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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 (요 11:1-45)

첨부 1


Ⅰ. 본문의 구조

요한복음은 1-12장과 13-21장의 두 부분으로 크게 나뉜다. 공관복음에는 예수의 이야기를 대개 수평적으로 다루어 그의 탄생을 시발점으로 하여 갈릴리 사역을 취급하고 그것에 이어 예루살렘에서의 수난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다룬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그것과는 달리 [로고스]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수직으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그가 행하신 표적(표징)들과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하나님을 계시하셨다. 이렇게 12장까지에서는 예수의 표징들을 다룬다. 13장으로부터 마지막까지는 예수가 수난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사건을 다루되 그 십자가 사건은 오히려 영광과 승귀(昇貴)의 사건으로서 그가 내려오셨던 하늘로의 영광스러운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영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라는 2 원 구조를 골격으로 해서 예수의 삶과 인간의 신앙의 삶을 그 구조 속에서 해석한다. 데이빗 엘 바(David L. Barr)는 <New Testament Story>라는 책에서 요한복음의 구조를 아래와 같이 분해했다.

1. 예수의 참된 정체성에 대한 증언
(Testimony to the true identity of Jesus)
2-4 표적들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
(The glory of God revealed in signs)
5-10 행동에서 나타난 예수와 하나님의 연합
(The union of Jesus with God in action)
11-12 궁극적 표적(The ultimate sign)
13-17 말씀에서 나타난 예수와 하나님의 연합
(The union of Jesus with God in word)
18-20 예수 그의 수난에서 영광 받으심
(Jesus is glorified in his passion)
21 진리에 대한 공동체의 증언
(Testimony of the community to the truth)

이 분해는 교차대칭구조(chiasmus)를 나타내는 바, 11-12에 나타나는 나사로 부활 사건을 중심으로 하여 대칭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 준다. 1-12장을 브라운(R.E.Brown)은 그의 주석에서 '표적의 책'이라 불렀거니와, 11장에 나오는 나사로 사건은 그 부분의 절정(the ultimate sign)인 동시에 예수가 수난하게 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된다. 이 점에서도 공관복음과는 차이가 있다. 즉 공관복음에서는 예수 처형의 죄목이 나사로 사건과 관련되지 않고, 성전을 헐겠다고 했다던가 백성을 소란케 했다던가 하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요한복음의 분수령이 되는 11-12장의 일 부분으로서 전반부의 절정이면서 후반부의 기반이 되는 이야기이다.

Ⅱ. 본문확정 (원문비평)

이 부분에도 원문비평학적인 사소한 문제들이 많이 있지만 UBS 비평판 성경 제 4판 각주에 제시된 중요한 것들만 다루기로 한다.

< 21절 >

[퀴리에]가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갈라진다. 유명한 바티칸사본(B)과 시리아역 하나가 이것을 뺐다. 그밖에 우수한 사본과 고대역본과 많은 교부들의 인용이 kurie를 넣고 있어서 거의 확정적으로 kurie가 있는 것이 원본일 것이라는 결론이다. 그것을 지지하는 것들은 P45,66,75, A C D L W 등 많은 대문자사본들과 많은 소문자사본, Old Latin역을 위시한 많은 고대역본, Dia tessaron 그리고 많은 교부들이다.

< 25절 >

[카이 헤 조에] kai e joe가 들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갈라진다. 그것이 없는 것은 파피루스 45(P45)와 Old Latin역 하나, 시리아역 두 개, Diatessa ron, 그리고 교부 두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이 들어 있는 것들은 그 권위에 있어서나 수에 있어서 압도적이다. P66,75 A B C D L W 등 많은 대문자사본, 소문자사본, 고대역본 그리고 더 많은 교부들이 그것을 지지하고 있다.

< 31절 >

[독산테스] 라고 된 사본과 [독사존테스]라고 된 것과 [레곤테스]로 된 것들이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다. `독산테스' 를 지지하는 것은 파피루스 75와 소문자사본 33뿐이다. 주로 `독산테스'와 `레곤테스'가 각축을 한다. 전자를 지지하는 B C D L W 등과 여러 소문자사본 그리고고대역본들이 후자를 지지하는 P66 A C2 등과 비교할 때 약간 우세하다고 보여짐으로 전자에게로 기울어졌다.

Ⅲ. 주 해

< 1 >

"어떤 사람이 앓고 있었는데 그는 베다니 사람 나사로였다. 그 동네로 말하면 마리아의 동네요 그녀의 자매 마리아의 동네였다."
원어의 뉘앙스를 살려서 풀이하면 대개 그런 말이 된다. 여기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나사로라기보다 오히려 마리아와 마르다라는 것이다. 나사로가 다시 사는 사건을 취급하기는 하지만 예수의 대화는 이 두 여성과의 사이에서 벌어진다. 그 두 여성 가운데서도 마리아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우선 2절에서부터 그러하다.

< 2절 >

12장 3절 이하에서 언급될 사람을 미리 앞당겨 여기에 소개한다.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붇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은 마리아라는 것을 밝혔다. 물론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많았기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수 있다. 저자가 설명을 붙이면서 마리아를 부각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나서 나사로는 그 마리아(마르다는 언급하지 않고)의 오빠이며 앓고 있었다는 것을 첨가했다. 주인공은 나사로가 아니라 마리아와 마르다이다. 1절의 [ … ]라는 구조(periph ras tic imperfect)나 2절의 미완료직설법 동사 [에스데네이]는 모두 과거진행적 동작을 말하는 것이므로 나사로가 벌써 얼마동안 앓고 있었던 것을 말한다..

< 3절 >

예수께 사람을 보낸 것은 마리아와 마르다였다 (아페스데이란).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예수가 나사로를 사랑한다는 말이 이하에도 몇 번 더 나오는데(11:5;등),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13:23)가 바로 나사로였다는 학설이 나올 만도 하다. 아마도 예수는 예루살렘에 올라오실 때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머무셨고 따라서 나사로를 자주 만났을 것이다. 이렇게 가까이 지내는 동안 나사로를 사랑하게 됐을 것이다. 나사로가 병이 들어 마침내 죽었고 예수에 의해서 되살아나는 특이한 경험을 가졌기 때문에 나사로는 누구보다도 예수를 사랑하고 결사적으로 그를 모셨을 수 있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가 앓고 있습니다"( )하고 예수께 사람을 보냈다는 것은 그 병이 심했다는 것, 예수가 오시기만 하면 그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개별적으로 예수를 자기 집으로 부를 수 있을 만큼 예수와의 친분이 두터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4절 >

파송된 사람이 예수께 도달하여 다급한 소식을 전달했다. 예수는 그 전언을 듣고는 오히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대꾸하셨다. 나사로는 그 사자(使者)가 떠나자 곧 죽은 것 같다. 즉 그 사자가 예수께 당도했을 무렵에는 나사로가 이미 죽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가 태연히 이런 말씀을 자신 있게 하신 것은, 아무리 심한 병이라도 고칠 수 있고, 죽었다 해도 다시 살릴 수 있다는 자신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여기의 '이를 인하여' (디' 유테스)는 앞에 나온 병(아스데네이아)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람은 할 수 없는 일, 즉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일을 예수가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자기 손바닥을 들여다보듯이 그 사건의 귀추를 환히 알고 말씀하셨다.

< 5절 >

여기서도 예수가 마르다,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다시 강조한다. [에가파]는 미완료 직설법 동사로서 과거의 계속적인 동작을 말한다. 예수는 그들을 사랑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 6절 >

나사로가 앓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예수는 요단강 건너편에 이틀을 더 계셨다. 팔레스틴은 더운 지방이어서 사람이 죽으면 그날로 매장을 하는 법이다. 예수는 나사로가 죽어서 매장되어 썩기 시작할 때를 기다린 것 같다. 죽자마자 살리면 정말 죽은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 나올 것이니 철저히 죽은 자를 살리려는 것이었으리라.

< 7절 >

나사로의 위독을 알리는 사자의 말을 들으신 지 이틀 후에야 예수는 제자들에게 유다로 다시 가자는 말씀을 하셨다. 요단강 건너편엔들 왜 하실 일이 없었으랴. 거기도 병자들이 있었을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들어야 할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마땅한 때를 놓치지 않으신 것 같다. 나사로를 살려야 할 때, 그리고 그 일로 인해서 당신 자신이 고난을 당하고 들림을 받아 아버지께로 가야 할 계획된 때가 되었기에 유다로 가자는 것이었을 것이다.

< 8절 >

그러나 제자들은 몇일 전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에 그리로 돌아가자는 예수의 제안은 뜻밖일 수밖에 없었다. 8:59에 나타난 대로 유대인들이 예수를 돌로 쳐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그곳을 피하여 왔었는데 그리로 다시 간다는 것은 거의 같은 위험을 느끼는 제자들로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 nun ejetoun se lithasai oi 'Iousaioi). 예수가 유대지방에 있을 때부터 유대인들이 예수를 돌로 치려하였고 지금도 그렇게 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말이다. [에제툰]은 미완료 직설법 동사로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추구한다'는 계속적 동작을 나타낸다.

< 9-10 >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밤이 열 두 시간이요 낮도 열 두 시간으로 되어 있다. 낮에는 태양이 떠 있는 시간이다. 그래서 밝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무엇에 걸려 넘어질 염려가 없다. 이것은 하나의 은유이다. 이 세상의 빛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가 계시는 한 그리고 그가 계시는 곳은 환하고 밝다. 열 두 시간이라는 충분하고 완전한 시간을 지배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가 세상의 빛으로 계시는 한 어두움은 힘을 쓰지 못한다. 예수는 스스로 생명을 내어줄지언정 어둠의 세력에게 생명을 빼앗기는 일은 없다. 그러나 빛이 세상에 없을 때는 어두워서 사람이 넘어지기가 쉽다. 결국 그리스도가 없는 세상은 어두워서 사람들이 넘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유대지방으로 다시 가시겠다는 예수에 대해서 제자들은 그런 신앙이 없기 때문에 걱정을 한 것이지만, 빛 자체이시고 시간의 주인이신 예수에게 있어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 11절 >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유대로 가자고 제자들에게 지시한 후에 하신 말씀이다. [케코이메타이]는 이미 잠들어 있다는 말이다. 즉 잠든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현재 완료 중간태). 예수는 이미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예수에게 있어서는 죽음이 마치 잠드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잠은 깨어나게 되어 있듯이 예수에게 있어서 나사로의 죽음은 다시 살리시기로 작정된 것이어서 잠든 자가 깨어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나사로는 반드시 깨어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깨우러 가노라[엑쉬프니소]. 잠든 자를 잠에서 깨게 하겠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예수와 인간은 그 존재 양식과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여기서 보여 준다. 우리에게는 확실히 죽음인데 예수에게는 잠에 불과하다.

< 12-13 >

제자들은 보통 사람들로서 인간적 인식 속에서 말한다.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나사로가 잠이 들었다면 아마도 병의 고비를 넘기어 잠을 이루었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다면 이제 그는 병이 낫게 됐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즉 예수의 사고와 사람의 사고의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예수에게는 죽음이 잠이고 사람에게는 잠은 잠이다.

< 14절 >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예수는 제자들의 오해를 없이하시려고 인간의 인식 차원으로 내려서 '나사로는 죽었다'고 말씀하셨다.

< 15절 >

예수가 요단 건너편에 오시지 않고 베다니에 계셨더라면 평범하게 나사로의 병을 고치셨을 것이고 그 평범한 사건을 본 제자들은 별다른 자극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지금 멀리 있고 나사로는 죽은지 2 일이 더 지났으니 이제 유대로 돌아가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을 행할 수 박에 없는 처지에 이르렀고, 제자들은 자연히 그 사건을 목격할 것이며, 따라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것이다. 예수는 그것을 인하여 기뻐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놀라운 일을 본 자가 다 예수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가능성을 가진 사건은 매우 귀한 것이다. 예수는 사람들이 자기를 믿고 생명을 얻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이다.

< 16절 >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히브리어로 쌍둥이를 [테옴]이라 하고 아람어로 [테오마]라고 하는데 [도마스]는 히브리어나 아람어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으로 보인다. [디두모]는 헬라어로 쌍둥이라는 뜻이다. 그것이 도마의 이름이 되었던 것이다. 도마와 예수가 쌍둥이라는 전설이 있다. 아마도 겉 모양에 있어서 예수를 많이 닮아 쌍둥이처럼 보였는지 모르겠다(Brown p.424). 다른 제자들은 [쉼마타이스] 의 번역인 바 '동료 제자들'이라는 뜻이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예수가 유대지방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판단에 의하면 죽음을 자취하는 행동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죽음을 피하여 나왔었기에 그리로 돌아간다는 것은 죽으러 간다는 말이 될 수밖에 없다. 같이 가서 죽자는 도마의 말은 매우 비장한 각오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은 아직 없는 까닭에 예수의 승리를 낙관하기보다는 그의 죽음에 동참하자는 비관론을 편 것이다.

< 17절 >

나사로가 죽자마자 곧 무덤에 묻혔고 예수가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나흘이 지난 후였음을 알게 됐다. 나사로가 철저히 죽어있는 상태였다.

< 18절 >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올리브 산을 넘으면 베다니 마을이 있다. 예루살렘에서 15스타디온 거리니까

2.8km쯤 떨어진 곳이다.

< 19절 >

그 시대 유대인들은 남녀가 따로 장지까지 따라가고, 여인들은 장례 후에 돌아와서 30일간 곡을 한다. 나사로가 죽고 장례가 치러진 후에도 마르다와 마리아는 계속 애도하는 기간에 있었고, 친지 유대인들이 많이 와서 위문을 하고 있었다.

< 20절 >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지나고 상(喪)의 초기여서 아직 슬픔이 짙게 감도는 순간에 예수가 그 곳에 나타났다. 예수가 오신다는 말을 듣고 마르다는 예수를 맞으러 나갔다. 그러나 마리아는 정신없이 앉아서 슬퍼만 하고 있었다. 아마도 누가 와서 귓속말로 마르다에게 소식을 전한 것 같다. 마르다는 동생 마리아에게 알릴 겨를도 없이 황급히 예수를 맞으러 나갔다.

< 21절 >

예수를 만난 마르다의 의당의 말은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였다. 원문비평란에서 이미 토론한 바와 같이 권위 있는 사본에는 주여(kurie)라는 호격 명사가 들어 있다. 한글개역판은 그것이 없는 비평판 성경을 번역한 것 같다. "주님, 당신이 여기 계셨더면 …" 하는 식으로 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주님'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면서 부른 것이 아니라 다만 존경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의미에서 말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르다의 신앙이 아직은 미숙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 22절 >

마르다의 예수 인식은 그 다음에 한 말에서 드러난다.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여기의 '주께서'는 원문에 없는 말이며 단지 '당신이'라는 말을 그렇게 번역했을 뿐이다. 마르다는 예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하나님과 대등한 존재라는 생각은 아직 하지 못했고 다만 하나님과 누구보다도 밀접한 관계에 있는 분으로 믿은 것 같다. 예수가 지금까지 행한 모든 기적들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힘으로 하셨다고 믿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예수에게 힘을 주시면 자기 동생 나사로를 살아나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으로 말한 것 같다.

< 23절 >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예수는 당신 자신이 나사로를 살리겠다는 말을 하지 않고 단지 그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말만 하셨다.

< 24절 >

그 말씀에 대해서 마르다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기본 신앙을 토로했다. 즉 사람이 죽지만, 마지막 날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는 모두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에 마르다도 자기 동생 나사로가 종말에 다시 살아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 25절 >

마르다의 이 부족한 신앙을 고쳐주시는 의미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선언하셨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힘을 빌어서 능력을 행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곧 부활이요 생명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비록 죽을지라도 생명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게 되리라는 것이다. [에고 에이미]는 `나는…이다'라는 공식이기도 하지만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도 된다. 즉 (I am) 또는 (I am)는 하나님의 이름이시다. 그러므로 "나 하나님 곧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말도 되는 것이다.

< 26절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누구든지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를 믿는 자는 영원토록 죽지 않고 생명을 누릴 것이다. 여기서 죽지 않는다는 말은 [우 메]라는 이중 부정을 통해서 결코 죽지 않는다는 강한 뜻을 가지고 있다. 예수는 생명이시기에 그를 믿음으로 예수 안에 연합한 자가 되면 결국 예수의 생명이 그 믿는 자 속에 흐르고 현재로부터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믿느냐"는 예수의 추궁은 마르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시려는 의도에서였다. 지금까지 남달리 예수를 가까이 모셨지만 아직 참된 의미에서 예수를 알고 믿은 것은 아니었다.
< 27절 >

마르다는 나사로를 살리시는 예수의 기적을 아직 보기 전에 귀한 신앙고백을 했다. 보지 않고 믿은 귀한 본보기라 할 수 있겠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다시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은 그리스도이시며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가 될 것이다. 마태복음의 베드로의 신앙고백(마16:16)과 유사하며,요 20:31의 저술 목적에 부합하는 고백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르다가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의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고 말했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믿나이다 [에고 페피스튜카] 는 '나'라는 주어가 강조되어 있으며 '믿는다'는 현재완료직설법 동사로서 동작의 결과보다도 완료의 뜻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 28절 >

진일보(進一步)의 신앙고백을 한 마르다는 황홀한 마음으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마르다를 타일러, 마리아에게 가서 조용히 불러오라고 지시하였다. 마리아는 집에서 다른 많은 조객들과 함께 슬픔에 잠겨있었기 때문에 큰 소리로 예수가 오셨다는 말을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는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슬그머니 마리아를 데리고 오도록 하였다.

< 29-30 >

예수가 오셔서 자기를 부르신다는 말을 들은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에게르데타퀴]예수께 나아갔다. 예수는 동네로 들어오지 않고 마르다를 만난 자리에 그대로 계셨기 때문이다.

< 31절 >

위문 왔던 조객들은 마리아가 벌떡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았을 때 그녀를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마리아가 나사로의 무덤에 가서 통곡하려는 줄 알았기 때문에 같이 가서 위로하려는 것이었다. '생각하고' ([독산테스])가 어떤 사본에는 '말하면서'([레곤테스])로 되어 있다. 전자는 마리아가 무덤으로 간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들이 따라나섰다는 말이 되고, 후자는 마리아를 따라가면서 그가 무덤으로 가는구나 하고 말했다는 것이 된다.

< 32절 >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그를 뵙고는 예수의 발 앞에 쓰러져 언니 마르다가 말한 것과 거의 같은 말을 했다.

< 33절 >

예수는 마리아와 또 같이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셨을 때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다. NRSV는 이 대목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he was greatly disturbed in spirit and deeply moved. 죽음이라는 비극 앞에서 어쩔 수 없는 미약한 인간들이 울부짖는 광경을 목도하는 예수는 말할 수 없는 격한 심정이 되어 몸을 떨었다. [에타락센 헤아우톤] 은 문자대로 번역하면 자기 자신을 요동시켰다는 말이 된다.

< 34절 >

`시신을 어디에 두었느냐'는 예수의 물음에 대하여 그들은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며 예수를 모시고 무덤으로 향하였다. 예수는 여러 사람의 울음에 공명하며 눈물을 흘리셨다.

< 35-36 >

예수께서 우시는 것을 본 유대인들은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가 눈물을 흘리시는 것은 오래 전부터 나사로를 사랑하고 계셨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 37절 >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을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거 기에 있던 유대인 몇은 예수가 소경을 고치신 것을 보거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소경도 거뜬히 고치셨으니 죽은 나사로를 왜 못 살릴 것이냐'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질문은 긍정적 대답을 기대하는 질문이어서, 예수는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한 말이다.

< 38절 >

예수는 격한 심정을 가지고 무덤으로 가셨다. 사랑하는 친구들의 슬픔에 동정하는 감정뿐 아니라, 신령한 의미에서는 죽음이라는 사탄의 장난을 생각하면 울화가 터지는 것이었으리라. 예수의 마지막 원수는 죽음이다. 죽음이 이렇게도 인간을 괴롭히는 것을 볼 때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사로의 무덤은 굴이었고 돌을 가지고 무덤을 막아 놓았던 것이다.

< 39절 >

예수는 그 돌을 치우라고 명하셨다. 마르다는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나 되었기 때문에 벌써 냄새가 난다고 하며,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투의 말을 했다.

< 40절 >

그러나 예수는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씀하셨다. 2:11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을 그리스도의 영광이라 일컬었다. 11:23, 25-26에서는 이미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날 것을 암시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믿기만 하면 기적이 일어날 것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사건이 된다고 피력하셨다.

< 41절 >

사람들은 예수의 명령대로 돌을 치웠다. 예수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말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예수는 당신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과거에 들어주신 사실을 두고 먼저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항상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을 알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제는 둘러 서 있는 군중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셨다는 사실을 믿게 하려고 기적을 행하겠다고 보고를 드린다. 여기 원문에 [에이폰] 은 단순과거여서 `말했습니다'라고 과거사를 말하는 것 같지만 히브리어에서는 말을 하자마자 바로 그 순간에 완성되는 즉시적 행동을 나타낼 때에도 완료동사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Brown, p.427). 그러니까 여기서는 한글개역판처럼 '이 말씀을 하옵는 것은' 이라는 현재형으로 번역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는 신앙은 기독교의 불가결의 기본 신앙이다.

< 43-44 >

하나님께 기도를 마치신 예수는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소리질렀다. 그러자 나사로는 손과 발이 천으로 묶이고 얼굴이 수건으로 싸매인 채 나왔다. 그래서 예수는 그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풀어주라고 명하였다.

< 45절 >

마리아를 위로하기 위해서 나왔던 많은 유대인이 이 광경을 지켜 본 후에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다. 이 유대인들은 예수를 괴롭게 굴던 유대인들이 아니고 호의적인 유대인들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예수를 믿었다는 것은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었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 그리고 그가 부활하시기 전 그리고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 과연 예수를 그렇게 명확히 알고 고백할 수 있었겠는지 의심된다. 아직은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믿음이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예수를 반대하지 않는 자가 되기만 해도 그에게는 희망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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