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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좌절할 수 없는 운명 (요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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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는 양의 우리를 들어가는 두 종류의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양의 우리의 정문으로 들어가는 목자요, 또 하나는 울타리를 넘어서 우리로 들어가 는 절도와 강도가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양우리의 정문으로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강도와 절도에 관한 이야기가 어 떠한 상황에서 언급되어 졌는지를 다시 한 번 고찰해 보겠습니다. 요 9:39-41절을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 고 보는 자들은 소경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후에 강도와 절도에 관한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말씀을 근거해 볼때, 절도와 강도는 '본다'고 하는 유대인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10장에 나오는 양의 우리의 비유에서 선한 목자와 절도와 강도를 구별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무었을 말씀하시고자 하는가를 찾아보는 것이 오 늘의 중심 내용이 되겠습니다.

 <본론>

우선 왜 양의 우리의 정문으로 들어가는 자와 담을 넘어가는 자들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는가를 아셔야 합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은 양의 우리가 궁극적인 도착지가 어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우 리에서 꺼내 놓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로 되어 있습니다. 3절을 다시 보면 "문지기 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의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그리고 4절에는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 는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양의 우리가 궁극적인 집이거나 천국은 아닙니다. 양의 우리는 잠시 가두어 두는 곳입니다. 그곳에 임시로 넣어 둔 것은, 물론 악한 짐승으로부터 보호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 사실입니다마는 또 한편으로는 그 우리 자체도 빠져 나와야 될 곳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양의 우리가 목적지가 아니라는 말씀은 16절에도 나옵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 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이 말씀에서 비추어 볼 때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은, 불러서 이 우리에 모아 들이지 않습니다. 울 안에 있던 양들과 들지 아니한 양들을 선한 목자 밑에 둘 것입니다.

울 안에 들어 있는 양무리는 어쨌든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상적인 면 으로 생각하자면 유대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이 름으로 한 울타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저들을 한 데 묶어 두었으며 보호했 었습니다.

그러 나 그 보호가 궁극적인 보호와 목표는 아닙니다. 잠시 그 곳에 놓아 둘 뿐이 기 때문입니다. 잠시 후에 한 목자가 와서 그들을 불러 내는데 이때 전부를 불러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분명히 그의 양을 불러 내고 또한 그의 음성을 듣 는 양이 따로 있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좀 더 깊이 살펴봄으로써 기독교에 대한 근본 진리들을 이해하는데 도 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왜 유대인 지도자들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담을 넘어가는 자들로 묘사되었으며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에 대하여 반대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으로부터 이 사건의 내용을 추적하고자 합니다.

문제의 답은 단 한가지입니다. 그들이 유대주의자들이어서 그렇습니다. 유대주의 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자기네들과 다른 민족들을 분리시키는 자기 우월감입니다.

즉 우리만이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라는 사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이 그들에게 왜 우월감이 되었는가 하면 '우리 는 너희들과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가려서 뽑았다'고 생각했 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문지기가 그들의 문을 열어주지 않으므로 우리의 문 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담을 넘어 들어갔다고 예수님께서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있고,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 께서 따로이 구별해 놓았으므로 우리만이 옳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 씀하시기를 '너희들의 생각은 틀렸다. 왜냐하면 문으로 들어가고 있지 않기 때문이 다'라고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양의 우리는 무었이고 문과 문지기는 무었입니까 양의 우리가 유대주의라 면 문지기와 문은 율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문과 문지기를 통해 오셨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울타리로 우리를 묶어 놓으셔서 다른 데로 가는 것을 방지합 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들이, 사실은 그 아래에서 실패된 자리에 있다는 것을 모르 고 있음을 암시하시고 그 곳으로부터 우리를 꺼내 놓기 위해서 율법을 따라, 찾아 오셔서 우리를 꺼내신 것입니다.

이 문제를 유대인들은 오해하였기 때문에 문을 찾지 못하였고 유대주의로서 울타 리를 넘어다니는 강도가 되고 절도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예 수 그리스도를 따라 율법이 가르치는 바에 따라서 그 출구를 갖게 된 자라고 성경 은 묘사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받았을 때에 맨 처음으로 오해한 것은 '우리는 그래도 율법을 갖고 있다'는 사상이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가지고 있으며 율법을 알고 율법을 행하는 자들이다'라는 생각이 그들을 올무에 묶었습니다.

즉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율법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켜 행할 만하니까 주셨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남다른 존재이니까 율법이라는 요구가 있었을 것이다. 줄 만했길래 주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우 월감 속으로 인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율법을 지키라고 준 적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율법에 대해 맨 처음으로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율법을 준 가장 큰 이유는 '모든 입으로 할 말을 없게 하도록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롬3:19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 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 율법을 준 것은 우리가 얼마나 모자라는 존재인가를 확인시키기 위해서 였던 것 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이 주어진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에 얼마 나 미달되어 있는가를 확인시키는 눈금으로써인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다. 아무래도 부족하구나!'하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가 시험을 치렀는데 몇 점인가 하면, 빵점이면 오히려 낫습니다. 마이너스 점수를 받은 것입니다. 시험지를 제출하기라도 했다면 빵점이라도 받았을 터인데 시험지를 주었더니 구겨서 내 버린 꼴이 되어 희망이 없어진 것입니다. 학생의 신분조차도 안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준 가장 큰 이유는 하나의 확인 작업을 위한 것입니다. 롬5:20절 에서는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고까지 말씀하시어 율법을 준 이 유가 범죄를 더하게 하려고, 즉 죄를 죄로 더 잘 드러나게 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율법이 없을 때는 양심에 가책이 되었을지언정 이것이 얼마 나 큰 죄인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율법에 제시됨으로 우리가 그 법에 저 촉되어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알게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마음에 선을 행하고 싶어하는 마음도 없다는 것이 더욱 확정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식으로 말하자면 죄란 행위적인 것뿐 아니라 근거까지도 포함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형제를 향하여 노하는 자마다 지옥 불에 던지우리라"는 말씀에서 범죄란 행위로 나타내어졌을 때 무었의 뿌리의 열매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것은 '네가 죄인이기 때문이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즉 율법이 가입됨 으로써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확인하는 기준으로, 피할 수 없는 눈금이 된것 입 니다.

그러면, 율법이 하는 일이란 무었일까요 로마서 7장에서 지적하듯이 내 안에 선한 마음이 혹 있습니다. 그러나 또 악한 마 음도 있는데 그 두 마음이 싸우면 늘 어느 쪽이 이깁니까 언제나 악한 마음에게 지게 됩니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게 없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한탄했습니까 롬7: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율법이 가입하여 무었을 확인시키기 때문에 이 고백이 나옵니까 그것은 우리 모 두가 죄인이요 희망이 없는 자인 것을 자인하게 만드는 작업 외에는 율법은 아무것 도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고백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유대주의란 무었입니까 율법을 받는 것으로 어느 수준 이상일 것이라고 생각하 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다. 이는 남다르기 때문에 주셨을 것이니 이것만 행하면 된다'라고 자꾸 외치고 있습니다.

사실 율법을 준 것은 우리의 죄인됨을 증명하기 위해서 주시려는 것인데도 말입니 다.

이와같이 율법이 하는 일은 상당히 부정적입니다. 율법 아래 매였고 갇혀 있었다 는 표현이 적나라하게 나온 곳이 있는데 갈3:23-24절입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 니라 이같이 율법을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 니라"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 니다. 율법이 율법 자체에 그리스도를 계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율법이 그리스도 에게로 화살표 같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율법이 주어짐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내 능력과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조건으로 도 구원을 얻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자인과 자책과 좌절을 낳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율법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됩니까 그것은 구원은 결국 나로부터가 아닌 누군가의 제 3의 손으로부터 내가 붙잡혀 인도되지 않는 한 구원이 없다는 것을 인정케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식의 생각은 결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었이냐 하면, 우리가 율법 을 추적하다 보면 율법이 제시하는 율법의 연장선 어느 수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라고는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은 언제나 나 아닌 다른 것의 도움이 없이는 안된다는 좌절과 자폭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주의 자들은 율법이 제시한 것을 보고 내가 이것을 깨우쳐서 행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것이 아무리 괜챦은 것이라 할지라도 근거와 힘이 자기로부터 나오고 출발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건 성경의 말씀과 정반대입니다. 바로 이것이 유대주의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율법에 가둬 놓으셨을까요 왜 이스라엘의 사천년 역사를 우리에게 제시해 놓으셨을까요 그것은 율법을 우리에게 제시함으로써 인류로 하여 금 스스로에 대해 절망하고, 스스로가 구원 문제에 대해 도무지 방법이 없는 줄을 알고 항복케 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우리로부터 말미암지 않고 다른 이로부터 제시되고, 힘이 역사되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으로써 우리에게 허락 된 것입니다.

양의 우리를 넘어다니는 자들의 얘기는 유대인들만의 이야기거나 구약 시대의 이 야기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시대의 신자들을 향한 일종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갖고 있는 것들 중에도 유대인들이 율법을 갖고 있던 마음 자세와 꼭 같은 자세로 신앙을 가짐으로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만일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기를 '나는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다. 나는 그리스도 를 선택했다. 나는 이제 주님께서 명령하신 명령대로 살고 있다.'라고 한다면 이것 은 바로 유대주의자가 되는 지름길입니다. 참으로 애매하지 않습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지금 율법이 우리를 묶어 놓고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 도하는 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율법에 의해 우리가 우리를 포기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율법의 요구에 대해서는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도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주의가 자지고 있는 사상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무었이 가능하다는 사 상입니다. 바로 이와같은 사상을 가진 신자들은 기독교를 유대주의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렇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은 주를 선택하지 않았지만 난 주님을 선택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르 는 그리스도를 저는 압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이 우리 앞에 있어서 우리를 맨 처음으로 깨닫게 하는 것이 무었이라고 했습니까 그것은 우리 자신으로부터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작업이라고 하였습 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판단과 선택으로 구원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면 분명히 잘 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우리가 선택해서도 아니고, 기대하고 요청해서도 아닙니다.

생각지도 않고 있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마치 행3:1-8절 에 나타나는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시 기도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다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자를 고친 사건과 같습니다. 그 앉은뱅이는 하나님을 믿었거나 예수 그 리스도의 힘을 의지했더나 한 적이 없었습니다. 단지 물질을 좀 얻을까 하고 쳐다 보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를 바라보며 그에게 믿음이 있는가 하며 묻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대화도 없었습니다. 단지 일방적으로,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걸으라!'고만 하였습니다.

바로 여기서 구원이란 것이 우리의 조건과 능력과 요구와 또는 반응과 무관한 것 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 수 밖에 없느냐 하면 우리로 부터는 구원을 가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늘 은혜의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구원을 선물이라고 합 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늘 자신이 무엇을 했다는 생각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항상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전제위에 소개되고 있습니 다. 인간의 어떤 판단과 이해와 요청에 의해 그리스도가 소개되지는 않습니다. 바 로 이것에 대한 암시가 창세기 5장에 나옵니다. 창5:1절을 보시겠습니다.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으 로 지으시되" 이어서 4-8절을 보시면; "아담이 셋을 낳은 후에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삼십세를 향 수하고 죽었더라 셋은 일백 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에 팔백 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십 이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여기서 나오는 아담의 자손들은 모두 구백 살을 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 의 목적은 그렇게 오래 살았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었더라는 사실에 있습 니다.

창세기 5장의 죽었다는 기록은 3장의 사건의 결과였습니다. 창세기 3장에 아담과 하와의 타락 사건이 나타납니다. 성경은 타락한 자에게 정녕 죽는다고 선언했습니 다. 하나님과 무관한 자가 되고 생명의 근본인 분으로부터 잘려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생물학적인 죽음이기 이전에 영적인 죽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 든 축복과 풍성하심을 공급 받을 수 없는 자가 되고 형벌 가운데로 들어가게 되었 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육체의 죽음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5장의 계속되는 죽음의 기록 속에서 문득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즉, 에녹 이라는 사람이 등장되는데 그는 죽지 않고 하늘 나라로 갑니다. 이 에녹에 대하여 좀 살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에녹이 왜 죽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좀 더 깊이 들어가서 에녹은 왜 하나님을 믿었습니까 바로 이 질문 속에는 큰 암 시가 들어 있습니다.

창세기 5장의 가장 굵은 멧세지는 '에녹이 하나님을 믿었더니 구원을 얻었더라'는 식으로 간단히 이해하면 유대주의로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나님 을 믿을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에녹의 인간적인 능력과 통찰력이 발휘되어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닌 것 입니다. 도무지 설명되어 질 수 없는 방법으로 믿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율법이란 우리를 완전히 소금에 절인 채소같이 만들어 주는 수단입니다 우리가 이 율법 앞에서 자신이 허물어 지지 않고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동원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율법은 모든 입을 막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로 들어가 있다는 것 을 확인 시켜주는 작업을 이루어 주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도입될 이유가 없 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속에서는 유대인 지도자들이 그들 스스로가 무언가를 할 수 있 다는 자신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몰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큰 위험이 무었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무런 좌절이 없이 만나는 일입니다. 스스로의 좌절이 없이 자신의 힘으로 예수를 만나면, 자신의 힘이 없어지게 될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구원하기에 실패 한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좌절 속에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100 %의 자기 포기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의 '자포 자기'란 내가 나를 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버릴 것도 없는 존재입 니다. 바로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그곳에 주님께서 찾아 오시는 것입니다 그 외의 방법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도 없으며, 또한 만나서도 안되는 것 입니다.

다시 창세기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시겠습니다. 창세기 5장의 에녹 이야기가 하나 님의 은혜에 대한 굵은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난 다음에 6장으로 가서는 노 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노아는 모든 인간들이 홍수 가운데서 죽는 형편에서 살아 남은 자입니다.

그러면, 노아가 왜 살아 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기 때 문입니다. 이 말씀도 맞는 말씀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노아가 어떻게 하나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으며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었는가'를 보이기 위해 기록되 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말해, '어떻게 시체들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가 생길 수 있느냐'하는 점을 위해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아심과 더불어 분명히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제 3의 손길이 있었을 것 이라는 추측과 함께 이에 대한 공식적인 해답으로서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과 믿음에 관한 한은 항상 아브라함이 등장하게 됩니다. 신약 성경의 시작도 아브라함의 이름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절대적인 간섭에 의한 대표적인 인물로 보지 않고, 단지 이삭을 바친 위대한 믿음의 인물로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의 신앙이라는 것이 이런 식으로 정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는 믿음을 꺼내 놓듯이 내가 하나님께 어떤 믿음을 꺼내 놓으면 그것을 기특하게 여기시어 내게 축복해 주시는 결론이라고만 여기고 있습니다. 그 러나 그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큰 싸움이 있다면 바로 이것입니다. 다시 말해 양의 우리의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유대지 도자들과는 뭔가 다른 존재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 면 똑같은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의 신자들은 모두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여러분은 중보자들입니다.

여러분은 이 불신의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 앞에 중보자로 서 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윤리와 그 양식으로 둘러싸인 그 우리의 문으로 들어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은 절망을 가지고 그들과 만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그들을 만 나는 자는 그 양들을 목자에게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잡아 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오늘날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신앙을 다시 한번 정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정검의 맨 밑바닥이 만일 자랑이라면 틀린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이야기 할 때에 이런 식으로 이야기 되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찾아 오신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먼저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먼저 아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름을 각각 불러 낸다"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오셔서 우리를 찾아 내시고 불러 내시고 인도해 내시는 것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갖게 되는 공통적인 감격이 있다면 이것입니다. '아! 하나 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 셨구나! 주님께서 나를 찾아 오셨도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감격이요, 승리의 외침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에게는 결코 절망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오늘의 결론입니다.

왜 없습니까 우리가 절망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는 포기가 없습 니다. 왜냐하면 그 포기에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신자란 원래가 희망이란 전무한 상태에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 오심으 오 인해 그 때부터 한 걸음씩 내 딪디기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도대체 좌절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옛날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신앙이 아닐 때에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맙니다. 성경은 제 대로 출발된 신앙이 아닌 신앙을 향하여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눈 먼 인도 자' 다시말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라고 지적합니다. 또한 눅11:52절에서 는 예수님께서 그러한 자들을 이렇게 꾸짖고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 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그러므로 참으로 조심하셔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이 실수를 하였으며, 오늘날 신 자들 또한 이런한 실수를 할 가능성이 다분히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우리로부터 시작되거나 추적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과 그 분이 이루셨다는 것을 늘 잊지 않으셔야 됩니다.

이것을 잊어버리게 되면 바로 그것이 울타리를 넘어 들어가는 도적이요 강도가 되 는 것입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가 도입되는 것은 내가 노력한 연장 선상에서가 아니라, 내가 좌절 과 포기와 낙심과 절망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해답인 것입니다.

우리의 감격은 이런 감격인 것입니다. 주님은 준비된 자를 부르지 않습니다. 힘이 있는 자를 부르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내용을 복음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결코 잘난 자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소경을 찾아 오시고 눈을 뜨 게 하려고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내가 신자다운가 하는 것을 정검할 때에 여러분의 행위와 수준 으로서 확인해서는 안됩니다. 나 혼자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누군가가 도와 주어야만 된다고 인정하는 마음이 있느냐를 체크하셔야 합니다.

성도의 문제가 무었입니까 그것은 바로 나를 근거로 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때 문입니다. 그것은 불행한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 에게 손해를 끼치고, 많은 다른 양떼를 잡아먹는 무서운 강도로 돌변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정리합시다. 우리의 우리된 것이 무었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붙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나를 붙잡으시고 나를 위해서 해 주신 것에 대하여 어떻게 신자 답게 살것이냐 하는 문제는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일단은 하나님게서 나를 사랑 하셔서 나를 찾아 주신 이 사실에 대하여 넘치는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절망도 좌절도 없습니다. 바로 거기서 출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 고 또한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있다면 감사와 감격 뿐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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