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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의 기쁜소식 (요 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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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입니다.
모든 인간이 범한 죄의 값을 대신하여 죄가 하나도 없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표로 고난을 당하시고 피흘리시며 죽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죄에서 해방되고 영생을 소유하게 되였습니다. 이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수많은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지금도 고난을 당하고 또한 앞으로도 당하리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피흘림의 종교이며 남을 위하여 나 자신이 고난을 당하는 종교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내가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고난과 죽음에만 머무르고 끝이 나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의 끝이 고통과 죽음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리시고 죽으신 것으로 그의 사명이 끝난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시므로 우리들에게도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주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삶은 고난의 삶이지만 그 고난이 끝이 나면 영광의 부활과 영생이 있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고대에서부터 현대까지 우리 인류는 영생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한번 죽는 것으로 그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고 난 뒤에도 영원히 살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인간임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집트에 가면 고대 왕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 무덤이 어마어마하게 크게 만들었고 그 무덤 속에는 왕의 시신이 썩지 않도록 방부제 처리를 하여 묻으면서 왕이 죽으면 살아있는 왕비와 신하들도 함께 매장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 무덤 속에서 영원히 살기를 바라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애석하게도 6천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은 살아나지 못하고 미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생명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피라미드를 발굴하면서 작은 물병이 하나 있어서 그 속을 보니 몇 개의 완두콩이 들어 있었습니다. 6천년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시커머게 되였고 쪼글쪼글하게 말라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 씨앗을 물에 담가 보았더니 싹이 트는 것이 였습니다. 그래서 땅에 심으니 뿌리가 나고 줄기가 솟아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놀라운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왜 완두콩은 싹이 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이 완두콩 속에는 생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생명을 소유했다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생명을 소유했다면 완두콩처럼 6천년간 어둠 속 무덤 속에 갇혀 있다고 하여도 다시 살아 날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근원은 누구이겠습니까 우리들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요11:25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이시며 생명이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신앙임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

부활절의 아침은 죽음에서 영원한 새 생명을 소유하는 시간입니다. 오늘 여기 우리 사랑하는 성도여러분께서는 모두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신 줄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아침은 죽음의 생명의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부활의 아침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유대교인들은 지금의 토요일인 안식일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지만 우리들의 기독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아침을 계기로 하여 일요일을 주일로 정하고 매주 일요일마다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을 보면 부활의 날 아침에 아직 해가 뜨기 전 어두움이 덜 걷힌 시간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바르기 위하여 무덤으로 달려갔다가 무덤의 입구를 막고 있는 돌이 옮겨간 것을 보고 발길을 돌려서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고 일러주었고 이에 베드로와 요한이 달려가서 보니 예수님의 시체는 없고 시체를 쌓던 세마포만 남아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았으면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만 걱정하며 다시 집으로 돌아갔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시체까지 없어진 것이 가슴이 아파서 무덤 밖에서 울고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리아야 어찌하여 울고 누구를 찾느냐” 하시며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마리아는 다시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제자들에게 외치기를 “주님께서 다시 살아 나셨다.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하며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중심으로 부활의 기쁜 소식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부활의 기쁜 소식은 우리들도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소식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의 공포입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 중에서도 몸이 불편하여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의사가 말하기를 “당신은 불치의 병에 걸렸습니다. 이제 며칠 있으면 당신은 죽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죽음의 두려움에 떨지 않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모든 인간은 죽음을 앞에 두면 두려움에 떨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인간의 본능입니다. 2차 세계대전 때에 전쟁터에 나가서 총을 맞아서 죽은 사람보다 전쟁의 두려움 때문에 병이 들어서 죽은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렇게 모든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이길 수 있는 소식이 바로 부활의 기쁜 소식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고전 15:55-57을 보면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불의가 승리하는 것 같고 죄악과 사망의 권세가 승리하는 것 같았지만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사망을 이기신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하셨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된 것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설교제목은 바로 부활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것을 전하지 않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힘차게 전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 부활의 신앙이 없었다면 그들은 모두 믿음을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핍박이 너무도 강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믿음 때문에 가족과 헤어지고 잡혀가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죽음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굶주림과 추위, 잠을 자지 못하는 괴로움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풍랑을 만나서 여러번 죽을 뻔했노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난 중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힘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부활의 신앙 하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매를 맞고 죽는 다고 하여도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하실 때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될 것이며 영원한 왕 노릇을 하고 상급을 받게 되리라는 믿음 하나로 신앙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들도 이 부활의 신앙으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마리아는 무덤가에서 사랑하는 예수님의 죽음과 없어진 주님의 시체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을 떼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체없이 연약한 여인의 몸이지만 달려가서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일제시대 때 우리 나라의 임시정부 주석이셨던 김구 선생께서 젊었을 때 일본사람들에 의하여 민비가 살해된 것을 슬퍼하다가 국모를 살해한 원수를 갚는다고 일본 첩자를 발견하고 그를 주먹으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잡혀서 인천감옥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감옥살이를 하게 되였습니다. 마침 사형날짜가 정해졌고 이제 내일 모래 삼일 후면 사형을 당하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죽을 날을 기다리는 김구선생에게 아주 반가운 소식이 전해 졌습니다. 그것은 고종황제로부터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한다는 내용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전하여 준 것은 전화기인데 그 때 처음으로 인천과 서울의 전화를 가설하고 고종황제가 김구 선생을 살리려고 전화로 감형한다는 전갈을 내려서 살아나게 되였다는 것입니다. 전화가설이 삼일만 늦었어도 김구는 죽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활은 우리의 생명을 살리는 기쁜 소식임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2. 부활의 소식은 불의가 의를 이기지 못한다는 분명한 소식이었습니다.
아담이 사단의 꿰임에 빠져서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뒤부터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죄악의 종이 되였고 이 세상은 불의가 가득하게 되였으며 불의와 죄악이 진리를 이기고 승리하는 듯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성경말씀 창세기 이하를 보면 사람들이 진리 안에서 선하게 살기보다는 진리를 떠나서 악하게 살기를 더 즐거워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죄악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홍수로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도 했고 불로 심판하시기도 했으며 범죄한 이스라엘을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벌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죄악을 깨닫지 못하고 또다시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십자가에 죽인 것입니다.

악한 죄악의 세력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므로 이제 모든 싸움이 끝났고 자신들이 이겼으리라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진리와 선은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고 불의는 승리의 개가를 불렀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인 유대인들 제사장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노래하며 즐거워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얼마나 절망을 했겠습니까 그들이 육신 적인 생각으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왕이 될 것이라고 믿고 따르는 사람도 있었고, 영적으로 메시아라고 믿고 따르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간에 믿었던 사람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어 버렸습니다. 온 예루살렘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패했다.” 라는 소문이 퍼졌고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이보다 더 절망적인 이야기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예언하고 성경이 예언하신 말씀대로 삼일 후에 어두운 무덤 문을 여시고 부활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불의를 이기고 죄악을 이기고 승리한 것이며, 불의보다 선이 강하고, 거짓보다 진리가 강하며, 사탄의 역사보다 하나님의 능력이 강하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며, 이 땅의 최후 승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신앙은 죄악을 이기게 해 주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자는 진리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며 부활의 신앙을 가진 성도는 의와 진리 안에서 죄악을 이기며 사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다시 살아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인데 죄를 범하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영원히 사는 부활의 생명을 소유하였는데 죄악의 종이 되고 멸망의 자녀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며 또한 나의 부활과 영생을 믿으며 이 세상에서 진리가 승리할 것을 믿으며 진리를 행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3. 부활의 소식은 우리에게 힘과 능력이 솟구치게 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을 삼년간 따라 다니고 말씀을 배운 사람들에게는 절망의 슬픔이었습니다. 내가 믿고 따르던 선생이 죽었습니다. 나의 희망이며 나의 전부였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큰 절망과 고통을 가져다주었고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고 자기들도 예수님처럼 잡혀서 죽지나 않을까하는 두려움에 숨어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기쁜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죽었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났다는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으로 확인한 마리아는 기쁨과 희열로 감동이 되여 제자들에게 달려갔고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힘차게 전하였습니다.
다시 갈릴리 바다로 돌아가서 그물을 던지며 고기를 잡던 베드로에게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고 복음전파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의심이 많아서 주님의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믿지 못하고 있는 도마에게도 나타나셔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도다.” 하시며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만져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꺼번에 오백여 성도가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셨고, 예수님을 핍박하고 다니던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면서 사울을 부르시고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통하여 기독교는 뜨겁게 다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부활의 소식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용기 있는 사람들로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신앙을 가진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셨을 때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약한 자들이 아니라 강한 자들이 되였고 매 맞음이나 죽음이 두려워서 숨어 다니는 약한 사람들이 아니라 죽음을 뛰어 넘는 용기를 가진 능력의 사람들로 변화를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모두 잘 아는 말씀이시지만 우리 나라의 복음을 전해준 미국의 선교사는 장로교의 언더우드 감리교의 아펜젤러 목사님입니다. 이들은 이십대 초반에 목사 안수를 받고 그 당시로서는 참으로 가난한 나라인 조선 땅에 선교사로 자원하여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아침에 인천 앞바다에 상륙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초대교회의 제자들과 같은 뜨거운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선교사로 온 것입니다.
그 중에 우리 감리교의 선교사인 아펜젤라 목사님은 정동교회를 세우고 배재학당을을 설립하였으며 학원선교 병원선교 문서선교등 많은 선교에 힘을 썼습니다. 또한 그분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성경을 조선말로 번역하는 성경번역 사업이었습니다. 1900년에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고린도 전 후서를 번역을 마쳤고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 번역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인천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안개낀 목포 앞 바다에서 일본 상선과 충돌하여 배가 침몰하게 되였을 때에 자신에게 배당된 구명 쪼끼를 함께 배에 다고 가선 이화학당에 다니는 여학생에게 벗어주고 그분은 순교를 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부활의 신앙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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