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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사 61:1-3;요 04:4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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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들은 여러가지 모양의 곤고하고 슬픈일들이나, 참으로 감당키 어려운 비극적인 일들을 당하게 됩니다. 이같은 일들은 부자이든지 가난한 사람이든지, 남자이든지 여자이든지, 배운사람이든지 배우지 못한 사람이든지, 신자이든지 비신자이든지 ,서양사람이든지 동양사람이든지, 누구든지 간에 모두가 당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람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이같은 일들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또한 분명한 사실은 이같은 재난들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하기 그지없는 존재들이란 사실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인생이란 고통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생명이 시작된 처음 9개월 동안은 따스라고 안온한 어머니의 태 안에서 있다가 갑자기 어린 아리로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첫번째 행동이 울음으로 시작됩니다. 이것은 인생이란 고통과 슬픔을 동반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울믐으로 태어난 어린 생명은 잠시동안 어머니에 의해서 돌봄을 받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자라나고 세월이 지나면서 그를 바쳐 주었던 버팀목은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더이상 어머니에게만 의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는 스스로 먹고 입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면 생활비를 벌어야합니다. 살아가다보면 자기가 계획한데로 뜻대로 되지 않는 실패를 경험하게 되기도 합니다. 숱한 낭패도 당하게 될 것이고, 의지했던 물질이나 사람들도 자기 곁을 사정없이 떠나게 되는 마음아픈 고통도 당하게 될 것이고, 각자지의 고통과 질병이 있는 것이고, 결쿡 자기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죽음이 닥쳐올 것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도 죽음을 맞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목숨을 이겨 낼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아침에 설교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우울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우울한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단지 우리들의 현실을 이야기 할 뿐이며, 오히려 제가 이런식으로 설교를 시작하는 것은 그러한 사건들이 우리들에게 닥쳐올 때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대처하고 극복할 것인가를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오늘 아침에 읽은 본문 요4:46-54 의 이야기는 슬픔과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절망가운데서 어떻게 기쁨과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희망으로 가득찬 밝고 환한 이야기 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부귀영화를 누리기에 충분한 지체높은 왕의 신하의 이야기 입니다. 그의 아들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고, 그는 절망속에서 그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이야기의 결론은 아들의 치료는 물론이고, 그 가족 전체가 목수의 아들 예수를 구주(그리스도)로 믿는 순전한 믿음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병든 자식을 가진 무모가 있다면 그것도 살 소망이 없는 거의 죽게된 병든 자식을 가진 부모들이 있다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왕의 신하인 그분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 할 가 있을 것입니다. 병든자식을 가진 그 가정이 얼마나 우울하고, 절망적인 분위기였겠는가를 우리는 충분히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정에 롤아눈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아들의 병이 치유되었습니다. 슬픔이 기쁨으로, 절망이 희망으로,어두움이 밝음으로 가득차게 되고, 믿음의 부요한 축복을 얻은 놀라운 일을 가능케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왕의 신하가 자기 자신이 직면한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예수께 나아간 일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서 예수님께 나아가 절망적인 상태의 변화를 얻으려는 믿음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46절-47절의 말씀,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되었음이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것은 왕의 신하이면 부귀영화를 누리기에 충분한 분이머 그에게는 재산도 많았을 것입니다. 병든 아들고치기 위해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을 것이고 용하다는 의사들에게 가서 진찰을 받고 치료를 받았을 것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것, 최선을 다해 아들의 병을 고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의 병은 치료가 없었습니다. 거의 죽게 된 지경에까지 왔습니다. 그때 이 병든 아들의 아버지는 빈손으로, 두손들고 예수께 나아왔습니다."주님! 내 아들이 병들었습니다. 거의 죽게되었습니다. 우리 집에 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텨 주소서"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이 아버지의 믿음을 우리는 찾아야 합니다. 그는 더이상 그가 가지고 는 물질이나 권세를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궁정놀음자리에서 내려와서 예수님을 만나서 자기 아들을 고쳐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 거의 100리나 되는 길(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25mile, 40km)을 달려온 것입니다. 오로지 그는 예수님께 희망을 건 것입니다. 이 믿음이 그의 아들을 살렸습니다. 놀아운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예수님을 찾아간 그 믿음이 놀랍고 능력을 나타나게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라"(시50:15)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에게도 이같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곤고한 일을 당할 때,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 도무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절망가운데 빠졌을때,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요청됩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이기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들의 상황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쉽게하는 불평이나, 원망이나, 근심과 걱정은 결코 우리의 암담하고 절망적인 상황을 희망으로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고, 그분의 능력의 손을 붙드는 믿음만이 우리의 어려운 상황을 변화기키고 극복할 수 있는 놀라운 힘이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왕의 믿음이 처음부터 온전한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왕의 신하가 가지고 있는 이 믿음이 약간의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48절에서 이 사람의 믿음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아마 이 말씀은 왕의 신하가 자기 아들이 누워 있는 가버나움 자기 집에 내려와서 고쳐 달라는 간청때문에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한 장소에 국한을 지키는 것이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기 아들에게 손을 대야만 나을 것이라고 한가지 방법으로만 생각한 것입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게서 아들의 병을 고쳐 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그러나 고치는 방법을 어느 한 장소에 고정을 시키고 또한 몸에 손을 대는 안수하는 한 방법에 의존한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에게서 이같은 모습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적적인 현상이라든지 표적을 꼭 보아야만 보고서 믿으려고 하고, 예배를 드려도 꼭 자기 집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고집을 하고, 꼭 안수기도를 해야만 환자가 낳는다고 생각하여 안수기도를 받기를 고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특별한 치유은사를 받은 목사나 권에게 가서 기도를 받아야 병이 낳는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은사집회가 있는 기도원이나,특정장소에 가야만 병이 낳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예수님의 책망의 말에 마음이 상하거나, 자기 생각이 옳다고 고집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분이 상해서 그냥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끝까지 예수님 앞에 서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서 자신을 낮추어 예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 방법에 순종하고, 응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슬픔과 절망을 기쁨과 희망으로 바꾸는 놀라운 믿음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어떠한 방식으로 행하시든지 예수님 자신의 방법으로 작용하시도록 충분히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왕의 신하의 믿음은 보지 않고도 믿은 믿음입니다. 처음에 이 사람도"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않는자"라고 책망을 받았으나, 나중에 이 사람은 보지 않고도 믿은 사람입니다. 49절에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전에 내려오소서" 50절에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하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 갔습니다. 그는 끝까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자기 집에 꼭 오셔야만 아들의 병이 낳는다고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기 아들의 몸에 안수해야만 아들의 병이 낳는다고 고집하고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실려고 끝까지 고집하지 않았습니다.그는 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을 뿐입니다.잘믿고 집으로 갔습니다. 그가 집으로 가는 동중에 종들로부터 아들이 살았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할렐루야! 그가 집에 도착했을 때 그의 아들이 치료된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셨던 그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그 사람이 처음에 약한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강한 믿음으로 큰 믿음으로 성장한 것은 올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강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큰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큰 믿음을 이야기 할때 백부장의 믿음을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8장-13절 사이에 보면, 한 백부장의 종이 병들었습니다. 종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백부장이 예수께 나아 갑니다. 딱한 사정을 이갸 했을 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슴을 들은 백부장은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종이 낫겠나이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믿음을 칭찬히시면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이같은 것이 큰 믿음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백부장의 믿음과 왕의 신하의 믿음이 동등한 큰 믿음인 것을 발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큰 믿음이 병든 아들을 살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온 집안 식구들은 믿음을 갖게하고, 가정을 구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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