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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소 (요 18:2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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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는 예수님을 붙잡아서 안나스에게 갔다가 또 가야바에게 갔다가 드디어 빌라도의 법정에 세웁니다. 이 당시의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사형 판결권과 집행권이 로마 총독에게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넘깁니다. 28-32절까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빌라도 사이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고 그 부분의 사건들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을 붙잡아 온 자들에게 빌라도가 묻는 질문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빌라도가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죄목이 무엇이냐'라고 물을 때에 30절에서 대답하기를 (요 18:30)"대답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 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는 대답을 특히 유의해서 살 피겠습니다.

 이같은 대답의 의미는 `뭐, 우리가 쓸데없이 왜 당신을 번거롭게 하겠습니까 보 다 못해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와서 귀챦게 하게 되었습니다.'하는 식의 대 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소하는 이들이 얼마나 합법적인 절차를 밟고 객관성을 가 지고 일을 처리하는가를 보고 있노라면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란 반드시 부도덕하고 사납고 더럽고 악한 모습으로만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만 큼 어리석은 생각도 없습니다. 오히려 가장 도덕적이고 가장 의로울 것같은 곳에서 감쪽같이 죄악이 자행되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70년대에 반공 교육이 한창 행해졌을 때에 참으로 유치하고도 원색적인 설명을 하 여 간첩은 모두 뿔이 난 도깨비이던지 얼굴이 빨간 사람인 줄로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날 갑자기 신문에서 간첩단이 일망타진해서 나온 얼굴을 보면 우리 아버지 얼굴과 비슷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형님과 얼굴이 비슷한 사람이 있어 서 깜짝 놀라지 않았습니까 무슨 간첩이 저렇게 평범하게 생겼느냐 간첩이 간첩다 운 데가 없습니다. 날카로운데도 없고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송곳니가 입술 밖 으로 나와 있지도 않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죄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도 성경이 지 적하는 바를 집요하게 추적하기 보다 대강 넘어 가버림으로 죄를 죄인줄로 모르고 넘기는 경우가 많지 않는가 하는 걱정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단지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로 연결되고 있구나 하는 알려진 일상적인 사건에만 관심을 가짐으로 여기에 나타난 인간의 일반적인 죄 악과 부패한 상태에 대한 적나라한 고소를 놓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지금 예수님의 고난의 와중 속에서 나타난 제자들과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로마인들 등 모두에게서 인류의 처지가 어디인지를 가장 잘 나타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을 보면 거기에서 예수님을 죽이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게 됩니다.

말하자면 거기에는 바로 우리들도 끼어 있는 셈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마 26:57)" 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 마 26: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증거를 찾으매" 여기서 공회란 오늘날의 국회를 가리킵니다. 당시 최고 의결기관이었습니 다. 오늘날 말로 하면 입법 사법 행정 삼권을 쥔 지도자들이 다 합세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거짖 증거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짖 증거를 제대로 찾지를 못했 다고 했습니다.

(마 26:60-61)"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가로 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여기서 두 사람이란 신명기 19:15절에 있는 모세의 법에 기록된 최소한의 증거입 니다. 한 사람에 대한 고소를 증인이 하나밖에 없으면 안됩니다. 증인이 적어도 둘 은 있어야 합니다. 미국의 법정에서도 지금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두 사람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그 일을 원한과 복수심으로 조작하지 말라!는 것을 이야 기 하는 것이지 증인이 두 사람만 있다면 이길 수 있고 범법자로 만들 수 있다는 것 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쉽게 이 일을 가지고 사람을 잡는 일에 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눈에는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말은 모세가 무슨 이유로 주었는가 하면 복수를 하려면 눈을 다치게 한 것만큼만 해라! 그 이상을 하지 말라 는 뜻으로 그어 놓은 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보다 힘 없는 사람이 나 한테 잘못 한 것을 가지고 힘 있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많이 복수를 해댔느냐 하면 열배나 백 배쯤 해야 직성이 풀리는 독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나라 이조시대 때에 한국에 왔던 어떤 서양인이 기록한 한국 풍속에 이런 것 이 있습니다.

하루는 사대문 안을 걸어가고 있는데 `도둑놈 잡아라!'하는 소리와 함께 포졸들이 육모방망이를 치켜들고 셋이서 어떤 사람을 쫓고 있다가 선비 한 사람의 도포자락을 그만 밟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 선비가 큰 소리로 `이놈들 게 섯거라!'하는 것입 니다. 그러자 도둑을 쫓던 포졸 셋이 그 자리에 꼼짝 못하고 서더랍니다. `따라 오 너라!' 그러자 죄 지은 사람같이 꼼짝 못하고 따라 가더랍니다. 어떻게 처리하나 보 려고 갔더니 커다란 문이 달린 집으로 들어가더랍니다. 아마 정부 고관이었던 모양 입니다. `네 이놈들! 눈이 있어도 앞을 보지 못하니 있어 무엇하겠느냐 뽑아라!'하 는 것입니다. 하인을 데려다가 세 명의 눈 여섯개 중에 다섯개를 뽑더니 마지막 하 나를 남겨놓고 하는 이야기가 `다 뽑으면 어떻게 길을 찾아 집을도 돌아가겠느냐 다 뽑아 마땅하거늘 너희를 불쌍히 여겨 하나는 남겨두니 고마운 줄 알아라!' 그러 자 그 나졸들 하는 말이 `성은이 망극하여이다!'하고 돌아가더랍니다. 성경은 바로 이같은 횡포를 금지시키기 위하여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단서와 제한을 둔 것입니다.

어떤 서부 영화에서 주인공이 어린 시절에 부모님들이 악당들에 의해 살해 됩니다 동생까지 죽었는데 혼자만 살아 남습니다. 그리고 범인들의 얼굴을 기억해 놓았습니 다. 그후 그는 총잡이가 됩니다. 그에게 총잡이 훈련을 시켜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스승은 무법지대에서 총밖에 의지할 것이 없으니 가르쳤는데, 반드시 약자를 보호할 시에만 사용할 것이지, 복수를 위해서는 총을 쓰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나 중에 들어보니 그 제자가 복수할 원수를 찾아서 하나씩 죽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중간에 와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는 성경책을 건네 주고는 이것을 읽고 마음에 변 화가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사흘만에 다 읽었습니다. 성경을 되돌려 받은 스 승이 느낀 바가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성경이 어떤 의도하하에 그렇게 기록되었는지 정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궁극적인 자리에 나아 가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적당히 자기에게 유리하게 부쳐쓰고 떼어 쓰는 죄인 일 뿐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제사장, 서기관, 공회원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법에 도무지 저촉되지 않는 사람들 같이 보입니다. 증인도 둘 이상 세워라 그래서 둘 이상 세웠 고 그들이 스스로 목숨을 뺏지 않고 빌라도 총독에게 보내서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예수님을 사형에 집행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합법한 절차를 밟았다고 해서 정당하 였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죄성이 거룩한 포장만 덮어 썼을 뿐이었다 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에서 예수님을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 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절기를 지키려고 하여 이방인의 관정에 들어가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이방인 된 로마인의 관정에 들어가서 부정하게 될까봐 철 저히 조심할 정도로 하나님의 율법과 거룩함에 치밀한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러한 열정을 가진 자들이 유월절의 어린양 되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를 죽였습니다. 이 얼마나 기가막힌 놀라운 대조입니까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이들 의 이같은 행동 양식에 대하여 신랄하게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이 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다시말해, 그렇게 세세한 문제는 잘도 지적하고 구별하여 걸러 냅니다. 유월절을 얼마나 거룩하게 지 켜야 되는지, 그리고 두 세 증인이 있어야만 고소할 수 있는 것도 잘 지킵니다. 이 게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일입니다. 즉 남의 눈의 티는 잘도 알아봅니다. 그러나, 약 대는 삼키는데 목에 걸리지도 않습니다. 하루살이는 먹어도 목에 걸리기전에 잇새에 끼일 정도로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약대같이 큰 문제에서 는 아무런 꺼리낌이 없이 저질러 놓고 태연 자약합니다. 그야말로 약대는 통채로 삼 키는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화있을진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기록만큼 우리를 찌르는 고소장이 따로 없습니다. 우리가 적은 죄문제에 대해 서는 그렇게도 철두철미 작고 적은 하루살이 걸러내듯 잘도 구별해 지키면서 예수님 을 죽이는 일에 있어서는 주저없이 일어섰던 자들입니다. 적어도 우리도 그를 미워 했었던 자들입니다. 왜 미워했습니까 우리를 죄인이라고 해서 미워했습니다. 이것 이 성경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대표로 세워서 우리에게 이야기 하는 중요한 핵심 중 하나입니다. 다시말해 나는 적어도 제사장이고 공회원이요 바리새인입니다. 왜냐 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그 언행심사가 오늘날 우리들에게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누가복음 5장의 금식 논쟁 사건을 보십시오. (눅 5:27-33)"그 후에 나가 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저가 모든 것 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 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 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예수께서 대답하 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저희가 예수께 말하 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 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지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무엇으로 예수님을 비방하는가 보십시오. 왜 죄인 들과 썩여서 노느냐 왜 거룩한 생활을 안 하느냐 그리고 또 따지는 것이 왜 당 신은 금식을 안 하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한 가지 목적 달성을 위하여 이 모 든 종교적인 지식과 율법들을 동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목적입니까 예수님을 책잡아 죽이기 위한 목적뿐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셨던 이스 라엘을 향한 율법의 방향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그 주신 율법으로 누구를 때려 잡을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비단 바리새인 서기관들의 문제만 아니라, 오늘날 우 리들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신앙의 싸움거리입니다. 율법을 준 중요한 목표가 무엇입 니까 로마서 13장을 보십시다.

(롬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 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사 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율법을 주신 목적이 단지,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고 도적질 하지 않는 등 겉으로 드러나는 잘못을 안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 자신과 인생을 악에게 병기로 드리지 말고 의의 병 기로 드리며 선을 이루고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는 말씀입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작 맺혀야 할 성령의 열매와 선한 일에는 힘쓰지 않고 노상 앉아서 하는 일이 누구 누구는 기도를 잘 하지 않고, 누구는 거짓말을 했 고, 누구는 술을 먹었고, 이런 것이나 적어 가지고 자기가 무슨 친위대 대원이나 되 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그런 것이나 보고하고 있어서 되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받아놓고 기껏해서 한다고 하는 일이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을 흠잡는 일에 사용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중심에 사람을 살릴 생각이나 거룩한 완성이나 생명과 영생을 향한 목표가 없다는 것입니다 있다면 여전히 남을 죽이고 시기하며 원수맺는 악한 일에 빠져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하는 일의 조목 조목은 다 옳은데 결국 그렇게 해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 더라는 것입니다. 칼로 찔러 죽이나 나쁜 소문을 일으켜 그를 사회에서 매장시켜 죽 이는 일이 죽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같은 이야기를 지적하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금식이 등장했다 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가면 또 다른 금식 논쟁이 있습니다.

(눅 18:9-14)"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 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불 의,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 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 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 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그러니까,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국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야 될줄을 알고 하나님 앞에 도우심을 구하러 나아온 가 난한 심령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는 말이 `하나님 심판해 주십 시오! 이 사람이 낫습니까 내가 낫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 나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여기에 나타난 바리새인과 같은 자세를 취하는지 모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다릅니다. 하나님 나를 그렇게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합니다. 그리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냅니다!' 이렇게 자랑해 놓고 결국 바리새인 들은 뭘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도적질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 아니라, 한 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잘 내는 자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여러분, 이 강력한 지적을 가볍게 넘기시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누가복음 5장을 계속 보시면 금식 사건으로 이런 말씀으로 연장됩니다.

(눅 5:34-39)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 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 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 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여기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우리의 심성이 근본적으로 고쳐지지 않고선 안된다는 지적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을 바로 알고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서는 아무리 기독교적인 지식과 율법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헤친다는 것입니다. 결 국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가지고 살인을 하는 무서운 자리에 서고 만다는 지적입 니다.

이것이 누구이야기입니까 다른 사람 이야기로 여기실지 모르지만 바로 여러분들 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촉구합니까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라고 하십 니다. 율법이 율법으로서 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중생한 이후에라야 가능합니다. 하 나님을 사랑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가 된 다음에야 가능한 것입니다. 이 제 여러분들은 그것이 가능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그냥 가만히 방치해 두면 언제나 옛 그 습관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 다. 성경은 우리에게 살인하지 않았느냐 도적질 하지 않았느냐 간음하지 않았느냐 를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느냐 이웃을 사랑하고 있느냐 라고 묻 고 있습니다.

(요 5:39-42)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 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바로 이 지적이 죄인된 우리들의 가장 적나라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다는 지적입니다. 이같은 사랑하지 않는 죄인의 근성에서 속히 벗어나고 뿌리 쳐야 할 것입니다.

(요 8:37-44)"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 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 하되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 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 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 내신 것이니라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줄 알지 못함이 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 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 었음이니라" 신앙이란 율법을 지키는 싸움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십일조를 바쳤느냐 주일을 지켰느냐의 싸움도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이웃을 사랑하느냐 하 는 싸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십일조를 내고 주 일을 성수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맛이 상한 음식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주일을 지키는 것이 기쁜 일이 되는 것이고 주를 사랑한다면 나에게 못 되게 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주님이 사랑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상대방이 정말 자기를 사랑하는가 아닌가를 확이하기 위해서 그 사람을 자기 집에 불러다가 식사 대접을 해 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음식에다 소금을 평소에 열배 정도를 쳐놓고 음식을 내놓는답니다. 못먹을 만큼 음식을 짜게 해서 내 놓았는데도 말없이 그 음식을 먹으면 정말 자기를 사랑한다고 인정한답니다 사랑한다면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려고 발버둥치게 되어 있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란 우리가 억지로 지키도록 요구된 것이 아닙 니다. 율법은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하는 기준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안지켜도 좋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안 지키면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2장에는 안식일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막 2:23-28)"안식일에 예수께 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쌔 그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바리새인들이 예 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 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한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 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여기서 지금 바리새인들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책잡기 위하여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율법들을 총동원하여 걸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 안식일에 왜 일을 합니까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라는 논 조로 예수님을 몰아부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잡하시기를 `하나님은 죽이려고 율 법을 만드신 분이 아니다. 너희를 사랑하고 구원하고 복을 주려고 율법을 주신 분이 다. 너희가 다윗의 행사를 보아라,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 사람이 먹으면 안되는 것을 다윗과 그 부하들이 다 먹었는데 하나님께 서는 그들을 죽이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사람을 살리려고 하시고 은혜를 베풀려고 하신다.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여 그 율법을 가지고 언제나 사람을 죽일 궁리만 하고 있느냐 안실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지 않다!' 라고 말씀핫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아주 중요한 하나의 철 칙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 꼭 하라고 시키시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반드시 나에게 복이 되기 때문에 하라는 것이지, 무슨 네로같은 폭군처럼 재 미있으려고 우리를 고달프게 하는 예가 없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괴롭히시는 분이 아닙니다. 율법을 대할 때에 그것을 괴롭고 고달픈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너무도 모르는 소치입니다. 이렇 게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서 우리를 살리시고 축복을 주시고자 하는데 그 목적을 두 셨다면, 우리는 지금 어떠합니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신앙상의 모든 지식 들을 가지고 이웃을 얼마나 살려냈으며 위로했는가 말입니다. 한번 깊이 돌이켜 보 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3장에도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금식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대단히 큰 문제입니다. 이것을 성경이 어떻게 이야기 하고 있는가 분명하게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눅13:10-16)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십 팔년 동안을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 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내어 무리에 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하거늘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 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여기에서 말씀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옳은 이야기입니까 여러분, 신앙 생활에서 여러분이 가장 많이 걸리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잘난 척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난 척은 하면서도,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잘난 척하며 남을 괄시하는 것을 보 면 도무지 못참아 하는 우리들입니다. `누가 이번에 뭘 했대지, 돈도 많구먼, 뭘 그리 잘난 척을 하고서.....'라고 혼자서 중얼거립니다. 왜 이럽니까 누가 유명해 져서 지위가 높아졌습니다. 그러면 `그 참 잘 되었구나!'라기 보다, `아이고 이번에 또 높아졌으니 그 거들먹거리는 것을 어떻게 봐' 하는 마음이 왜 먼저 떠오르는가 하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셔야 합니다. 상대방이 잘못하고 있으니까, 그런 마음을 갖지... 라는 이야기는 우리와 상관이 없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되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요구하셨 기 때문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 이것까지 율법이 요구하 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단지 정당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는 수준으로 요구하고 있 지 않습니다. 더 이상을 요구하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다시말해 `난 거짓말 하지 않았다, 난 욕하지 않았다, 난 교만하지 않았다를 지키는 것이 율법의 요구가 아니 라, 원수를 사랑하며 그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며 그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헐벗거 든 입히는 자리에까지 가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러 오 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쫓아 가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로마서 13장에서 율법의 완성이 사랑이라고 하고 있습니다만, 갈라디아 5:14절에 서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 5:13)"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 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여러분, 종이라는 신분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픈 직책입니까 자존심이 없는 직분 입니다. 이러한 `종노릇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는 것이 참 사랑의 길입니다. 그래 서, (갈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 었나니" 다시말해 사랑으로 종노릇 하는 그것이 율법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는 것 입니다. 만일 성도가 이것을 놓치면 율법과 종교적인 지식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 하면 (갈 5:15)말씀대로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무슨 뜻 입니까 만일 그가 가진 종교적인 지식이 사랑으로 종노릇 하는 자리에 까지 못가면 결국 그 많은 종교적인 지식을 가지고 피차 물고 먹는 것밖에 더 있을 일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래, 너가 얼마나 잘났냐'라는 생각이 있다면 틀 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주님께서 지셨던 십자가처럼 서로 종노릇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 일에 여러분의 인생을 걸어야 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리 마태 집에서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비방하였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는 건강한 자를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병자를 부르러 왔고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그 분을 마음에 영접한 신자라면 마땅이 그 분의 말씀 이 이것을 좌우명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신자의 평생의 목표는 원수가 없는 것입 니다. 섭섭함이 없는 것입니다. 억울함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입은 사 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원수와 섭섭함과 억울함들이 사랑으로 바꿔치기 당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젠 우리들으 우리의 뺨을 때리는 자를 향하여 또 다른 뺨을 댈 것이요, 나에게 저주하는 자를 축복할 것이요, 나에게 가장 못되게 구는 자 를 위하여 기도할 것입니다. 이젠 우리에겐 사랑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좋 아하십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옳고 그른 것을 판가름 지우는 싸움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 옳고 그른 것이 이 사랑과 덕을 세우는 경지에 이를 때에 다른 사람을 살려내고 주 님처럼 한 알의 썩는 밀알로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는 기적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오늘 내가 쌓은 신앙의 지식들이 또 다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아닌지를 돌이켜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으로 종노릇하고 밀알처럼 썩어지고 당 해줌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살려내고 위로하고 북돋우어 주었는가를 정검하시 고 거기에 남아있는 신앙의 생애를 걸게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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