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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 믿음 (약 02:21-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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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행위가 약하다는 말을 오래 전부터 들어왔다.

기독교인이라고 약속을 틀림없이 지키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들끼리 도 서로를 믿지 않는다. 자기가 장로네 집사네 하고 내세우는 사람들 치고 상식 이하의 사람들이 특히 많다고 한다. 믿음 좋은 사람들, 특 별히 평상시에 "할렐루야아멘" "주여"소리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믿 을 수 없다고 한다.

 어떤 분은 법정에서 상대편 변호사가 교회 장로임을 보고 안심했다.

바로 말할줄 알았다. 그러나 완전히 거짓말을 태연히 하는 것을 보고 는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나중에 그에게 물었다. "그렇게 거짓말을 하고도 두렵지 않소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의 대답은 놀라왔다.

"그래도 나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천당 갑니다." 즉 선행이 아니라 믿 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다는 것은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보증서란 말인 가 장로라고 하니 일 주의 몇번씩 교회에 나가고 대표기도도 자주할 것이다. 그러면서 세상의 법정에서 거짓말을 하고 약한 사람에게 엄청 난 손해를 준다. 그리고는 그리스도는 은혜의 주시니까 다 용서해주신 다고 자위하는 것이다.이렇게 된다면 그가 예수를 사실상 믿는지조차 의심스러운 것이다.

 예수는 그렇게 편한대로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우선 자신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에게 바친다. 그래서 그의 종이 된다.그래서 그를 향해서 "주여"하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주인의 뜻에 전혀 반 대되는 행동을 하면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주로 부른단 말인가 그렇게 자기 주인을 모욕하면서 살 수 있는가이것은 신앙에 대한 완전한 오 해를 한 것이다.

 신앙은 언제나 전능의 주권자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한다. 이 하나 님은 절대로 악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어느 정도냐하면 속으로 생각하 는 악도 그대로 두지 않으신다. 인간은 간음도 살인도 도둑질도 안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에서 그런 생각이 마구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순백의 처녀니 고결한 선비니 하지만 마음 속을 드려다보면 부 끄럽기 짝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마음까지 모두가 깨끗한 사람만 용납하신다. 하지만 인간은 근본이 잘못되어 절대로 마음 속까지 깨끗할 수 없다. 거룩한 사람에 대한 기대는 단지 이상일뿐 하나님이 볼 때 타락한 인간은 가능성이 전혀 없다. 수도하고 금욕한다고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 아예 거룩한 척도 말고 자신이 스스로 사랑의 사람인척도 말아야 한다. 차라리 그 래야 위선이 덜해진다.

 예수를 진실로 믿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간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고 믿음으로 복을 받는다. 그러나 생각해 보 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그저 쉽게 먹기로 천당에 들어가는 것인 가 그렇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무서운 하나님 앞에 서 용납받고는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향해서 순례의 길을 걷는 것이 신자의 삶이다.

 택하사 자녀로 삼은 것은 우리가 사랑 안에서 자라나서 하나님 앞에 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엡 1:4) 다른 말로 하면 신자는 "그리스도의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은 자"인 것이 다. 또한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 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지옥에 떨어진다 (계 21:8).

 그리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계속 이런 상태에 있다면 그 양심은 화인 을 받아 더 이상 치료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서 현저히 모욕했으나 이제는 무서운 심판만을 기다릴뿐이라고 한다(히 6:6) 물론 신자들도 죄를 짓고 양심에 가책을 받아 고통하며 회개한다. 하지만 엄청난 죄를 계속 지으면서 전혀 변할 생각이 없는 이들을 지적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서 자녀로 삼으신 다음에는 세상 사람 들보다 더 엄격하게 의롭게 살라고 명령하시는가 물론 그렇다 그러면 아무 재미도 없게 살게 하시는가 그건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하나 님은 자녀들을 세상 사람들처럼 그렇게 무능한 상태에서 선을 행하라 고 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하는 것은 대단한 기쁨과 신나는 삶을 경험케 한다.

 한 중풍병자가 예수 앞에 왔다. 그가 똑바로 걷기를 기대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에게 의롭고 거룩하게 살라는 것도 마 찬가지이다. 마치 중풍병자에게 똑바로 우아하게 패션 모델처럼 걸으 라는 명령을 하는 것과 같다. 중풍병자가 멋지게 걷고 뛰고 재주를 부 리려면 우선 근본적으로 몸의 병이 나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영혼의 치료를 받아야 한다.

 예수는 중풍병자의 영혼을 치료한다. 죄를 사한 것이다. 그리고는 그 에게 명령한다. "일어나서 당신을 실어온 그 침대를 지고 가시오." 영 혼이 치료 되었는지도 몰라도 겉모습은 아직도 중풍으로 오그라지고 힘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병자는 그 말에 순종했다.그러면서 깨닫 는다.치료와 건강의 능력이 주어졌음을 그것은 말씀에 복종하고 일어 날 때 경험된 것이다.

 신자들은 예수에 의해서 영혼이 치료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겉모습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 예수 믿는다고 힘이 마구 느껴지거나 돈이 더 생 기거나 하는 일마다 형통하거나 안할 수도 있다. 전과 모든 것이 똑같 다. 그러나 영의 세계에서는 엄청난 변확 온 것이다. 마치 중풍병자의 외모가 여전히 일그러져서 침대에 누워있어도 영의 세계에서는 완전한 회복이 온 것과 같다.

 그러기에 예수는 중풍병자에게 일어나라고 명했다.뿐만 아니라 자기 를 실어온 침대를 메고 가라고 했다. 이것은 무서운 변화를 말한다.

그리고 신나는 변화이다.그에게 필요한 것은 상이나 칭찬이 아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온전한 삶이다. 그리고 그 삶은 말할 수 없는 기 쁨과 보람을 준다. 그리스도가 주려는 것이 이것이다. 또한 신자가 얻 어야 할 것이 이것이다.

 웨슬리는 사람들을 네 부류로 나누었다. 자연인,율법적인 신자, 거듭 난 신자, 사랑으로 충만한 신자이다.자연인은 보통사람을 말한다. 율 법적인 신자는 복받으려고 선행하는 이들이다. 벌이 무서워서 그러기 도 한다. 여하간에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함으로 그 댓가를 기대하고 있 따면 율법적인 신자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도 이 부류에 속한다. 도 덕적으로 훌륭하다.

 거듭난 사람들은 죄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영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겉보기에는 아무 것도 다르지 않지만 영적으로는 새로 태어난 것이다.

이들은 그리스도가 하신 일들을 자기 것으로 삼고 순전히 그의 힘으로 만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이다. 물론 거듭난 이들도 율법적인 사고에 사로 잡힐 수 있다. 또한 이 단계에 있어도 율법적인 사람들보다 선 행이 약할수도 있다.

 마지막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 신자들의 목표이다. 이 사람은 그리 스도의 사랑이 그안에 있어서 그 자체로도 큰 기쁨이 된다. 그리고 더 큰 기쁨은 이 사랑이 점점 커진다는 점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 인가자기 속에 그리스도를 믿고 움직임으로 된다.중풍병자가 은혜를 받고 아직 펴지지 않은 팔다리를 펴고 일어나서 침대를 메고 달려나가 는 것과 같다.

 사랑이 충만한 사람은 늘 선행을 하려한다. 율법적인 사람도 늘 선행 을 하려고 한다.거듭난 사람은 이쪽에 속하다가 저쪽에 속하다가 한 다. 두 선행의 차이는 무엇인가선행이니까 같은 것인가그렇지 않다.

출발점이 서로 다르다. 율법적인 사고는 자기 힘으로 시작한다. 그래 서 하나님의 복을 기대한다. 그러니 마치 중풍병자가 모델처럼 걸으려 는 것처럼 힘들다.

 반면에 사랑의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을 안다.그리고 하 나님의 힘이 자기 속에 있음을 믿음으로 안다. 그래서 그 힘을 사용하 기 위해 사랑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은 너무도 큰 기쁨을 준다. 한 님의 복은 그 사람 속에서 더욱 확실하게 느껴지면서 사랑으로 성장한 다. 그래서 더욱 더 선행에 열심낸다. 그러면 하나님은 강한자에게 더 능력을 더하시다.

 물론 이 삶이 그렇게 쉽게만 되는 것은 아니다.사랑의 사람이라고 고 정되어 있지 않기에 그 속에 여전히 율법적인 요소가 남아있다. 그리 고 차츰 이 요소를 줄여감녀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그러기 위 해서 신자는 부단히 기도한다. 그리고 연약한 자신을 보면서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힘을 의지한다. 그렇게 해서 그의 힘으로 사는 훈련을 하 는 것이다.

 나는 대학 3학년 여름방학 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거듭난 사람 이 되었다. 그전까지는 교회에 출석해도 그냥 율법적인 사람이엇다.

그리고 가끔 자연적인 사람이었다.술도 마시고 싸움도 하고 잘났다고 자랑도 했다. 그러나 다시 태어난 뒤에 나는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 다. 그러나 그럴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우울한 마음,나쁜습관을 고 칠 힘이 없다고 느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실력이 없다는 점이다. 대학 2학년 반을 완전히 놀 았으니 학과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래서 늘 컨닝을 했다. 또한 당시 모든 대학생들이 시험 때는 컨닝을 했따. 나는 난감했다. 거듭난 사람 이 컨닝할 수는 없었다.그러나 그러지 않고는 절대로 따라갈 실력도 없었다. 교실에서 나는 교수의 강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이 장면은 악몽이다.

 시험 두달 전부터 나는 도서관에 틀어박혔다. 대학생활과 군대생활 무려 6년만에 하는 공부였다. 힘들었다.나는 기도하며 공부하고 공부 하며 기도했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또한 전도하는데 비난 듣지 않으려고 열심이었다. 그리고 시험을 맞이했다. 별로 잘쓰 지는 못했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우리 반에서 나 혼자만 맨 앞자리 에서 컨닝 안하고 쓴 것이다.

 새학기가 시작될 때 나는 하과장 교수에게 불려들어갔다. 화공과 전 학년에서 5등이었다. 너무 기대치 않은 결과에 교수들이 놀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물론 학생 전체들도 내가 변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경험은 그 이후의 나의 삶에 크나큰 용기를 주었다. 하나님과 하면 된 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후에도 율법적인 단계에 많이 떨어졌지만 나 의 믿음은 성장해 나갔다.

 하나님과 함께 행동한 결과는 큰 것이었다. 나는 실질적으로 실력이 향상되었다.그리고 그만큼 큰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도 그만큼 더 많 이 경험했다.무엇보다도 큰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주시 는 평안과 기쁨이었다. 내 속에 말할 수 없는 큰 복 하나님이 확실히 계시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였다. 이 보다 더 큰 상도 없었고 이 보 다 더한 복도 없었다.

 중풍병자는 일어날 수 없을 때 일어났다. 나 자신도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하나님이 하셨기 때문이다. 거듭난 사람은 선행할 힘이 주어진 다. 그럴 마음도 주어진다. 단지 용기를 내어 한 발자욱만 디디면 되 는 것이다. 중풍병자가 일어나지 않고 계속 앉아 있었다면 그는 나머 지의 삶을 변함없이 살았을 것이다. 펴고 일어나자 그는 침상을 메고 달릴 수도 있었다.

 그리스도는 모든 복과 함께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신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우리 속에서 충만해진다. 그처럼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처럼기도 하라 그처럼 사랑하라.지배하라. 그의 모든 복으로 충만하라. 하나님 처럼 행복하라.

 한마디 사랑의 말을 던지자. '내가 잘못했습니다.용서하세요사랑 합니다."그리고 자기에게 말하라. "내가 조금만 양보하자."그리스도처 럼 사랑하자."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사랑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랑의 사람만이 경험하는 놀라운 삶을 맛본다. 산 믿음은 절 대로 행동한다.행동은 모두가 믿음이 아니다. 그러나 믿음은 반드시 행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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