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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되신 예수 그리스도 (요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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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을 사 복음서라고 합니다. 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슴과 그 행적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다른 세 복음서와는 상당히 특이한 점이 많습니다.

다른 세 복음서가 예쑤님이 하신 일에 대한 사건을 중심으로 기록한 책이라면 요 한복음은 그 내용과 의미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다른 그 어떤 말씀 보다도 어려운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요한복음 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설명하려고 집요하게 추적하는 말씀도 없을 것입니다. 이 요한 복음 은 주님으 행적이나 예언들이나 그 능력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관해서 묘사하려고 하는 말씀익 대문에 더 어려운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사건 기록이 많으데 비하여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이나 세 례나 시험에 관한 기사가 없고 변화산 사건이나 최후의 만찬이나 게세마네의 기사 등의 기록이 빠져있습니다. 그 대신에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을 설명하시는 부분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뵤사는 많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사랑이 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긍휼하신 하나님 등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 복음에서는 하나님 에 대한 표현을 말씀이라고 합니다.

이제 왜 하나님을 말씀이라고 하는 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론>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것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묘사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1:18절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 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본문에서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우리 가운데 하나님을 충분히 이해시킬 만큼 잘 묘사해 낼 자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여 하나님을 제 대로 인식하지 못하니까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셔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독생하신 하나님, 즉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을 설명하고 있다는 사 실이 하나님을 말씀이라는 단어로 묘사하는 이유입니다.

물론 여기서 하나님과 예수님은 같은 본체십니다. 종종 이런 문제가 야기 됩니다.

하나님이 몇 분이 계시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 적당히 얼머부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천국가면 몇 분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겠습니까 물론 세 분의 하 나님을 만납니다. 흔히 우리가 하나님을 한 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숫자상으로 한 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한 분이라는 말씀은 성품과 능력과 존귀와 영광이 똑같 으시다는 말입니다. 빌2:6절을 보면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라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원래 하나님과 똑같은 본체시라는 것입니다. 본체라는 말은 숫자적으로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똑같다는 의미의 하나 를 말합니다.

천국에 가면 우리는 분명히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만날 것 입니다. 이 세 분은 똑같이 다 거룩하시며, 전능하시며, 영광을 받으실 존귀하신 분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이렇게 일하는 순서와 질서가 있을 뿐 누가 더 높 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우리에게 바로 알리기 위하여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우리 인생들이 바로 이해하지 못하니까 예 수님게서 친히 육신을 입고 오셔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가르치고 설득하러 오신 것입니다. 그 중의 한 예가 바로 요한복음 14:6절 이하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 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어 7절에서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 으리로다 이제 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 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하여 보아야 할 말슴이 있습니다. 6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고 하신 다음 7절에서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라고 하십 니다.

여기서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별명을 가지게 되시는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 다. 말이라는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마는 '말씀'이라는 단어의 일차적인 의미는 그것이 설명용이라는 것입니다. 말은 뜻을 설명하기 위해서나 전달시키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이라는 별명을 가지시는 것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을 우리에게 전달시키고 설명하는데 있어서는 최고의 방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복음서의 촛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설명하고 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용서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서 바로 그러한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용서의 때다, 구원의 날이다, 아직 심판의 때가 아니다, 그러니까 지금 용서를 하니 너는 돌이켜 회개하고 다시는 이런 죄를 짓지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게 서는 지금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는가 하는 것을 표본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노라"는 말씀을 이해하시겠습니까 하나님 께서 지금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시며,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었인지를 이 사건 을 통하여 보여주고 계신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고 계실 때에 "주여, 주의 모친과 형제들이 찾아왔 습니다."하니 이에 주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형제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 하는 자가 내 형제니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말씀입니다. 여기 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었입니까 천륜을 어기고 천륜을 어기 고 인륜을 어기라는 말씀입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었이 더 중요하 게 여기며 무었을 더 기뻐해야 할 것인가 하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을 인륜지 대사보다 더 중요하게 여길 것을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같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시기 위하여 예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 가운데 가정 중요하게 보아야 할 책이 있다면 복음서 입니 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 땅에 오셔서 배고픈 자들을 만나셨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들이 이미 두끼나 지났는데 이대로 두었다가는 배가 고파서 안됩 니다. 먹을 것을 먹고 오도록 집으로 돌려 보냅시다." "언제 집에가서 오겠느냐 너희가 가서 먹을 것을 나누어 주어라." 그리하여서 마침내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결단코 자신이 누구인가를 과시하기 위하여는 그 기적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오직 모두를 배불리 먹이시기 위하여 그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또한 복음서의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 좇으시는 이유 중에 큰 부분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저희의 목자 없는 양같 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바로 이것이 누구의 마음이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주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주변의 사람들도 '보라 저가 어떻게 그 나사로를 사랑했는가 그가 눈물을 흘리신다'라고 말했습니다. 죄 아래 노예가 되었음을, 사망의 권세아 래 있음을 분히 여기시며 이러한 우리를 분히 여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을 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심정인 것입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얼마나 안타까와 하십니까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내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닭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 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여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너희에게 이렇게 회개를 촉 구했느냐 얼마나 많은 선지자들이 와서 너희에게 회개를 요구했느냐 그러나 너희 가 듣지 아니하였도다 이같은 예수님의 탄식이 곧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서에는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앞에 나타나셔서 우리를 향하여 안타까와 하시고 분노하시고 목숨까지 버려 우리를 사랑하신 일들을 보여줍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 흩어진 제자들을 찾아가시며, 잡히시던 날 밤에 베드로 가 벤 말고의 귀를 다시 붙이시는 하나님을 여기서 발견하지 못한다면 복음서를 읽 는 보람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들이 말씀이라는 단어가 갖는 엄청난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여기 또 다른 엄청난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7:15-19절에 "내가 비옵 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죄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 하기시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 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슴은 진리니이다 아 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 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로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슴 가운데는 18절 말씀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보냄을 받았느냐 하면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하나님 자신을 설명하신 것과같이 그리고 그의 안타까움과 그 분의 원하시던 일들을 수행시키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 도를 보내신 것같이 우리를 서셍에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성도는 이 세상 속에서 기독교에 대한 유 일한 말씀인 것입니다. 내 말뿐만 아니라 내 판단, 내 행위, 내 모양이 그대로 기 독교를 설명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놀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오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의 자녀로 부르셨 습니다. 이 땅에서 많은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단순히 하 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스피커 구실만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삶 전체를 말씀으로 사셨듯이 그는 걸어다니는 말씀이셨습 니다. 일거수 일투족이 다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다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었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바로 그렇게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 러므로 성도로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놀라운 것인가 하는 사실을 알 아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밖에 나가서 생활해 보면 '내가 신자다!'하는 것이 드러나 는 날부터는 사실 무었을 해도 옆에서 다 나를 쳐다 봅니다. 그래서 이것을 부담스 럽게 생각하여 숨기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거추장 스럽게 생각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당연한 것이고 자랑입니다.

사람들이 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는 이유는 모두가 그 빛 을 보라고 보이는 곳에 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서 하나님을 설명하 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시키기 위하여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눈에 띄는데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안 보이는 곳에 가기를 더 소원합니다.

오늘날 작은 교회는 그렇게 기도하고 전도하고 몸부림 치는데도 교회가 잘 커지지 않는데 큰 교회는 작은 교회의 수고에 비해 더 빨리 그리고 만히 커지는지 아십니 까 그것은 신자들이 숨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헌금이나 바치고, 작분은 맡지 않고 구역에는 안모여도 별 문제가 안되니 얼마나 좋으냐는 것입니다. 또한, 헌금을 냈는지 안내었는지 누가 압니까 4,000명 5,000명이 모이면 누가 왔는지 안 왔는지 알게 뭡니까 그렇게 적당히 떼우려는 신자들로 인해서 큰 교회는 자꾸만 커져가고 있느느 것입니다. 100명 미만 모이는데 가면 누가 왔는지 누가 안 왔는지 금방 압니다. 그래서 큰 교회로 숨어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불을 켜서 됫박 속에 집어넣고 뚜껑을 닫아놓은 것과 똑같습 니다. 그럴바에야 아예 불을 켜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로 부터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나 는 생명의 떡이라, 나는 생명의 샘물이라 목마른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게 와서 먹고 마셔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우리 성도들의 생활이어야 합니다. "수 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이 말씀을 위해서 성도는 태어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이 짐을 여러분에게로 가지고 와야 합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구 속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발판과 문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일차적 으로 우리를 통과하여야 됩니다. 왜냐면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세상에 보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목사의 생활 중에 전화받는 일은 시간을 초월한 업무 중의 하나입니다. 삼십분도 받고 때로는 한 시간으로 연장될 수도 있습니다. 설교 준비할 때, 식사할 때등 때 를 가리지 않고 전화는 옵니다. 때로는 피곤하지만 그럴때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 같은 사람에게도 전화를 걸어주는 사람이 있구나... 이것을 기쁜 마음으로 감수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전화를 걸어줄 일이 없다면 살아 있을 가치가 없다는 뜻 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반적인 소망이 무었입니까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잘 믿을테니까 제발 귀챦은 사람 좀 안만나게 해 주십시 오" 이게 대체적인 소원들입니다.

구역에도 좀 마음에 맞는 사람들 끼리만 모아 주시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릴때 에도 장로님의 기도가 짧게 해 주시고, 목사님 설교도 짧기를 바랍니다. 이런 사람 들은 거저 집 안에 들어 앉아 대문을 걸어 잠그고 있어야만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역에서 마음이 잘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며, 말도 안되는 엉뚱 한 질문을 해대는 사람을 감수하고 참아주는 것이 그 상대방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시는지 아십니까 인내함으로서 들어 줄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가막힌 인격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야할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계셨던 곳에 어디 온전한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중풍병자, 귀신 들린자 소경, 앉은뱅이들이 주변에는 있었습니다. 호기심과 일신상의 축복만을 추구하는 군중들, 외식과 교만으로 병든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 문제 투성이 인간들 틈바 구니네 계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유유상종이다' 그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 다고 그러나, 신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는 얼마나 부족한 사람들 틈에 있느냐 가 그 사람의 신앙 인격을 증거합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두러싸여 있는 사람, 그가 잘하는 사람입니다. 있 는 사람들 끼리 모이지 마십시오. 있는 사람들 끼리 모이면 없는 사람은 갈 곳이 없어 집니다.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들 속에 가서 쉽게 끼일 수 있지만 없는 사람 은 있는 사람들 틈에 끼이지 못합니다.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찾아가야 됩니다.

여기서 있다는 것은 꼭 돈 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돈 일수도 있고, 지식일 수 도 있지만 가장 큰 것은 신앙입니다.

여러분, 신앙이 성장하고 난 다음에 제일 못 참는 것이 무었입니까 그것은 연약 한 믿음의 소유자가 엉뚱한 질문을 해 댈때입니다. 무식하게 그런 질문을 하느냐 고 생각하면서 냉정하게 대합니다. 그러나, 올챙이적 시절을 기억해야 됩니다.

성장한 믿음의 사람이 연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키우는 토양을 만들어 내지 못 한다면 그 믿음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나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하는 말씀의 깊은 뜻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 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물론 때로는 지칩니다. 그러기에 가끔은 우리끼리 모 여야 합니다. 그래서 힘을 재 충전 받고 믿음을 얻어 가야 합니다. 신자끼리 모여 다시 힘을 얻고, 서로 위로를 받고서 흩어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곳이 삶의 현장은 아닙니다. 영양 공급을 받는 곳입니다.

 <결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셨습니다. 요1: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 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 리가 충만하더라." 우리도 바로 이렇게 보냄을 받았습니다.

우리느느 은혜와 진리로써 우리의 영광을 취해야 됩니다. 지식과 능력이 아닙니다 은혜와 진리로 우리는 우리가 있는 일터에서, 혹은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존재 가 치를 인정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말씀 처럼 그 사람을 보니 하나님이 보내신 자요, 예수를 믿는 자요, 은혜와 진리가 충 만 하더라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 줄 알고 마음에 기억하고 목숨을 다하 여 그렇게 살도록 힘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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