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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 믿음 거짓 믿음 (약 02: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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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일마다 야고보서를 계속 읽어 내려가면서 야고보서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중심은 야고보서 2장 26절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했습니다.

신앙 생활하는 우리에게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누구나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더구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그 자체가 믿음의 삶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 14장 23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모든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믿음이 이렇게까지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말씀에서 14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한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면 그 몸에 쓸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죽은 믿음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참 믿음은 우리 생활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합니까 지난 시간에 성도의 인간관계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교회에서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거나 등한히 해서는 안된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참 믿음의 증거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어야 한다고 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은 사랑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주신 십계명의 요약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십계명도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첫째 계명부터 넷째 계명 까지는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하라 한 것이고 다섯째 계명부터 열째까지는 이웃을 이렇게 사랑하라고 한 것입니다.

주님이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율법사는 “이웃이 누굽니까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이 질문에 대답하시기 위해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우리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바로 우리의 이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그리스도의 삶은 우리의 믿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야고보 기자는 그 믿음이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를 말하면서 우리 주위에 헐벗고 굶주린 형제나 어려움을 당한 사람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야 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15절 뭐랬어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위에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어서 성령이 그 사람을 도우라고 감동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돕지 아니하면 이런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믿는 형제 자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먼저 주 안에서 형제 자매된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갖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참 믿음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0절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4절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죄인이던 우리,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죄사함 받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 증거는 형제를 사랑하는데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주의 보혈로 구원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순간에 우리와 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 형제를 향한 사랑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권속의 일원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7,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 말씀을 들으면서 어려운 형편에 처한 형제와 자매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태도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사명은 선교입니다. 바울은 전도하는 일에 미쳤던 사람입니다. 그는 전 생애를 복음 증거하는 일에 투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에 전도하는 일 외에 늘 부담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2장 10절에 보세요.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했습니다.

여기 사도 바울의 아름다운 믿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참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인생의 참된 가치관 삶의 변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이런 변화가 하루아침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이 날로 변화해 갑니다. 이 변화의 증거가 무엇이냐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행입니다.

이 선행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8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 자세히 보세요. 바울은 우리의 행위와는 아무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값없이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처럼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보답할까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선행입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물론 선행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하면 반드시 선행이 있어야 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선행은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그리스도인 각자의 의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20절에 보세요.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 인줄 알고자 하느냐” 26절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귀신의 믿음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아니, 귀신에게도 믿음이 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에는 귀신들도 믿음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19절을 보세요.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했습니다. 마가복음 3장 11절에 보면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말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귀신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귀신은 죽음 후의 세계를 믿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8장 31절에 귀신이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했습니다. 무저갱은 지옥입니다. 귀신은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믿을 뿐만 아니라 지옥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귀신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아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예수님은 인간을 죄에서 구속하시기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에는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모르고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만이 믿음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 가운데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단지 알기만 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이 바로 귀신의 믿음인 것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는 것이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믿음은 구원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이런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죽은 믿음입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귀신은 하나님께 대해서 알뿐만 아니라 감정의 표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떨었다”는 말은 감정의 표현 아닙니까. 귀신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알고 믿었고 또한 떨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했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라”고 했습니다. 이 점에서 귀신은 하나님을 잘 이해하지 못하며 경건한 삶의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귀신에게 결정적인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결단입니다. 참 믿음은 항상 전인적인 것입니다. 전인격적인 신앙입니다. 지식만의 신앙도 아닙니다. 감정만의 믿음도 아닙니다. 지식과 감정,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의지가 포함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신뢰하게 하는 것, 그것이 의지입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이 지식과 감정에 머무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믿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의지의 결단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구세주인 것을 알았으면 이제 그분을 우리의 구주와 주님으로 모셔들이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의 주님을 신뢰하며 의지하는 의지의 결단이 꼭 필요합니다.

아마 이런 이야기를 들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줄타기 선수 불론딘(Blondine)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나이아가라 폭포 위에 줄을 매고 건너가는 묘기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미국 쪽과 캐나다 쪽에 줄을 매고 양쪽에 고성능 확성기를 설치하고 구름 떼처럼 모여든 구경꾼들에게 불론딘이 방송을 했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 편에서 저편으로 이 장대 하나만 들고 이 줄을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 위를 건너가려고 합니다. 제가 건너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그러자 많은 사람들은 “네, 믿습니다.”라고 대답하여 불론딘에게 힘을 안겨 주었습니다. 불론딘은 장대를 들고 균형을 맞춰 가며 줄을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 위를 건너갑니다. 몸이 이쪽으로 기울어지면 관중들은 다 저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손에 땀을 쥐며 지켜보았습니다. 그는 정말 건너갔습니다. 관중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치며 환영했습니다.

불론딘은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여러분 제게 조그만 수레가 있는데 이 수레를 몸에 걸고 저 미국 편으로 건너가려 합니다. 그럴수 있다고 믿습니까” 그때 많은 사람이 “아무럼요, 믿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드디어 가는 수레를 몸에 걸고 장대를 들고 균형을 잡으며 아슬아슬하게 건너왔습니다. 그 순간 관중들은 조린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가 불론딘이 건너오자. 하나같이 숨을 내쉬었습니다.

이번에는 엄청난 질문을 했습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성원 속에서 제가 두 번이나 건너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제 등에 있는 수레에 한 사람을 싣고 건너가려 합니다. 제가 성공적으로 건너리라고 믿습니까” 그러자 그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서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네, 믿습니다.” 그때 불론딘은 군중 가운데 한 사람(용감하게 보이는)에게 “자, 타십시오” 했더니 이 청년은 믿는다고 대답은 했는데도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도망을 했다고 합니다.

정말 믿는다면 믿음의 대상에게 온전히 의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구원의 주님이심을 믿고 신뢰하는 믿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런데 분명히 들으세요. 지식이나 감정만으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의지의 결단이 없는 지식만의 믿음, 감정만의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고 거짓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참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참 믿음은 움직이는 믿음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 참 믿음이란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고 하면서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의 이야기를 합니다. 21절을 보세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했습니다. 이 구절은 오랫동안 논쟁이 되어 왔습니다. 사실 야고보서하고 논쟁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야고보서를 읽다가 “이 신은 지푸라기 같은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칼뱅은 “루터는 성경을 끝까지 다 읽지 않고 말했다”고 평했습니다.

야고보서가 특별히 강조한 점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의 사건을 바울은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15장 6절과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분명히 아들을 주시겠다고 했는데 그 아들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천막 밖으로 데리고 나와서 “아브라함아.” “네, 하나님.” “저 하늘의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 질 것이다.”고 말씀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아브라함은 믿었고, 하나님은 이 믿음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의롭다” 칭찬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그 사건과 같은 사건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읽어보면 장소와 환경이 다른 경우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창세기 22장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제물로 바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야고보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실이 온전하게 드러난 사건은 바로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을 바칠 때입니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의도를 아브라함은 잘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성실하신 하나님을 믿어습니다. 이때 이 믿음은 그의 행함을 통해서 온전히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대립적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입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믿음이 뿌리라면 믿음의 뿌리에서 행함이란 열매가 있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23절에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서 의롭다 여김을 받은 사실이 이에 비로소 응하여진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까지 얻게 된 것입니다. 24절에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이 행함으로 온전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참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반드시 행함이 있습니다. 라합이 염탐꾼을 영접한 것도 일종의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그녀의 믿음 때문에 용기 있는 행위가 가능할 수가 있었습니다. 라합은 지금까지 하나님에 관해서 들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생겼고 그는 행동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한 행동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라합의 예는 믿음과 행함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참 믿음의 뿌리에서 행함의 열매가 맺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더구나 야고보서 기자가 믿음을 말하면서 아브라함과 라합을 선택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아브라함은 남자요, 유대인이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라합은 여자요, 이방인이요, 타락한 삶을 사는 기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똑같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들으세요. 행함은 믿음의 열매입니다. 마태복음 7장 20절에 예수님은 열매로 나무를 안다고 했습니다. 참인지 거짓인지 그 열매를 보면 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은 이미 믿음을 지신 성도들에게 행함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우쳐 주기 위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영접하고 신뢰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것이면 오늘 주신 말씀 마지막 절에 “아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이 말씀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우리에게 참 믿음, 행함이 따르는 믿음, 큰 믿음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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