 역할이다. 사실 상 호세아 자신이 어떤 상징적 의미를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호세아 는 이스라엘의 죄악과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있어서 그가 그 명령을 순종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는 반면 그는 하나님의 명령이 무엇이었든지 그의 순종의 행위를 통하여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하나님의 명령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의 뜻에 따라 그 명령을 판단하여 실행하기도 하고 혹은 거절하기도 한다 (요나의 이야기를 참조하라). 종교적 부패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일까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다른 주인을 섬기는 종교적 혼합주의가 우리의 시대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 가 섬기는 우상은 과연 무엇일까 오직 하나님께 의지하지 못하고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경우는 어떤 것들일까 이러한 상황에서 예언자적인 사명 과 역할은 무엇일까 예언자의 하나님의 말씀에의 순종의 삶은 때로 하나 님의 메시지를 동반한다. 예언자가 전하는 것은 다만 말씀으로만은 아니 다. 그의 행위가 하나님의 말씀을 동반한다는 말이다. 말씀과 행위의 조 화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예언자적 사명을 가진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부 패하여 있는 교회를 향하여 같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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