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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승리의 부활 (요 2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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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승리의 종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 다. 예수님은 오늘 새벽, 무덤을 박차고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승리의 부활을 하 심으로 어느 종교에서도 찾을 수 없는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바로 지난 주 일 동안에 온갖 고난과 수모를 당하신 후 십자가를 지시고 금요일 오후에 운명하시어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 지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세상은 어둠으로 꽉 차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모든 것은 패배로 끝나는 것같았습 니다. 그러나 그 모든 상황과 조건은 오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와는 정반대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이 얼마나 감격적이고 통쾌한 일이며 희망을 주는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받아 들임으로 예 수님의 부활이 내 부활로 바뀌어지고 예수님의 승리가 내 승리로 역사하는 귀중한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이 부활의 신앙을 믿는 자들에게는 무한한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1.그리스도의 부활은 거짓을 진실로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은 거짓된 사람들에 의하여 날조된 사건으로 죽임을 당하셨습니 다. 군중들은 예수님의 진실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이는 것만이 자신들의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생각하여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입니다. 그후에도 예수를 실패자로 낙인을 찍어 그의 이름을 지상에서 없애고 추종자들을 말살시킬 것을 계획했었습니다. 그들의 계획은 잘 진행되었으 며 예수님을 죽임으로 자기들의 승리라고 쾌제를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악마의 승리의 개가는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패배의 탄식으로 바뀌었습니 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에도 저들은 예수님을 부활을 부인하려고 갖은 계략을 지금까지도 계속하고 있습니다./시 체도난설/ 기절설/ 환상설. 이와는 반대로 부활은 더욱 확실한 사실성을 가 지고 있으므로 승리를 가져왔습니다. 1)예수님은 15회에 걸쳐 다시 살아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2)부활하신 예수님은 여러차례 제자들과 성도 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3)역사가들이 증언합니다.) 진리는 반드시 승리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거짓을 이기신 승리의 부활입니다.

 2.공포에서 기쁨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수많은 반대자들은 예수와 그 제자들을 공포와 도가니 속으로 몰 아 넣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결박함으로 불안에 떨게 하였습니다. 예수 님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그들을 슬픔으로 몰아 넣으려고 하였습니다. 예 수님을 무덤속에 가둠으로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을 공포에 가두려고 했습니 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은 공포속에서 헤어날 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마26:31절에 예언하시기를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고 한 말씀대로 예수님의 체포당하심으로 제자들은 공포의 상황에서 모두들 떨 게 되었습니다. 어떤 제자는 알몸으로 도망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멀 찍이 따라 가다가 공포의 분위기 속에서 드디어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 번개가 치고 뇌성이 울릴 때 그 공포는 더 심했습니다. 이때 세상은 온통 두려움으로 꽉차 버리고 말았습 니다. 그러나 오늘 새벽 예수님의 부활로 그러한 분위기는 기쁨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굳게 닫혀 있던 무덤의 돌문이 열림으로 모든 믿는 자들의 기쁨의 문도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은 공포를 기쁨으로 바꾼 승 리입니다.

 3.절망에서 희망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이때의 모든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하늘을 쳐다 보아도 시커먼 먹구름으 로 뒤덮혀 있었고 실날같은 햇볕도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좌우를 살펴 봐도 기대할 수 있는 조건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감옥에 갇히 셨거나 병환에 걸리셨다면 희망이라도 가져 보겠지만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 로 꼼짝 못하는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죽어버린 절망의 어머니 마리 아를 상상해 보십시오. 구원자요, 사랑의 대상인 메시야를 잃어버린 성도들의 실망은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래서 저들은 향유를 준비하여 새벽에 올라가서 예수님의 시체에 발라 드리는 것이 고작 희망이었습니다. 무거운 돌문이라도 누가 열어주는 것이 고작 저들의 바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향 유도 필요없었습니다. 돌문은 완전히 열여져 버렸고 그 절망의 돌문은 지금도 열려져 있는 것입니다. 절망의 눈물을 기쁨의 눈물로 바꾸셨습니다. 엠마오 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이 죽은 후 고향길로 떠나며 농사나 짓자, 나같은 것 이 뭐 메시야를 따라 다닌다고 하며, 허무와 절망에 사로 잡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들의 눈을 밝혀 주셨고, 희망의 눈동자를 주셨습니다. 그 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셨고 희망의 마음으로 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발걸 음의 방향을 바꾸어 주셨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도록 희망적 삶의 발걸음을 찾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21장에는 실의에 젖은 베드로 가 절규를 하며 따라나서는 제자들과 함께 절망의 바닷가로 고기를 잡으러 가 서 그물을 던집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헛수고 였습니다. 이 때 부활의 주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다시 잡 은 희망을 놓치지 않고 죽을 때까지 희망을 갖고 살았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승리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 어떤한 절망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가 있게 됩니다.

 4.죽음에서 생명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생명의 한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의 죽으심은 자연적 사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 적인 죽음이었습니다. 그 의도한 무엇입니까 생명의 승리를 위한 계획이었 습니다. 우리의 죄악을 구세주가 짊어지고 사망에 묻어 버리는 과정이 그리스도의 죽음이었습니다. 우리의 죄값을 죽음이라는 것으로 지불했던 것입 니다. 우리를 다시 살리시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 러나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끝마쳤다면 예수님은 실패자였을 것입니다. 예수 님은 생명의 부활로 자기의 승리를 확정하셨던 것입니다. 죽음은 예수님 앞 에 무기력하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무덤이 빈 무덤이 아니 었다면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 처럼 죽어 있는 종교였을 지도 모릅니다. 기독교의 귀중성을 영원한 새 생명에 있습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는 실패자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롬6:5절에 "우리가 그이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것처럼 그 이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한 죽음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었고, 새 생명도 연합자가 되었습니다. 로 마의 사형법에는 연합하여 죽이는 형벌이 있습니다. 시체와 맞붙여 놓으면 그 독으로 죽는다고 합니다. 우리의 죄의 속성도 그리스도와 맞붙어 죽고, 사 는 것도 그리스도와 맞붙어 살게 된것입니다. 롬8:10"예수를 죽은 자 가 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할 살 수 있는 성도 입니다. 그의 부활을 받아들이는 순간에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여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이것을 네 가 믿느냐"고 묻거 계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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