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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동하는 믿음 (약 02: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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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수수께끼는 아니고 그저 질문을 하나 낼테니까 여러분 한번 속으로 대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 네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좋은 사람부터 순서를 메겨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사람은 교회에는 안다니는데 사람은 참으로 착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정직하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입니다.

 둘째 사람은 교회에도 안다니고 사람도 형편이 없습니다. 사기를 치고 싸움박질이나 하고 친구를 속여먹고 힘없는 사람에겐 달려들고 돈 많은 친구를 따라다니고 하는 사람입니다.

 셋째 사람은 교회에는 잘 다닙니다. 그런데 그 사람도 행실이 아주 나쁩니다. 자기 자랑이나 하고 잘난체하고 남을 얕보고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고 남의 입장은 도무지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옆에 어려운 사람이 있거나 말거나 자기만 행복하면 그 뿐인 사람입니다.

 넷째 사람은 교회에는 물론 다니거니와 정말 겸손하고 이웃에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성심껏 도와주고 어떤 일이 있어도 바르지 않는 일이면 하지 않고 거짖말을 하지 않으며 참으로 자기가 믿는 그 하나님의 영광이 되도록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대답의 반은 쉽고 반은 어려울 것입니다.

 첫째로 좋은 사람은 교회에도 다니고 선한 사람입니다.그리고 최고로 나쁜 사람은 교회에도 안다니고 악하게 노는 사람입니다.그런데 모호한 것이 교회에는 다니면서 나쁜 사람과 교회에는 안 다니나 좋은 사람입니다.

 누구가 더 좋은 사람입니까사람은 나쁘지만 그래도 하나님앞에 나오는 사람이 좋겠다고 생각이 들기도 하고 비록 교회에는 안나오지만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교회에 안나오면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인데 부족하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듭니다.참으로 등수를 메기기 힘든 경우입니다.저는 누가 더 옳은지 이야기하기 전에 오늘 성경말씀을 하신 야고보선생님에게 한번 물어 보겠습니다.

 야고보선생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읍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읍니까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 야고보선생님의 대답에 의거해서 여러분이 조용히 이 문제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어떻게 가지라고 하시는지를 말입니다.

 10월이 되었습니다.

10월은 우리 개신교에 있어서는 유명한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달입니다.

종교개혁을 이루었던 개혁자들은 신앙은 오직 믿음, 오직 성서, 오직 하나님의 은총, 오직 하나님의 영광, 오직 그리스도라는 다섯가지 "오직"의 명제를 남겼고 교회에 관해서는 라틴어로 Semper Reformanda, 즉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고인 물이 썩듯이 개혁되지 않는 교회는 부패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남겼으리라 생각합니다. 종교개혁의 정신이 이렇게 여러가지 구호로 설명되지만 가장 강력하게 인상지워진 명제는 역시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라는 구원론일 것입니다.

 저는 요즈음 여러분들로부터 우리 개신교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란 이 교리를 강조해 왔는데 이것을 너무 강조하다보니까 믿음만 있고 행위는 전혀 없는 아주 수동적이고 의존적이고 기형적이기까지 한 그런 신앙행태를 낳지 않았느냐 하는 질문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이 질문은 어느정도 습관성에 빠진 우리 신앙을 점검하고 오늘에 요구되고 있는 신앙의 실천을 적극적으로 생각하고자 하는 그야말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란 명제에 따른 신앙에 대한 반성의 발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은 이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 대한 묵상을 하려고 합니다.

 과연 종교개혁자들은 왜 이 "오직 믿음만"이라고 강조했을까 종교개혁자들이 믿음을 강조하기 위해 강력히 비판한 그 행위는 과연 어떤 행위이길래 그렇게 혹독하게 비판되었으며 그 의미는 오늘에 있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생각하기 전에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종교개혁자들의 말이 그대로 복음은 아니란 것입니다.

 제가 작년에 제네바대학에서 칼빈을 전공하고 가르치고 있는 학자를 만나 개혁에 대한 질문을 좀 했는데 그 분이 아주 인상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칼빈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칼빈은 복음이 아니라고 ! 우리 한국교회는 모두 칼빈이 말한 교리는 성경보다 더 믿는 습성이 있는데 칼빈은 복음이 아닙니다. 또 칼빈을 이해를 해도 제대로 이해하고 주장을 해야하는데 제대로 이해도 하지 않고 무조건 주장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한국교회전체는 오늘 칼빈을 더 깊이 연구하고 그것을 검증하여 오늘 우리 교회가 개혁되어야 하는데 참고로 해야 할 것입니다. 자 이 칼빈은 복음이 아니다란 말은 칼빈이 말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칼빈의 주장도 그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개혁자들의 논리도 그것이 강조되고 특별히 그 믿음과 대조한 행위라는 것을 부정하고 믿음을 강조하게 된 시대적 배경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시대적 배경에서 믿음은 무엇을 의미했고 행위는 무엇을 의미했느냐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이 교리를 올바로 이해 하고 칼빈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길입니다.

 그럼 그 시대에서 행위란 무슨 의미였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믿음없는 율법적 행위를 의미하였습니다. 기독교는 1세기 부터 조용히 퍼져나가기 시작하여 3세기에 이르러서는 지금 스칸디나비아지역부터 동쪽으로는 슬라브족의 영역까지 전 유럽을 장악하였습니다. 유럽전체를 장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회는 이 땅위의 삶과 저 세상의 삶 모두를 다스리는 신정정치를 하는 막강한 세력이 되었습니다.

이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동시에 지배하는 신정정치는 13세기 교황 이노선트 3세에 이르러서는 그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그 때에는 세례, 성찬, 죄의 고백과 사면이라는 영적인 면뿐만 아니라 탄생, 결혼, 죽음까지도 교회가 관장하여 교회를 거치지 않고는 이 세상의 삶도 성립할 수 없고 저 세상의 삶도 성립할 수가 없는 그런 정도의 힘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의 막강한 힘은 14세기에 들어와서 프랑스와 영국과 같은 민족국가들이 출현하고 또 이 민족국가들이 경제권을 가지게 되자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세계지배의 높은 야망에 불타던 불란서왕 필립 4세는 교회의 권세도 차지하고자 역시 권력에 눈이 어두웠던 프랑스인 교황 클레멘트 5세와 결탁하여 교황청을 프랑스 남부에 있는 아비뇽으로 옮기게 됩니다. 이래서 교황청은 역사상 처음으로 로마가 아닌 이 아비뇽에 1309년부터 1377년까지 근 70년동안 로마가 아닌 아비뇽에 있게 되는데 이를 소위 교황청의 바벨론포로시대라고 일컫습니다.

 이 아비뇽교황청 시절, 교회는 불란서 왕이 제공하는 금품으로 극도의 사치와 호화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교황청은사치와 낭비가 심해지게 되었는데 후에 더 많은 돈이 필요하자 교황청은 재원충당의 묘책으로 유명한 면죄부를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원래 십자군에 참여한 사람은 죄의 용서를 해주는 제도로 시작되어 성당건축이나 교회사업을 하는데도 팔아서 재원을 충당하는 방법으로 썼습니다. 이 면죄부가 종교개혁을 할 즈음에는 세상에서 지은 죄뿐만 아니라 죄를 짓고 연옥에 가 있는 사람의 죄까지 사할 수 있다고 하여 부패의 표본이 되었고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것입니다.

 당시 교회는 구원은 면죄부를 사거나 성당에 돈을 희사하거나 십자군전쟁에 참여하는 그런 공로로 얻고 구원을 얻기 위하여 성찬에 참여해야 하고 성사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구원을 돈으로 사는 것뿐만 아니라 그저 종교적인 규례를 지키는 것이 곧 구원의 길인양 가르침으로써 옛날 유대교가 범한 율법에 의한 구원을 주장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종교개혁자들은 성서의 구원은 종교계율을 지키는 행위로써 얻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얻고 우리가 하나님앞에 보여야 할 것은 주일날 예배하고 때를 맡추어 기도하고 규정대로 십일조를 하고 하는 습관적이고 율법적인 그런 행위로써가 아니라 진실로 하나님을 사모하고 그 분에게 순종하는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종교개혁자들의 비판은 예수님이 비판하시고 초대교회가 비판한 종교의 계율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율법적 행위 그것을 비판한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유명한 논리는 로마서 1:17에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란 말씀과 로마서 10:5 과 갈라디아서 3:13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하는 말씀의 대립에서 나타납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으로 말미암아 사느냐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느냐 하는 것인데 개혁자들은 신앙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앞에 진정한 믿음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성서의 원리를 밝혀낸 것입니다.

 이것은 예언자들과 예수님의 신앙 이해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 셈입니다. 미가서 6:6-8 의 말씀은 무어라고 했습니까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번제도 수천마리의 수양도 엄청난 양의 기름도, 내 허물을 위하여 내 아들을 바쳐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을 드려도 그것이 참다운 제사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행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 말씀을 받아서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신지 아십니까 마태복음 13:23 에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양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예언자들과 예수님의 강조는 율법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핵심인 정의와 사랑과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개혁자들이 강조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강조한 것은 정의를 위해 싸우고 불쌍한 이웃을 사랑하며 인간이 하나님의 의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그 실천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의도 사랑도 믿음도 행하지 않고 그저 제사나 지내고 십일조나 드리고 교회안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구원을 받겠다는 그런 얌체같은 행동을 규탄한 것입니다.

 오늘 야고보선생이 우리에게 강조하시는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들이 믿음이 있다하고 그 믿음의 꽃 피워야 할 열매인 행동이 없다면 그것은 다시 믿음을 율법화하는 오류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교회안에서 보면 믿음이 율법화되는 것을 봅니다.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교만하다고 할 정도로 믿음이 율법화되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를 보니까 구원을 받기 위해선 방언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방언교실까지 만들어 방언을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그래서 방언이 터지면 야 내가 구원을 받았구나 하고 기뻐하며 감사헌금을 냅니다. 이것은 방언을 구원의 도구로 만든 율법주의이고 현대판 면죄부의 발행과 같습니다.

 믿음을 율법화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것이며 믿음은 하나님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것이며 믿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며 믿음은 하나님의 정의에 삶의 기준을 두는 것이며 믿음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위로를 받고 하나님 자녀됨을 확신하며 자유하고 억눌리지 않고 희망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나의 죄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고 그리스도의 의를 내 몸에 채우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것은 그리스도의 정의,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그 자유함, 그리스도의 그 죄와 맞서는 용기, 그리스도의 그 연민, 그 분의 존재를 내 존재속에 구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믿음이란 것은 정말 순수하다면 반드시 정의를 세우고 이웃사랑을 하고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기 위해 증언하는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길래 야고보선생은 그런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했습니다.

 행위가 구원의 조건을 결코 아닙니다. 구원의 조건은 믿음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있다면 당연히 거기에 마땅한 행위는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행위는 믿음의 당연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행위가 나타나지 않는 믿음은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행위는 교회를 다니고 십일조를 내로 정기적인 기도를 하는 그런 율법적 계율의 행위가 아니라 그 하나님이 주시는 정의와 사랑과 하나님앞에서 겸손히 살아가는 그 자세의 행위를 말합니다.

 오직 믿음이라고 그렇게 강조한 칼빈 선생은 돈을 가리켜 믿음의 진위를 시험하는 도구라 하였습니다. 돈을 독점하고 나누지 못하고 그것으로 치부하고 횡포를 부리는 자는 그의 영혼이 잘못되어 있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바로 서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정의와 사랑의 행위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 예수님께 부자청년이 와서 문의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새겨 보십시요. 영생을 얻고자 하는 부자청년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을 얻고자 하거든 계명을 지켜라. 부자청년이 무슨 계명을 지켜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시기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짖 증언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다."(마태19:16-22)

부자가 자기는 이 계명들은 다 지켰다고 하고 더 무슨 계명을 지키라는 것이냐 반문했습니다. 예수님이 네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계명은 지켰다 하면서 그것이 가난한 사람에게 자기 재산을 나누어 주는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은 그릇된 계명준수에 대한 질책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어느 부흥회에 참석하였는데 그때 부흥회를 인도하시는 목사님이 힘주어 강조하던 말씀이 늘 저의 마음에 남아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신앙생활" 이란 말을 써서 안된다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이라 하면 여러가지 생활중의 한 부분이 될 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생활, 문화생활, 경제생활, 정치생활, 그러면 신앙생활은 경제생활과 관련없이, 사회생활과는 별도의 항목으로 진행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날 교회에 와서 생활하는 것과 직장에서 하는 사회생활이 연결되지 못하고 따로 돌아가는 결과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면 신앙은 교회와만 관련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생활신앙" 이라고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온 생활에 신앙이 젖으드는 것을 말했습니다.경제생활을 할 때나 사회생활을 할 때나 모든 생활에 신앙이 스며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치생활속에서도 신앙은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그렇다면 돈먹고 타락한 선거를 치루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옳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교회에 나오고 헌금을 내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한다고 해서 다 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신앙의 진수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분이 우리의 삶속에 계신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 분의 뜻을 쫓아서 살려고 하는 우리의 삶에서 비롯되어야 하고 그것은 행위로 아름답게 꽃피워져야 하는 것이란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런 참된 신앙, 그 신앙이 율법을 지키는 좁은 안목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전 영역에서 정의과 사랑과 겸손의 행동으로 나타나는 살아있는 신앙, 그런 신앙을 가지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신앙은 바로 그런 신앙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은 박하와 회양과 근채의 십일조가 아니라 정의과 사랑과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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